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모집의 길, 간난한 순명의 길 ”
장렬하다는 표현은 앞으로 재건 될 교단조직을 일부러 들어 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비밀리에 숨죽여 가면서 음모집단 처럼 활동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직암의 말을 받아 승훈이 결론 처럼 사용한 표현이었다.
“그렇습니다.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업신여김을 받더라도 주눅들어 움츠러 들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 합니다. 손가락질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맙시다. 설사 손 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이 때문에 그 손가락질은 반드시 찬탄과 존경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장렬하게 손가락질을 받읍시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고 동섬이 한마디 보탰다. 매우 적적절한 보탬이었다.
“장렬하게 손가락질을 받자, 멋진 표현이군. 그런데 자네들 논어의 첫 부분 학이편 구절 중에 어떤 부분이 가장 마음에 남는가”
자네들이라고 했지만 눈길은 좌석의 막내인 인길에게 가 있었다.
“학이편 에서는 단연 부지불온이죠”
인길이 즉각 대답했다.
“그렇지? 나도 그렇다네.”
동섬이 반갑게 대응했다.
부지불온 (不知不慍) 몰라 줘도 성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 첫머리, 정확히 말하면 논어 첫 장인 학이편의 세번째 구절 ‘인부지이 불온 불역 군자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성내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의 대목이다.
그렇다 이 구절이야 말로 백미에 속한다. 일신도 그랬고 승훈도 그랬다. 이 대목 때문에 공부를 계속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과거의 길조차 막혀 있었던 남인들의 경우에 특히 그랬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내안에는 진리가 가득 들어 있다는 자신감의 선언이자 외침이기 때문이다.
동섬은 천주학을 말하는 이순간 유학의 가르침으로 이 자신감과 자부심을 원용하고 있었다.
“내가 경원하는 군자라는 말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소시적에 가슴에 품고 학문에 그나마 몰두 할 수 있었던 자신감의 근원인 이 말이 지금 우리에게 다시 던져주는 의미는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모두들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
“다소 비약이 게재 되는 것 같기는 하네만 진리는 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네, 아침에 득도 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성현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던 우리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진리, 새로운 도를 펼쳐가는 일은 누가 알아 주지 얺아도 설혹 손가락 질 받는다 하더라도 계속 해야할 과업이자 사명으로 여기자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네, 그런 점 에서 우리는 게속 보유론적 입장에서 천주의 일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고 여겨지네, 우리만이 옳다는 과격한 극단론, 명쾌한 이분법은 보기에는 시원해 보이지만 실익이 없는 법일세, 직암도 그랬고 만천도 그랬고 약용과 총업도 만나 봤는데 다들 그런 생각 이었네, 이제 창현과 인길 자네들 까지 기세 했으니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는 뜻에 이 얘기를 덧붙혔다네, 해량들 하시게나”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천주학을 보유론적인 관점에서 추구 하고 있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 마다 강조 해야 할 것입니다. 설사 내부에서는 다른 외침과 소리가 있더라도 말입니다.”
“일부러 라도 그래야 합니다.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요.”
“그렇습니다. 중국에서 이마두 선생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자면 국법을 준수 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일이 우선일듯 싶습니다. 이마두 선생이나 남회인 선생 같은 분들도 낯설고 물설은 명과 청의 법규를 그리 잘알고 계셨고 그대로 따르지 않았습니까?”
“공연히 책 잡히면 안되지요. 빌미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유학에서 말하는 군자가 되려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알아 줄것을 바라고 위해 천주를 알리려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천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길이 바르게 사는 법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우리 가슴이 알고 있습니다. ”
승훈의 말에 이어 직암이 결론을 내야 했다.
“ 우리는 두 갈래로 우리의 전교사업을 진행하려 합니다. 위로 향한 전교와 아래로 향한 전교 입니다. 위로 향한 전교는 조정 신료를 비롯해 여론을 주도하는 각당파의 중심 인물과 나아가서는 주상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들을 천주의 가르침을 알려 귀의 시킬 수 있다면 졸겠지만 이는 요원한 일일테고 최소한 그들이 우리를 배척하고 탄압하지 않을 수준으로 묶어두려는 것입니다. “
“대단 합니다. 숙사”
“그래서 동섬 형님이 언급 하셨듯이 총억과 귀농이 같은 젊은 준재 들을 애써 끌어 들였다오. 저들이야 말로 옥당에 들 인재들 아니오?”
“잘하셨습니다. 저희들은 중인과 양인들에게 작극 다가서기로 하겠습니다.”
인길과 창현은 하나를 말하면 두셋 을 알아 들었다.
직암은 이존창이 적극 나서기로 했고 정약전과도 이야기가 됐으며 유항검과 홍낙민을 찾을 예정이라고 일렀다.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면서 자연스레 임시 탁덕, 자체 신부가 왜 필요하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정 하는 일이 중요 하는 의견이 대두 됐다.
탁덕의 필요는 교회가 성직자 없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사와 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의 신앙을 체계화 하고 종국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미사와 성사는 성직자만이 거행할 수 있었다. 때문에, 임시로 자체 성직자단을 구성하여 미사와 성사를 거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날밤 직암이 희랍의 대철학자 柏拉圖 (백라투)의 토론장을 빗대 ‘향연’이라 이름한 초동 최창현 집에서의 밤늦은 회합은 승훈의 주도로 진행됐다. 이날 조선 천주교 공동체의 매우 중요한 전범들의 기초와 대강이 정해질 수 있었졋다면 그 수훈갑은 이승훈 베드로 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북경에서 제대로 된 신자 교육을 받고 정식 세례를 받은 신자는 역시 달라도 뭐가 달랐다. 이승훈 베드로는 북경에서 주교(主敎), 신부(神父), 그 밑의 부제들로 된 가톨릭의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실지로 적용되는 것을 목격했고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북경의 남당과 북당 두곳의 성당에서 여러차례 미사성제(聖祭)에도 참여했고, 성사(聖事)가 거행되는 것도 보았었다.그리고 천주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식인 고백성사, 고해성사도 했더랬다.
그는 그날 저녁 자신의 모든 기억을 되살렸고, 전례의 대강을 다시 추스렸다. 그러면서 탁덕의 일이 어떤 것이 있는가에 대한 논의에도 사려 깊은 의견을 내 놓아 대강의 결론을 이끌었다.
탁덕의 필요는 교회가 성직자 없이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사와 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이 천주에게 다가가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미사와 성사는 성직자만이 거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성직자단을 구성하여 미사와 성사를 거행해야 했던 것이다.
탁덕의 첫번째 일은 사람들에게 천주학의 교리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 이었다. 그러자니 당연히 교학에 대한 소양이 필요 했다.탁덕 대상자들은 직암과 만천이 선별 했다고는 하지만 그 교학의 이해 정도와 깊이는 서로 달랐다. 어찌보면 천차만별 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했다. 특히 신심이라 부르는 신앙심 측면에서는 더 편차가 컸다. 때문에 통일 되고 철저한 준비 교육과 집합 토론과 수양이 필요 하다는것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당시 경전인 성서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은 것은 답답한 노릇 이었고 커다란 불만이엇다.
하지만 궁즉통이라고 시과경(時課經, 성무일도), 성격광익등 교덕서에 나오는 경전의 부분들을 다 취합해서 재구성 하기로 했다. 그 일을 창현이 맡기로 했다. 그가 신명이 나서 해오던 일이기도 했다.
두번째 신부의 일은 전례, 첨례를 집전하는 일이었다. 명례방의 예가 있었지만 그때는 첨례라고 할 수 없었다. 명례방 공동체 시절, 그때는 광암 이벽이 주도적으로 나선 근엄한 강학회 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광암의 뜻대로 진행 됐었다. 다른 이들은 그냥 그의 뜻에 따르기만 했을 뿐이었다. 승훈은 그때도 형식을 갖추자고 건의 했지만 광암은 아직은 시기 상조 라면서 천주학 강의에 열을 올렸었다. 다만 강의를 시작 하기 전에 야소상과 마리아 상에 절을 올리고 한자로된 기도문 사도신조를 외우는 것이 첨례의 전부였다.
사실 그 무폅 명례방 모임은 자칫 광암의 독선과 전횡으로 흐르는 것이아닌가 하는 우려가 스물스물 피어 나고 있었다. 특히 승훈과 약종의 불만이 컸다.
승훈은 연경의 성당에 들었을 때의 포근함과 안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다고 했다.
“성당에 처음 들었을 때, 십자가 아래 섰을 때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함에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 명레방의 분위기는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숙사 어찌하면 좋습니까?”
당시 승훈이 직암에게 은밀히 털어놓은 하소연 이었다.
약종은 광암의 강론이 너무 신비주의와 율법 준수 강조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 불만이라고 했다.
“조금만 잘못하면 사단의 유혹에 빠졌다고 호통 치시는 통에 정신을 못차리겠습니다. 혹시 광암 형님, 자기 마음에 안들면 사단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숙사”
일신은 젊은 이들의 불만을 들을 때 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고 그들을 달랬고 우정 광암의 권위를 존중하고 따르는 모양새를 취했던 것이다.
실은 그 무렵 동섬도 몇번 명례방 모임에 왔었지만 이내 발길을 거뒀다. 직암에게도 특별한 말은 안했지만 직암도 그가 왜 그러는지 알것 같아 더 강요 하지는 않았었다. (계속)
< 위 사진 양근 오밋다리 성지의 로사리오 정원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