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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36 )

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3.1 혁명 탄압은 이 땅 천주학 박해의 연장

필자는 3.1 운동, 3.1 혁명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이 땅 천주학 박해의 연장 선상에 있으며 평등 정신, 자유 정신 탄압의 또 다른 형태의 끝판 이라고 생각 하고 있다.
조선조 천주교 박해는 한마디로 천주학의 평등 정신에 대한 권부의 결사적인 반대이며 잔인한 탄압이었다.
언급했듯이 권일신등 초기 성조들이 천주학에 매혹 된것도  천주학이 강조하는 평등 정신이었고 그후 이땅의 인연있던 민초들이 천주학에 열광 까지는 아니더라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신앙을 지켰던 근간에도 그 평등정신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있었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천주교를 탄압하고 그 구성원을 무참히 살해한 것을 박해라 일컫는다. 조선조 천주교 박해는 주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있었는데 그 순서 대로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의 병오박해,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를 4대 박해라 칭한다.
하지만 조선 천주교는 이들 4대 박해 말고도 1784년 이승훈의 북경세례 귀국 후 어렵사리 공동체를 꾸린 이래 처음부터 가시밭 길을 걸어야 했다.  명례방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 을사년(1785년)의 추조 적발 사건을 필두로 진산 분주사건으로 촉발돼 권일신 선생이 희생돼야 했던 1791년 신해년의 사건 (신해 박해로도 부른다 ) 이며  윤유일과 최인길이  희생된 1795년 을묘년의 박해며 이태 뒤인 1797년 정사년의 박해로 이어 져고  박해와 탄압은  신유년 이태 전인 1799년 까지 계속 됐다.

분주사건으로 촉발된 신해박해는 이소설의 중요 모멘텀 이기에  다시 다루기로 하고 4대 박해를 중심으로 이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박해들을 간략히 살펴본다. 조선 천주교의 초기 역사이기도 하다.

먼저 을묘년의 사건이다. 1795년 6월, 은밀하게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가 있다는 제보를 받은 포도청은 그를 체포하려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사건 관련자인 최인길, 윤유일, 지황 3인을 끌고가서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했으나 이들이 끝까지 함구하자 모진 매질을 가하여 끝내 옥사하게 만들었다.  포졸들이 선교사의 은신처를 덮쳤을 때 그 집의 주인인 역관 최인길이 선교사 행세를 하며 대신 체포되었고 그가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선교사 주문모 신부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최인길이 가짜임을 알았지만 도망친 선교사 주문모의 행방은 알수 없었다.

주문모 신부 체포에 실패한 뒤, 조정에서는 천주교로 인해 정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고자 공식적인 박해는 피한 채 은밀하게 주문모의 종적을 추적하며 체포작전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1797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한용화(韓用和)가 도내의 수령들에게 천주교 신자의 체포와 박멸을 명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기세 좋게 확장되던 이존창의 여사울 공동체가 그 주 대상이었다. 이로 인한 충청도의 박해는 후임 관찰사 시대까지  이어져  1799년까지 계속 됐다.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 였던 신유박해는 다음과 같이 전개 된다.   정조가 1800년 8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벽파인 경주 김씨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면서  노론 벽파가 득세했다.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사교엄금을 명분으로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 사교철폐는 명분일뿐으로 실질적인 목표는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 이가환과 권철신은  채제공 사후에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의 가문, 성호 이익의 가문과 조상때 부터 있었던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이었다.
이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로, 남인 실학자였던 이가환, 이승훈 등 많은 양반 학자 및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 등이 처형되었다.  나중에 알아 볼 황사영 백서 사건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상황이 호전 돼 그후 15년 동안 큰 박해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탄압은 끊이지 않았다.
신유년 이후 교인들은 강원도나 경상도의 깊은 산골로 피신한 후 교우촌을 형성하여 생활했다. 그러던 중 1814년 전국적인 기근이 극심해지자 일부 백성들과 지방관들의 자의(恣意)로 중앙의 지시도 없이 천주교도들의 재산을 빼았고 박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老萊山) 교인촌에서 40명의 교인들이 체포되어 경주진영으로 끌려가, 여기서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은  인원은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진보(眞寶)의 머루산에서도 . 안동.  진영,  또 영양에서도 체포가 일어 났다.  이들 역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최종적으로 대구 감영에 갇힌 3백여명 중에  상당수가 고신에 못이겨  배교했지만 많은 수가  옥사 했고  1816년 12월 26일 27명이 공개리에 사형에 처해지는 등 수 차례 처형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박해는 강원도 원주에서도 발생해 다수의  순교자가 나왔다. 강원도에서도 박해는 조정의 박해령 없이 지방관의 자의에 의하여 전개되었고  30여명의 교도가 순교했다.

각지의  교우촌들이 파괴되었고 교인들은 재산을 약탈당했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했다. 당시 부터 천주교도의 재산은 신고자가 차지한다는 악법이 시행 됐다.  .

잠시 숨을 고르던 1827년(순조27) 정해년에는   전라도 곡성의 한 교인촌에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 곡성 현감에게 천주교도를 고발하는 밀고사건이 일어났고, 이를 빌미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천주교인 검거는 차츰 전라도 전역으로 파급되었고, 240여 명의 교인들이 전주감영에 갇히게 되었다. 그해 4월 전주의 포졸들이 경상도 상주에서 활동가를 체포하여 전주로 압송해 가면서 경상도에서도 천주교인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명맥을 이어가던  전라도 유항검의 조직이 풍비박산 됐다.

한양에서는 4월에 역관이자 의원인 이경언(李景彦)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는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하여 이곳의 교인 집으로 숨어 들었던 신자들이 체포되어 충주로 압송되어 갔다. 이렇게 하여 전라도·경상도·서울·충청도 등지에서 2~5월의 넉 달 동안에 5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11명이 순교하였으며,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신도들은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이처럼 신유년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박해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크게 위축되었으나 1820년대에 들어 교세는 조금씩 회복되어갔고 1830년대에 들어 그 교세가 확장일로를 걸었다.
다블리 주교등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 사제 9명의 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온 시기도 바로 이시기였다.

당시 집권세력인 안동김씨 문중에는 천주교인이 많은 관계로 천주교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1837년에 정권을 잡은 후 벽파(僻派) 풍양조씨 가문은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 사교근절을 명분삼아 천주교도가 많았던 안동김씨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해 박해의 시작 이었다.

1839년 기해년 헌종의 섭정인 순원왕후의 이른바 척사윤음으로 의해 시작된 기해 박해 에서는  118명이 공식  순교한것으로 기록돼 있다.   정약종의 아들이자 직암과 동섬의 맥을 이은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해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 등 이 이에 속한다. 프랑스인 선교사 6인을 비롯해 시성된 순교자의 수가 가장 많은 박해다.

다음은 병오 박해다.  1846년 병오년,   헌종 치하에서  조선에 입국해 활동하던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Ferreol)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사제를 입국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조선 최초의 서품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가 어렵사리 조선에 들어와 있었다.모두 정하상과 프랑스 신부님들 덕이다.  프랑스 신부 선교사들은 눈물 날 정도로 헌신적이었고 자신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조선에 밀입국해 왔다. 이 또한 후일 자세히 다룬다.  페레올 주교는  감시가 심해진 육로보다는 서해를 통한 바닷길을 모색하기 위해 김대건 신부를 황해도로 보내서 상황을 살피고 방법을 찾도록 했다.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는 그해 5월, 백령도 해역으로 나가 방법을 모색하다가 안타깝게도 돌아오는 길에 순위도 해안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해주감영에서 신문을 받던 김대건의 신분이 밝혀지자 해주 감사는 사안이 중대하다 판단하여 김대건을 서울로 압송했고 사건이 확대 되기 시작 했다.   이 병오박해 (1846년)는  희생자 순교자가 타 박해에 비해 많지는 않았지만 김대건 신부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김대건 신부의 뛰어난 학식과 인품 그리고 의연함은 조정 신료들에게 까지 커단란 의문과 감동을  던졌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던진 감동과 감화는 그 후   탄압과 박해의 강도를  매우 완화하게 했고 조선 천주교는 경신년 1860년 까지  일종의 중흥기를 맞는다.
1849년에 즉위한 강화도령 철종은 자신의 이복형 기족도 천주교도 였으며   성품이 온건했고 당시의 집권세력인 안동김씨 가문도 유화정책을 썼기에, 천주교는 점차 교세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한 해에 약 1,200명 이상의 새신자들이 입교해  전국의 신자수는 약 16,700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해박해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의 아들인 한양 좌포도장 김태영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과 출세욕 으로 우포도장 신명순을 부추켜  함께  경신년에 천주교 박해를 자행했다. 이들은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서울과 지방의 교인촌을 급습하여  신자들을 대거  체포해  포도청에 가뒀다.    이때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약탈, 방화, 부녀자 겁탈 등 엄청난  만행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조정에서도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와 병조판서 김병운(金炳雲) 등이, 과거 수차례 천주교도 박해로 인해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불행한 죽음을 가져오는 등 그 동안 왕실과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어왔다는 점을 거론하며 천주교인 체포에 반대했다.

결국, 두 포도대장은 문책 후 파면되고 교인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박해 기간 중에 프랑스 선교사들은 피신하였고, 조선인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도 경상도 죽림이라는 곳에서 체포되어 잠시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때의 광풍으로  전국에 가까스로 형성됐던  교우촌들이 황폐화되어 신자들은 생계수단을 잃고 유랑하는 자가 많아져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래도 6년 뒤인 병인년에 불어 닥칠 피바람에 비하면 낳은 형편 이었다.

병인년인 1866년 부터 일어난  병인박해는 조선 천주교 4대 박해 중 마지막이자 가장 큰 규모의 박해로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시기에 일어났다.  박해 중 가장 잔인하고 큰 규모의 박해였다.

1864년, 철종 사후에 고종이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인물로 천주교를 탄압할 생각이 없었다. 부인과 딸도 천주교 신자이고 그 자신이 불우하던 시절 천주교인과 접촉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자하는 계획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자] 이런 분위기를 편승한 대흥선원군의 정적들이 천주교와 같은 불순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니, 원래 벽파였던 조대비(趙大妃)마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정권 유지를 위해 정책을 바꿔야 했다.  전국에서 피방람이 불었고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대원군의 박해는 1868년에  부친인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이 벌어지자 더욱 거세졌다. 1871년까지 진행된 탄압으로 전국에 걸쳐 약 희생자 수는 무려 1만 4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 한티와 헤미 읍성의 참상은 특히 유명하다.  1868년에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신나무골과 한티 마을은  탄압을 피해 깊은 산골로 피신하여 생활하던 천주교인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이었다.  을해박해 때  대거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던 교인들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대구 감영이 가깝고 숨어 살기에 알맞은 신나무골과 한티에 모여 살게 되었던 것이다.  정해박해(1827년)며  이후에 이어진 여러차례 박해사건 때마다 탄압을 피해 각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한티에 와서 신자촌을 이루며 살았다.  이들은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소박하고 검소하지만 감사하는 마음 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 1868년에 포졸들이 들이닥쳐서 불문곡직하고 어른 아이 부녀자 노인 할것 없이 닥치는 대로  수백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 했던 것이다.

해미읍성 생매장 사건은 더 참혹하다.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옛 읍성이다.    충청도 서북 지역(내포지방 13개군현)의 군사와 치안을 함께 관장하던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또 잡아들인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는 처형장이기도 했다.

사건은 1866년  해미읍성 사또(병사)와 군관들이  끌려온 인원이 너무 많자  편의를 위해  천명에 가까운 인원을  대 집단 생매장이라는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 했던 것이 골자다.    제대로 된 신문도 없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그냥 모래 구덩이에 묻는 참상을 서슴없이 자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천인공노할 일을 자행하는 정권이 온전하다면 정말 하늘의 뜻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싶다.

이처럼  1785년에 있었던 ‘명례방 사건’이후 약 100년간 조선의 천주교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나 그 명맥은  끓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해는 천주교를 더욱 튼튼하게 확산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천주교 박해를 통해 실학을 중시했던 남인의  숙청은 조선의 근대화를 퇴보시켰고, 붕당정치가 무너진 자리에 세도정치가 자리잡았다. 붕당정치는 그래도 염치라도 있었지만 세도 정치는 그것마저 없었다.  천주교 박해는  쇄국으로 이어지면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일제강점이라는 망국의  치욕을 맛보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특히 민씨들의 세도 정치는 안김이나 풍조의 그것 보다 패악이 컸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는법.  대원군은 실각했고 말도 안되는 천주교 박해로 무고한 피를 흘리게 했던 조선은 국운이 다했는지 서구 열강과  강제적인 개항을 하게 된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희망이  개항에서 엿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과 1886년에 체결한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의 활동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 시대변화에 굴복한  조선 조정은 천주교인들이며 개신교를 포함하는 기독교 선교사의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활약하는 사람들이 개신교 선교사들이다.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으로부터 조선에 병원과 학교 사업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공식적으로 선교를 허용한것은 아니지만 선교회 사업(의료와 교육)을 허가함으로 간접적으로 선교를 허락한 것으로 개신교측에서는 받아들였다. 이로써 개신교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그해 9월에 중국에 있던 알렌이 의사자격으로 입국했고, 이듬해 1885년 의사겸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래튼이 합법적으로 입국했다. 이들은 조선 정부에서 공식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의사와 교사로 활동했다. 몇차례 강조 했듯이 이것이 우리로서는 천우신조였다.

1895년,  조선 조정은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또한 이 해에 천주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가 국왕 고종을 만날 수 있었다.   이윽고 1899년에 「교민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되며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실로  1784년 천주학 공동체를 건설한이래 115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 천주교회는 성당 건립을 추진해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던 명례방에는 1898년 한국 교회 첫 번째 주교좌성당인 명동성당이 세워졌다.

조선 천주교회의 지난한 역사는  선교사의  방문 없이  자생적으로 교회가 먼저 생겨난 로마 카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로  이는 선교역사에서 있어서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좋은 선례가 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제사문화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몰이해는 제사불허와 허용을  번복하는 혼선과 함께 불효불충(不孝不忠)하여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이로 인해 탄압과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   가난한 양반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은 국법으로 다스린 전례가 없었고 불충(不忠)의 의도가 없음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정치권력자들은 정적제거의 희생양이 필요할 때마다 제사거부와 평등사상을  천주교 탄압의 명분으로 삼아 왔다.

조선 천주교의 역사는 처절한 순교와 수난의 연속으로 그 상처가 너무나도 크다. 선교역사의 대가인 로빈슨 닐은 “고대 로마 제국의 교인들이 19세기 초의 70여년간에 겪은 조선 교인들만큼의 수난을 겪었을까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 했다.  또 닐 교수는 조선 천주교의 역사는 “요컨대 가장 로맨틱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난사”라고 격찬했다.

천주교의 상처는 개신교의 토양으로 역할 해  조선에서의 선교 자유 획득 꼭 20년 만에 3.1 혁명으로 발현 된다.

(계속)

 위 사진  사적 제116호로 지정된 해미읍성.  조선시대 건축된 성이지만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당시 약 1천여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당한 천주교 성지다. 서산시에서는  매년 10월에 해미읍성 역사체험제를,  4월부터 10월까지 해미읍성 전통문화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맨 위 사진은 병인박해를 그린 서울 평화방송 특집 방송의 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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