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불이 아니라 숨처럼 – 성령의 진면목
기독교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되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성령이 아니라니 다행이다.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고심했던 부분이 여러차례 성령에 대한 부분 이었다고 말했다. 진정한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만난다는데 초기의 성조들은 어떻게 만났는지 서술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권일신 성조 등 초기의 인사들이 만난 당시의 성령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떻게 만났는지 따져 보는 일은 녹녹치 않은 작업이다. 권 성조 등이 사회 변혁의 원리 혹은 도구로서 천주학을 받아 들였음은 여러 정황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사회 개혁, 변혁의 원리나 도구로서 시작했지만 빠져 들다 보니 신앙으로 발전했고 끝내는 목숨을 건 종교적 희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 빠져 드는 지점이 바로 성령, 성신 일 수 밖에 없다. 기독교가 지닌 불가항력의 힘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 소설이 아니다. 여러차례 언급 했듯이 천주교로 시작된 기독교가 이 땅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그 앞날은 어떤 것일까 따져 보는 것을 일차의 목적으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강렬하게 다가서는 의문이 초기 뿐 아니라 계속된 박해에서 순교자들이 어떻게 모두들 자신의 목숨을 초개 같이 던졌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 부분이 제대로 설득력 있게 설명되지 않으면 이 소설의 가치는 반분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정말 오묘한 존재다. 한없이 나약하고 비겁 하지만 때론 평소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용기를 발휘 하기도 한다. 기독교 인들의 경우에는 그 순간 성령의 임재가 있었기에 그런 용기가 나왔다고 말한다. 그 용기 발현의 긍국이 기독교 인들, 특히 천주교인들 에게는 순교다.
그런데 오대성조들의 경우 모두 천주 교회의 사령탑인 바티칸으로 부터 순교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명례방 사건의 김범우에 이어 진산 사건의 윤지충 권상연 두 사 람 등 그 시절 방계 인물들은 순교로 인정받고 있음에도 정작 다섯 명 성조들은 모두 배교의 전력이 있다는 것이 바티칸의 판단이다.
바티칸에서는 이벽 성조 또한 부친의 강요에 못이겨 배교 하겠다고 서약 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권일신 성조에 대해 순교 판정을 유보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회오문이라 부르는 배교문에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녹암 권철신 선생도 감옥에서 배교의 뜻을 토했다는 것이 바티칸 조사관의 생각이란다.
그때 직암 선생과 함께 있던 성령은 어떤 반응을 보였고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처음에는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따져 볼수록 중요한 문제 였다. 일단 결론은 역시 성령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허락하고 북돗는 다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직암 권일신 선생이 느꼈던 성령은 내가 요즘 느끼는 성령이라고 결론 지웠다. 불꽃과 불길 같은 격정과 흥분의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차분히 다가서는 온화한 보혜사라고 여기고 있다는 얘기다.
당시 초기 성조들은 성령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 하지 않았을 뿐 더러 굳이 이 문제를 특히 외부로는 떠벌이지 않았다.
자칫 천주학이 황당무계한 미신으로 폄훼 되고 비하 될까 저어했던 것이다. 유교적 우주론에 젖어있었던 당시의 유자 들이 대개 그랬다. 유자들은 이치를 띠지곤 했다. 자신들이 습득한 유학의 논리에 따라 그 이치에 맞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사단시 했다.
유학은 태극이나 음양이니 또 주리론 주기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인간사의 원리를 따질 때도 장황한 논리와 현학적 수사를 동원했다. 곰곰히 따져 보면 이 또한 입증하고 재현 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당시의 이런 상황을 감안해 보면 초기 성조들의 성령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추론 할 수 있게 된다.
이벽은 블길 같은 성령을 만났고 권일신과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상대적으로 차분한 보혜사 성령을 만났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개되는 상황이 그렇다. 이승훈의 경우는 자신이 증언하는 대로 연경 북 성당에서 꽤 강렬한 성령을 만났던듯 싶다. 어느 글에서 승훈의 그때 예수의 손가락에 못이 박히는 환시를 보았다고 했다.
최인길 최창현 숙질은 조선땅 한양에서 (운 좋게도?) 초기에 상대적으로 불길 같은 성령을 만났던 듯 싶다. 그들의 활약이 이를 증빙한다. 조동섬 선생의 경우는 이 무렵 성신 성령을 그리 따지지 않았던 듯 싶다. 조동섬 선생은 후일 정하상을 지도 하면서 인간 안에 있는 양심이 바로 성령의 재현이라고 말했고 이는 하상의 신앙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존창, 유항검, 홍낙민 등 초기 임시 사제단 성원들의 경우는 대개 권일신 성조와 비슷했고 젊은 축인 이총억과 윤유일이 남달리 성령에 민감했고 강한 신심을 지녔다고 생각된다. 정약종의 경우는 초기에 냉담했다가 불길처럼 끓어 오르는 성령을 홀연 만난 것으로 여겨 진다.
천주 성령이 내 밖에서 나를 관찰하고 평가 하는 것과 내 안에 거하면서 매사를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디.
내 안에 거하고 있는 성령 차분한 성령, 양심 마저도 성령으로 인정 한다는 자신감. 처음에는 그 자신감 만으로도 희열이 넘쳤었을 성 싶다. 학문이 깊을 수록 그런 경향이 강했다. 후일 따져 보면 교만이었다. 천주의 성령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믿음도 자신 안의 이성이 허락하는 인정하는 범위안에서 이루어 진다면 한계가 지워질 수 밖에 없다.
이존창의 손자가 한 말이 매우 유효하다. 여사울 동리의 한 촌로가 천주 강생이며 부활 그리고 성령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이렇게 답했단다.
“ 말도 안되는 것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지요”
이 손자가 후일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의 장정을 떠난 세 소년 중 하나다.
부지불식간에 필자도 사용했는데 운(運)이라는 말이 있다. 운수 (運數)의 줄인 말이라고 하는데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의 좋고 나쁨. 곧,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천운(天運)과 기수(氣數)를 뜻한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운이 있다는 말은 믿는다. 아무리 냉철하고 이지적인 사람이라도 그렇다. 이세상 모든 것이 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콩 심은데 콩 나듯 원인과 결과로만 이루어 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인간 생명 자체가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이성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했다 해도 우리 인간은 광활한 우주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작게는 인간 내부의 기관과 세포며 생명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찾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그랬듯이 권일신 성조도 어느 순간부터 ‘인생이란 무엇일까’ 가 아니라 내 인생에 나는 어떤 의미를 부여 해야 하는가를 생각 했었을 게다. 그리고는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대 실천가 예수를 제대로 만나고 부터 였다고 여겨진다. 이 만남이 그의 운 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천주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즉 우리 인간은 타고난 이성의 빛을 통해 자신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나를 만드신 천주가 계신다는 것’을, 곧 ‘인간을 넘어서는 하느님이 참으로 계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은 어떠 어떠한 분이시다’ 라는 식으로 천주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만물은 어떻게 있는 것인가?’를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생각해 봤을 때,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런 최초의 원인이 되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정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늘로 부터의 계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천주교회의 입장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스스로 드러내시는 것이 계시인데, 이 계시의 빛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성령론이 출발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그나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과 악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이며,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대화할 수 있는 상대라는 얘기다.
우리 신앙은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하기는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으로부터 영광이나 감사와 같은 그 무엇을 받으시길 원하셨기에 우리 인간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오직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쳐나는 사랑으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사랑이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 주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분은 수많은 생물 가운데 유독 인간에게만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리하여 우리 인간을 하느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상대로 삼으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원래의 목적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인 것이고, 또한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모자라서 우리가 그 영광에 무엇을 더 보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그러한 삶이 참으로 완전하신 하느님께 영광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인간이지만,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아니었던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 당신의 은혜로 돌보시니,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행복한 삶이고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삶인 것이다. 권일신은 이대목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의 실천을 온몸으로 체감 체득했고 그를 따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찾는 열망이 숨어져 있다. 인간 안에 그렇게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새겨져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원래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란다. 이성과 양심이야 말로 최고의 선물 아닌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창조하신대로 버려두시지 않고 계속해서 이끄신다는 것은 기독 신앙의 골자다. 인간을 끊임없이 돌보시는 분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갈망들 까지도 하나하나 손수 이끌어 주는 분 이시란다.
그런데 우리 인간 안에 있는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갈망’, ‘행복에 대한 갈망’, 이러한 것들은 천주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친히 알려 주는 존재가 바로 천주다. 우리 인간은 그런 갈망들을 천주 안에서 만 찾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사실 인간 이성과 양심이 얼마나 알량한 것인가.
권일신도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한다는 자신과 도반들의 갈망이 하늘의 뜻에 부합 하는지 계속 천주께 의문을 던졌음직 하다. 그때 천주는 어떤 대답을 했던가.
필자의 절친인 서울의 개혁적인 개신교 목사와 어제 장시간 통화를 했다. 신부님 몇 분과 함께 이 글의 멘토다. 그와 나눈 이야기의 골자를 요약해 본다.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얘기였다. 250년 전 권일신 성조가 동료 임시 사제들에게 들려 주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려 오는듯 했다. 하느님은 대체 어떤 나라를 원하시는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는 무슨 말일까.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인가. 하느님이 당신 뜻을 인간 곁에서 펼쳐보시라는 부탁인가.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의로움(dikaiosyne)을 끼워 넣었다.
또한 중요한 구절은 겟세마니 언덕에서 체포 직전 예수의 기도인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42)이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대로 되길 빌지만 동시에 하느님 뜻에 적극적으로 따르겠다는 다짐이다. 하느님께 간청하는 기도인 동시에 인간의 노력과 애씀을 다짐하는 선언이자 기도라고 하겠다.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라는 구절은 ‘땅에서도’를 더 의식하는 말이다. 하늘은 하느님을, 땅은 인간 세상을 가리키는 비유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중요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첫째, 땅의 기준이 하늘이다. 땅의 기준은 땅이 아니다. 둘째, 땅에서 아직 하느님 뜻이 존중되지 않았다. 땅의 잘못된 질서를 바꾸어야 한다. 셋째, 예수는 땅에 나타난 하늘이다.
땅이 땅의 기준이라면 겨우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인간의 최대 기준이 되겠다. 유학과 불교가 혹은 자본주의나 맑시즘이 인간을 구출할 수 있을까.
인간이 천사 같지만 또한 악마 같기도 하다는 체험은 상식이 되었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느님 없는 인간 세계는 외롭고 무기력하다.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이다.
자연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생각도 그리스도교와 거리가 멀다. 자연은 인간을 책임지지 못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책임진다. 이는 창조사상의 핵심이다. 자연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무한책임을 느끼고 있다. 선택된 하느님의 대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직 땅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쓰이는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기에,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반대되는 것이 활약한다’는 현실이 더 큰 문제다.
교회가 아직 하느님의 뜻을 완전히 실천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에 하느님 나라와 반대되는 것이 날뛰는 현실이 더 큰 문제다. 그리스도교의 잘못에 대한 반항으로 생긴 무신론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팔아먹는 우상숭배가 더 큰 문제다.
잘못된 세상 질서를 알아내고 그 행태를 파악하며 고쳐나가는 책임이 그리스도교에 주어졌다. 하느님은 행동하는 그리스도교를 요구하신다. 그러려면 우선 인간 안에 자리 잡은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로마 2,16).
하느님의 뜻은 예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내 음식이다”(요한 4,34). 예수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기 위해”(시편 40,7-9; 히브 10,7) 세상에 오셨다.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마태 26,39) 예수는 살았다.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 뜻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예수를 ‘하늘’이라고 표현했다.
‘앎이 상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 앎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이미 신학에서 정착되었다.
현재 그리스도교의 몰골로는 감히 세상을 꾸짖을 면목도, 자신도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에 별로 공헌하지 못한 그리스도교의 부끄러움은 여전히 크다. 그리스도교는 우선 자신의 역사부터 반성해야 한다. 그리스도교가 세상 개혁에 공헌하지는 못할망정 세상 개혁을 가로막으면 되겠는가. 그리스도교를 주로 개인윤리 차원으로 해설하는 설교가 넘친다. 아직 그런 설교자들은 신학적으로 철이 덜 들었다는 증거다.
산이 이미 존재하기에 비로소 산에 오른다. 내가 산에 다가서기 이전에 산은 이미 내게 다가온다. 마치 하느님이 없는 듯 최선을 다하고, 그러나 하느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다.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 나 있이 나를 구원하신다. 나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지만, 나 없는 세상을 하느님은 통곡하신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지만 바로 나를 직접 창조하셨다.
인간의 자립과 하느님에 대한 의지는 반비례가 아니라 정비례 관계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나야 인간의 자립을 얻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할수록 인간은 더 자립적이 된다. 피부 밖으로도 탈출하지 못하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 밖으로 탈출할 수 있을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