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 성신(聖神) 성령(聖靈) 그리고 보혜사 (保惠師)-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보혜사라는 말을 잘 모르고 있었다. 특히 천주교인들이 그랬다. 알고 보니 근자의 천주교 공식 성경인 천주교 주교회의 간행 성서에는 보혜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 보호자라는 말로 나왔다.
개신교 공식 성경인 공동 번역본에는 보혜사라는 단어가 여러번 등장한다. 비교해 보자.
앞서 소개한 대로 요한복음에 본격 등장 하는데 개신교 성경에는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라고 명확히 나와있고 이어지는 17절에는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안에 계시겠음이라” 고 보혜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반면 천주교 성서, 요한 복음서의 같은 장 같은 절에는 “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천주교 주석 성경에 보면 그 구절에 나오는 보호자의 의미를 부연해서 알려주면서 그렇게 번역된 이유 까지 설명하고 있지만 애써 보혜사라는 단어를 기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보호자’에 해당하는 그리스 말 파라클레토스는 본디 사법 용어로서, 고소나 고발을 당한 이를 돕고 변호해 주도록 부름을 받는 이를 가리킨다. 그래서 일차적인 뜻은 ‘변호자, 협조자, 보호자’이다. 여기에서부터 이차적으로 ‘위로자, 중개자, 중재자’의 뜻도 나온다.
신약 성경에서는 요한계 문헌에만 나오는 이 표현이 때로는 성령을, 때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과거에 이 용어를 우리는 흔히 “협조자”라고 옮겼었는데, 우리말에서 “협조자”는 부차적이고 부수적이라는 의미, 곧 없어도 본질적인 결과가 바뀌지 않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풍긴다. 또한 우리말에서는 나보다 높은 사람을 나의 ‘협조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성자나 성령을 그렇게 부름은 매우 불경스럽게 들릴 수 있다. 또 이 용어를 본디의 의미에 따라 “변호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이 의미는 요한 복음서의 문맥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성령께서 더욱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일을 하신다. 제자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곧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모든 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을 이끌어 주신다. 제자들은 성령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 하며 그들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제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연유로 서양 말에서건 우리말에서건 어떠한 번역도 요한 복음서 저자가 파라클레토스라는 용어로 의도한 뜻을 다 담아내기는 어렵다. 우리말에서는 “보호자”가 그중 낫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말한대로 보혜사가 웃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에 전해진 초기 교덕서들도 보혜사라고 번역을 했다. 열심히 찾아보니 신부님들 가운데도 보혜사를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지는 주장을 편 분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한가지 유쾌하지 못한, 어쩌면 경게 해야 할 일이 있다. 보혜사를 개개인 마다에 강림하는 친근한 성령이 아니라 아예 의인화 해서 예수와 같이 육체로 활동하는, 역사하는 실존적인 인물, 바로 인간 이라는 나가도 너무 나간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정통교회가 아닌, 교주를 신격화하는 이른바 개신교 이단 단체들에서 자주 써먹는 레퍼토리란다.
이들에 의하면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과 그 뒤 다시 온 보혜사는 다르다는 것이다. 저들의 주장이다.
“오순절에 강림한 성령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성령이며,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성령이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신을 입고 온 성령이다. 보혜사 성령은 사람이며, 보혜사 성령은 재림예수다”
신천지며 장막교회 구원파 등 오순절 파에서 갈라져 나온 이른바 이단 교회에서 자신들의 우두머리 소위 교주를 보혜사 재림예수라고 한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얘기다. 이런 이유로 천주교에서 보혜사라는 말을 기피하는 지는 모르겠다고 한다면 견강부회 일까. 악마 같은 적국에서 왕의 딸을 공주라 부른다고 우리는 공주라는 말을 버려야 할까?
이번 기회로 나는 보혜사 성령이 이 소설과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란한 불길의 성령이 아닌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다가서는 보혜사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에 들어와 있는 보혜사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도 없고 새로울 것도 별로 없는 이소설을 왜 힘들여 연재 하냐고 물어 오는데 그 출발 부터 곰곰히 다져 보면 보혜사 말고 따로 설명할 길이 없다.
말한대로 예전에는 성령이라고 하면 아주 멀게 느꼈다. 대단한 일, 보통 사람은 체험할 수 없는 특이하고 엄청난 경험이라야 성령 체험인 줄 알았다.
하지만 크고 화려한 꽃도 있고 아주 작은 풀꽃도 있으며, 태풍이 지나는가 하면 산들바람도 불지 않는가, 성령께서도 사람을 감동시켜 쓰러뜨릴 만큼 격렬하게 나타나기도 하시지만 잔잔한 일상에서 슬쩍 스치기도 하실 것이다.
그러니 그분의 거룩하신 영이 지금도 존재하심은 분명하고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겠다. 어차피 생명의 신비는 우리를 천주앞에 무릎 꿇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하늘로 다시 돌아가셨지만, 주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홀로 버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욱더 놀라운 영적 체험과 주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보혜사 성령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우리가 시편기자의 고백을 이해할수 있을까?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예수야 말로 우리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과 자유 그리고 평화와 평등을 가르치면서 자기희생의 표본을 보여준 최고의 인간, 사람의 아들 아닌가.
개신교 성경 어떤 번역본 에는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대목이 나온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요 16:7).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약속이다. 예수 당신 보다 보혜사가 더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겸양의 선언이기도 하다. 아무튼 성령에 대한 약속은 가톨릭을 포함하는 기독교가 평화와 자유 평등을 말하는 예수 운동의 단체가 아닌 신앙의 종교로 서게 하는 큰 요소인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선물 가운데서 가장 크고 좋은 선물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는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개개인이 인정하든 안하든 보혜사 성령과 함게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됐던 것이다.
인생의 고비를 돌아보면 그 자국에는 내 발자국이 아닌 다른 발자국이 함께 찍혀 있다고 하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천주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얘기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 14:19,20).
천주교에서도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또 “사제의 성령을 위해” 라고 미사 때마다 인사하는 것은 그만큼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우리들 서로 간에 그분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뜻일 것이다. 문득 천주교의 최고 보혜사는 성모 마리아님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부님들이 들으면 혀를 차겠지만…
성령을 받은 증거는 더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마치 세상을 초월한 듯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마치 세상을 초월한 듯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살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되거나 특정한 은사들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에 보면 문을 단단히 잠그고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옆구리와 손을 보여 주며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이 나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아라’ 하셨다(요 20:22).
이 장면을 놓고 유명 개신교 에반젤리스트는 이렇게 강연했다. 미국인 목사다. 성령을 강조하는 부흥 목사 임에도 너무도 합리적이면서 울림이 있기에 요약 임에도 조금 길지만 이를 인용한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이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고, 말씀들을 기억하고 붙들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고난과 환난 중에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은혜를 기억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 성령 체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성령 체험과 자연적인 성령 체험입니다. 초자연적 성령 체험은 우리가 흔히 보는 방언, 통변, 치유, 귀신 쫓는 등의 은사 체험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이 성령 체험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성령 체험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정의(知情意) 영역에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지정의(知情意)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지식(知), 감정(情), 의지(意)를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Cognition, Emotion, and Conation (or will) 이다) 지식은 인지, 인식, 분별, 이해, 성찰 등과 관련되며, 감정은 희로애락, 애증, 공포, 기쁨 등 다양한 감정 상태를 의미합니다. 의지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나 결단을 뜻합니다.”
“지(知)적인 성령 체험의 예를 들자면,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분석 끝에 범죄자로 몰려 십자가에 처형당한 청년 목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졸립게만 느껴지던 성경이 이해되고, 믿어지는 것도 성령 체험입니다.”
“정(情)적인 성령 체험의 예는, 염려와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느낌을 맛본다든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잘되리라는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만이 맛보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의(意)지적인 성령 체험의 예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사역의 열매도 없는데, 주님께 받은 사역이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런 끈기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 인간의 의지력과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초자연적이건 자연적이건, 이런 체험을 주신 이유는 성령님의 실체를 경험하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제자가 되고, 복음 전파에 매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영적 체험이든지, 예수를 닮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욕구와 노력이 따르지 않으면, 그 체험이 진정한 성령 체험인지 의심해 보아야 한단다. 하지만 성령은 천주와 예수가 우리를 찾는 기독교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 지적(知的)인 만족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끝없이, “새로운 말씀”만을 찾아 헤맨다. 감정(感情)에만 호소하는 집회가 있다. 부흥회와, 찬양집회가 이렇게 될 소지가 있다. 사람들은 감동과 눈물을 흘리게 되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풍선 같을 수도 있다. 바람이 빠지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허탈 밖에는 없다. “순종”만 강조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또 다른 율법이 되어 성도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할 수 가 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