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영 기자
내 생애 가장 뜨거웠던 여름
국민학교(나때) 1학년 여름 방학 이래로 8월 31일은 여름의 마지막 날, 9월 1일은 가을의 첫 날 같은 기분은 사십 여년 동안 거의 변함 없다. 한 낮의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은 벌써 부터 제법 가을 티를 내려하고 아침 저녁의 공기는 긴 소매 옷을 찾게 만든다.
이번 여름은 살아 온 나날 중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이 말은 나 뿐만 아니라 살아서(?) 올 가을을 맞는 사람이라면 누구라 할 것 없이 공감 백배 일게다. 어떤 과학자는 기후변화 때문에 이번 여름이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라고도 말했다지만…그는 여지없이 틀렸다.
그런데 누가 뭐라하건 우리 모두가 그 고곳의 기록적 염천(炎天) 속을 지나오는 동안 각자가 느꼈을 ‘인생의 온도’는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번 여름 내 ‘인생의 온도’는 오십 번의 여름 날 중 기록적으로 뜨거웠기 때문이다. 내년은 더 뜨거울지 모를 일이지만…가슴 속으로 느끼고 머리 속으로 자각하는 인생 온도 말이다.
이전 까지는 꼭 30년 전인 1995년 여름, 안양에 위치한 101 야전공병단에서의 유격 훈련- 그 중에서도 피(P) 터지고 알(R)박히고 (I) 이 갈린다는 사격술 예비훈련 (Preliminary Rifle Instruction)이 내 여름 인생 최고 온도를 찍었었다. 돌과 못에 찍히고 까진 팔뚝과 무릎 흉터들이 여전히 남아있으니 95년 여름, 스물하나 인생의 온도는 마치 장식장 속의 훈장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2025년 쉰 살 여름이 스물 하나 그 여름을 이겼다.
얼마전 나는 천신만고(?) 끝에 뉴저지 블룸필드 한의대 (Eastern School of Acupuncture and Traditional Medicine at Broomfield)의 입학허가를 받았고 지난 주 입학관련 모든 절차를 마쳐 이제 2025 Fall Semester 신입생이 됐다.
우리 커뮤니티에서 오랫동안 학생들 진학지도를 해 온 스테파니 장 전 팰팍교육위원장과의 상담을 통해 추천 받은 뉴저지 최초의 정식 한의대 이기에 입학 소감이 각별하다.
오십세에 다시 공부를 결심한다는 것. 괜찮다. 생각을 많이 하지 않고 일단 뭐가 됐든 행동 부터 하면 그 다음은 ‘다음’ 이 알아서 한다. 단,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그런데 중간에 숨차고 이게 맞나 -하지만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으므로 에라 모르겠다 달려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번 오십번째 여름이 그랬다.
이야기는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년 10월, 4년 여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던 매장의 매니지먼트가 바뀌면서 퇴사했다. 두 어달 가량 쉬면서 사실 생활대책이 안되는 글쓰는 일 말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것인가 사유하던 중 생전 안 아프던 무릎이 아파 남편 친구가 원장으로 있는 한의원에 갔다. 갱년기 초기 증상이란다. 안그래도 수면 중 핫플래쉬로 중간에 일어나 땀에 젖은 옷을 두어차례 갈아입다 보면 잠을 못자니 성질도 더 못되지고(?) 남편이 고생을 참 많이 하던 중이었다.
한방 치료를 받으며 갱년기의 노예가 될 것인가 주인이 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됐다. 오랫동안 운동과 함께해 온 나는 정형외과적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80프로 이상 한방치료에 비중을 뒀다. 침과 뜸은 언제나 좋은 과정과 결과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갱년기 무릎 통증 치료는 미국에 와서 처음 받아 본 한방 체험이었다. 각종 고급 한약재를 원장이 직접 정성스레 다린 약을 복용하며 정기적으로 침과 찜질로 치료 받으며 무릎 상태는 호전됐다. 하지만 또 언제든 다시 안좋아질 수도 있는 얘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다니는 성당이며 주변에 왜 이렇게 아픈 사람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지…더군다나 보험가입이 어렵거나 사각지대의 사람들…
그리고 주변에 언니들 몇몇은 얼굴과 목에 주름이 아주 없는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없어 보이는(?)신기한 얼굴과 목이기에 자세히 물어보니 발달 된 침술의 덕이었다. 나는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어 그 훼이셜 침술 마스터를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훼이셜 마스터와의 만남, 갱년기 무릎 치료의 여정, 그리고 크리스찬으로서 어떻게 살것인가, 이 세가지가 결심에 이르게 했다.- 한의사가 되어보자. 무엇 보다도 내 삶에 새로운 도전이라는 아젠다를 끌어들여 갱년기라는게 설 곳을 잃게 하고 싶은 마음도 매우 컸다.
배우 고현정과 김혜수도 오십이 넘었다. 사람들의 눈을 여전히 즐겁게 해준다. 결코 멈추지 않는 그들의 노력이다. 나는 그녀들 처럼 타고난 미모는 없어서 얼굴과 몸매로 사람들을 즐겁게는 못해준다. 그러나 내 나이 오십, 백살까지 산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남은 몇 십년, 내가 배운 한의학으로 나도 다른 사람도 삶이 즐거워질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지 않은가.
암튼 그렇게 올해 초 한의대 진학을 결심하면서 인생의 온도계는 천천히 달궈지기 시작했다. 블룸필드 한의대 가을학기 입학을 목표했기에 3월 봄 부터 버겐커뮤니티 칼리지 에서 ESL을 시작했다. 그동안 한인 커뮤니티 안에서만 살다보니 낮아진 영어 사용 빈도를 일단 끌어올려야 했고 두뇌에도 학문 습득을 위한 시동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6월 말에 ESL을 끝내자 마자 이번엔 생물학 수업(General Biology 1) 을 수강해야 했다. 내가 입학한 한의대의 경우, 나 같은 인문계 출신들은 선수학습 (prerequisite)으로서 생물학 수강이 필수이다. 세상에나… 뼛속까지 문과에 예체능인 내가 안그래도 중고시절 수학 다음으로 바닥을 헤맸던 과학 과목 중 생물을… 칼리지에서 계절학기로 그것도 영어로…그 순간 캄캄해졌다. 게다가 특히 여름학기 수업은 한달 동안 하루에 4-5시간 씩 아주 인텐시브하게 진행되서 정신 줄 놓는 순간 와르르이다.
좀 웃기지만 마누라가 한의대 갈거라고 남편이 이미 온 동네에 자랑스레 소문을 다 내서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버겐커뮤니티 칼리지에서 7월-8월 중순까지 월-금, 아침 8시 부터 낮 12시 까지 하루에 4시간 씩, 할머니 교수님은 숙제를 통해 외워질 수 밖에 없게끔 엄청난 양의 과제를 학생들에게 쏟아부었다.
그것도 80년대에나 했을 법한 레포트지에 손으로 직접 하나하나 다 쓰고 그림 그려서 제출 하는 방식이었다. 주말은 정말이지 숙제와 시험 공부로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한의대에서의 공부가 생물학 보다 더 쉬울거 같단 생각 마저 들었다.
그리고 영어가 문제였다. 교수님의 말이 너무나 빨랐다. 나중엔 이 또한 좀 귀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종강. 다행히 내 자식뻘, 조카뻘 되는 친구들이 실험실 수업에서는 기꺼이 도움을 주었고 교수님도 시험 때는 영한, 한영 사전(책. 전자사전 아님 ㅠㅠ) 을 이용을 허가해주었다. 그리고 교수님은 내가 틀린 것 중 배점이 높은 문제에 대해선 시험 다음 날 따로 불러 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느린 속도로 내게 주시곤 했다. 매리 교수님께 진심 감사하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들은 집에 와서 챗지피티와 상의해가며 요점 정리하고 한국의 고등학교 생명과학 유튜브를 보면서 해당 부분을 숙지한 다음, 교수님이 제공한 영어로 된 동영상을 다시 여러 번 시청하면서 간신히 수업을 따라갔다.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생물학 공부를 하는 도중에 한의대 입학 에세이도 써야했다. ‘기’에 관한 주제였다.
하아… 한번도 미국에서 입학용 에세이를 써 본적이 없으니 입학처 담당 교수님에게 이메일 해서 징징징… 정말 미국 교수님들 대단한게 학생에게 떠 먹여 주듯 서식 부터 기승전결 하나하나 알려주고 가볍게 쓸 수 있도록 내 개인 삶 속에서의 체험을 쓰도록 구체적인 예까지 조언해주는데 진심 새로운 경험이었다. 와아… 이래서 다들 미국에 와서 공부하려고 그렇게들 애를 쓰는거구나 싶었다. 그렇게 에세이도 교수님께 철판 깔고 매달려 간신히 완성해서 제출하니 세 번째에 딩동댕!
생물학 점수도 B를 맞았다. 그렇게 한 고개 한고개 넘어가고 있는데 한편 가장 중요한 대학 성적증명 평가가 완료가 되지 않아 입학 허가가 나지 않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대학 졸업자의 경우, 미국의 WES (World Eduation Service) 라는 평가기관에서 각 코스 마다의 학점을 검증해 최종 성적증명을 입학할 학교에 직접 전송하는데 그 평가 기간이 4-6주 이상이 걸린다.
미국 대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계획 중이라면 일단 WES에서의 성적증명 평가 부터 진행 시켜 놓고 입학할 학교 쇼핑을 하는게 현명함을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아무튼 이 또한 매일 같이 WES에 전화해서 상담원들을 재촉하고 또 재촉해서 결국 원서제출 마감일에 기적적으로 완료 및 전송이 이루어졌더랬다. 만약 이번 가을 학기 입학이 안된다면 이 모든 일을 내년에 다시 해야하나 싶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결국 입학허가를 받았다. 이쯤에서 나의 여름이 멋지게 불탔으면 좋으련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었다. 코비드 등 으로 4년 여 동안이나 계류 중이었던 영주권 인터뷰를 코 앞에 두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간은 요즘 강화된 이민 심사에 대해 기자적 시각으로 객관화 해서 바라보고자 했으나 막상 나의 인터뷰 날짜를 통보 받고 보니 멘탈이 바사삭 거리며 평정심이 요동으로 자극됐다. 노동허가, 소셜넘버. 리얼아이디 등 대부분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8월 마지막 금요일 아침, 결전을 치루러 가는 군인의 심정으로 남편과 함께 뉴왁 이민국 오피스에 갔고 ‘Mescia 메시아’ 라는 라스트 네임의 공군 베테랑 출신 심사관을 만나 결국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마무리 됐다. 이번 한의대 입학 허가서와 입학용으로 제출했던 우리 타운 펠팍 시장님과 버겐 교수님 등의 레퍼런스 레터가 그를 매우 고무했던 모양이다. 그는 특히 나의 군경력에 관심을 보이며 자신도 한국의 오산 비행장에서 복무했단다. 요즘 미 공군 예비군에도 한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까지 해줬다. 할렐루야!
30년전 D.M.Z.에서, 올 여름 생물학 수업시간에 흘린 피땀(?)이 이처럼 적절하게 빛을 발하면서 2-3주 안에 영주권 카드가 배송될거라는 공지와 함께 인터뷰는 화기애애 마무리 됐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바라본 쪽 빛 뉴저지 하늘은 이제야 내 하늘 같았다.
인생 날씨 최고기온을 경신한 오십번 째 여름이 30년전 사격장의 P.R.I.를 깨부수며 이렇게 지나갔다.
마침 창을 때리는 소나기 빗 방울 소리가 무릎에 피멍 든 스무살의 지영이, 노트북 앞에 다시 앉은 오십의 지영에게 보내는 박수소리 처럼 들리는 2025년 9월 초하루의 밤이다. 9/2 지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