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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24)

안동일 작

“탁덕(鐸德) 모집의 길,  간난한 순명의 길 ”

최인길은 북촌 계동에 살았고 최창현은 명례방과 청계천을 잇는 입정동에 살았다. 두 사람은 같은 역관 집안의 김범우(金範禹)를 어려서 부터 친형 이상으로 따랐고 범우도 이들의 재주를 자랑스러워 했다.  인길이 범우의 안내로 광암을 먼저 만났고 주어사와 천진암 강학에도 먼저 몇 차례 참석 했었다.
하지만 당시 까지의 완고한 신분 질서는 중인(中人)  이었던 두사 람, 후에 인길의 손위 조카인 관천 최창현까지 포함해 초기 천주교단의 세 중인 주역들에게 적잖은 마음고생을 하게 했다. 원칙도 없고 일리도 없는 신분 질서, 반상의 법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직암 권일신은 이들 중인 세사람에게 적지 않은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직암이 인길을 처음 만난 것은 80년 겨울 천진암에서 였다.
승훈이 연경에서 세례를 받기 전 이었다. 간헐적으로 강학이 열리던 때 였다.
광암 이벽이 매우 영민하고 성실한 젊은 역관들이라며 범우와 인길 두 사람을 강학 일동에게 소개를 했고 모두들 반가이 맞았으나 김원성이 문제 였다.
두사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반상의 법도가 엄연한데 중인이 어찌 유학 강학에 참여 할 수 있냐는 생각인 모양 이었다. 이러니 세사람역관 중인들은 좌불안석 공연히 몸둘바를 몰라 했고 다음번 강학엔 참석치 않았다.
그런데 김원성은  이존창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신분으로 말하면 존창이야 말로 노비에서 면천된 이의 아들이었다. 존창은 이병규와 홍유한이 추천한 이였기에 한풀 접어준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듯 중인은 오히려 양민 보다 더 양반들의 경게와 질시를 받았다.  실제 나라의 중요한  일은 저들이 다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그래서 중인 세 사람은 천진암 주어사 강학 에서 보다는  이벽에게 따로 천주학 과외를 받았던듯 싶다.

중인은 양천제 분류로는 양인이지만 지배층도 아니고 피지배층도 아닌 중간의 특수계층 이었다.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양천제였으므로 중인은 공식적인 신분은 아니었음에도 실제 사회적 대우로 구별된 계층이었다.
양반에 비해 여러 차별 대우를 받았지만 전문기술자로서 실무를 담당했고, 그 중 잡과 합격자들은 일단 관료로 대접은 받았기에 일정의 권리를 누렸고 수완을 발휘하는 자들은 양반 이상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이 점이 양반들에게 못마땅 했던 모양이다.

전반적으로는 일반 상민과 달리 양반처럼 한문으로 이름을 짓고 성씨와 관향이 있으며 족보도 가지고 있지만 대과 응시를 할 수 없었다. 이는 정도전이 조선의 건국을 주도 하면서 고려 말의 폐단을 야기했던 부원세력, 향리세력, 상인세력 억누르기 위해 취한 일시적인 조치가 관례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도전 본인도 향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는 어떤 점에서는 사다리 걷어차기였다.공식적으로 과거는 천민과 서얼만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과에 급제하려면 4대조 안에서 급제자가 있어야 했고 아니면 향교나 서원의 추천서인 보단재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비리와 날조가 횡행 했다.

경외(京外) 문무관청에서 실무를 보는 하급 관리 및 서얼도 광범한 의미에서 중인 신분으로 간주할 수 있는바, 이 가운데  역관(譯官)과 의관(醫官)은 꽤 어려운 시험(잡과)를 통해 선발 되기에 중인 가운데 지체가 높은 편이었다.
중인들은 지방  관아나 중안 부처 문무 고관에 예종(隸從)되어 실무를 담당했기에 실제적인 이득을 취하고 그 나름의  행세를 할 수도 있었다.  역관이나 관상감원 등이 명에 파견되는 사신을 수행하여 무역의 이(利)를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예이며, 또한 지방의 향리가 토착적인 세력을 이용하여 수령을 조종·농간하거나 전권(專權)·작폐(作弊)하는 일도 많았던 것이다.

사실 중인이 없으면 나라 일이 돌아가지 않았다. 역관, 의관을 비롯해 , 향리(鄕吏), 서리(胥吏, 흔히 아전), 서제(書題), 군교(軍校, 군무를 보는 관리), 역리(驛吏, 역관), 계사(計士; 회계 관리), 음양관(陰陽官) 및 추길관(諏吉官, 길일을 가리는 관리), 화원(畫員, 도화서의 잡직. 화가), 사자관(寫字官, 문서를 정서하는 관리) 등의 하급관리, 관상감원(觀象監員), 검률(檢律) 등의 기술관을 이들이 맡았다.

중인들은 관례적으로 이 직들을 세습하면서 하나의 신분 계층을 이루었다.  하지만 모든 공은 상전인 양반에게 돌아가곤 했다.  이렇듯 양반들은 생산노동은 노비와 양민 소작인에게 맡기고 복잡하고 민심을 잃기 쉬운 대민업무는 중인에게 일임한 채, 자신들은 시부(詩賦)를 즐기며 군자연 했던 것이다.
양천제가 사실상 반상제로 바뀌면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이 짙어지던 때에도 양반들은 법적으로는 대과 응시가 가능한 상민보다 그나마 족보도 있고 돈도 많은 중인들을 더 경계하고 멸시했다.   잡과에 급제해도  승진 품계에 한계가 명확했기에(한품서용)  사대부로 대접 받지 못했던 것이다.  사농공상 그 신분질서가 뭐라고 잡직은 가문의 수치인  천직이었다.   양반이 가세가 기울어 잡직으로 진출하면 양반자격이 박탈될 정도였다. 초기 성조 가운데 윤유일이 그랬다.  후일의 일이지만 중인천대의  단적인 예로, 의주 만상 도방 임상옥이 지방 사또에 제수되어 근무 하던 중에 사저를 좀 크게 지었는데, 암행어사가 이걸 보고 감히 양반도 아니면서 집을 크게 지어 양반을 우롱한 죄로 봉고파직을 해버릴 정도였다.

아무튼 만연했던 이같은 차별의 눈길 때문이었는지 역관 출신 세 사람은  후일 명레방, 김범우의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부터 열성적으로 참석했다.

관가의 일을 중인들이 다하듯  김범우 최인길 최창현, 초가 성도 중인 그룹이  초기 천주교단에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김범우는 일찍 희생 됐기에 이에 해당하지 않지만  자신의 너른 집을 제공한 큰 공이 있었다.  특히 인길 창현 저들 최씨 두 사람이 없었으면 조선 천주교가 직암 권일신이 세상을 떠난 신해년 1792년 이후 절멸 했을 수도 있었다.

최인길은 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때도 김범우와 함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자진해서 혹독한 장형(杖刑)을 받았을 만큼 초기부터 열성을 보였다.
그 뒤 1791년 윤지충 권상연 권일신 세사람이 희생된 신해교난(辛亥敎難) 때도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겠다고 하고는 풀려났다. 그러나 석방되자마자 교회로 돌아와 윤유일(尹有一)·지황(池璜)  등과 함께 탁덕 영입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1795년 1월, 중국인 탁덕 주문모(周文謨)신부를 우여곡절 끝에 조선에 입국시킬 수가 있었다.

전에 언급한 대로 서울에 잠입한 주문모 신부는 서울 북촌(北村) 계동에 있는 그의 집에 은거해 포교활동을 시작했고 역사적인 첫 정식 미사가 이루어진 곳도 그의 집이었다.   중국 신부의 입국사실이 알려져 체포령이 내려졌고 밀고를 받은 포졸들이 그의 집을 덮쳤지만, 이를 미리 알아차리고 신부를 재빨리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고, 자기가 신부인 양 꾸며 대신 잡혀가 순교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최인길의 희생으로 주신부는 살아남아 전국을 주유하면 천주교를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했던 것이다.

최인길이 희생 당한 후 주문모 신부를 도와 조선 천주교를 일으켜 세운 주역이 그의 조카 최창현 회장이다.
최창현은 1759년에 한성부에서 역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광맘 이며 직암 등 남인 학자들과 교유하다가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1784년 겨울에 수표동 첫번째 세례식에서 이승훈으로 부터 세례를 받은 초기 성도의 한 사람이다. 그의 대부는 정약전 이었다. .
7년 뒤 일어난 신해박해를 계기로 제사를 거부하지 못하겠다는 양반 신자들이 이탈한 이후 최창현은 중인과 양인 신자들과 함께 굳건히 신앙을 지켰다. 1794년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직후 최창현은 조선의 천주교회 신자들을 대표하는 총회장으로 추대되었고 정약종 강완숙 등과 함께  각지에서 전교 사업을 전개했다.
성격이 온순하면서도 활동적이었기 때문에 신자들의 큰 신망을 바탕으로 천주교를 전국에 걸쳐 뿌리내리게 하는데 크게 공헌했는데 문재가 뛰어났던 그의 큰 업적은 주요 교덕서를 언문, 한글로 번역한 일이다. 그의 번역은 후일 프란스 선교사들에게도 극찬을 받을 만큼 뛰어난 것이어서  한문에 어두운  일반 양인 전교에 최고의 보도로 쓰였다.

신유박해 때 의금부는 교회의 핵심 인사였던 최창현을 최우선 체포 대상으로 지목했다. 초기에는  피신했지만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게 됐고   밀고자가  데리고 온 포도대장에게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처음엔, 교회를 배교하겠다는 의사를 비쳤으나 의금부에서 진행된 추후 국문에서 자신이 교회의 신도 대표임을 시인 하면서 배교 결정을 번복했고 천주와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단다. 결국 최창현은 1801년 4월 8일에 동료  신자들과 함께 한성부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게 된다.

최초의 박해 였던 신해 박해 때, 금부에 끌려간 초기 성도들이 배교 문제에 유연 했었던 것에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준  교단인 예수회의 전통과 방침에 연원이 있다는 얘기는 이미 전한 바 있지만 워낙 첨에한 논쟁이 따르는 사안이라 추후 자세히 따져 보기로 한다.

남대문 안 회현방 모퉁이, 최창현의 집 사랑채,
낮은 담장을 넘자 정원 끝에 살구꽃이 져가고 있다. 사랑채 안엔 묵향과 약향이 감돌고 있다. 책상 위엔 성경광익과 성경직해가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에는 언문으로 번역된 원고가 쌓여져 있었다. 최씨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면서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

이때 대문 쪽에서 기척이 났다. 직암과 승훈, 그리고 동섬이  들어선 것이다. 창현과 인길 두 사람은 댓돌 아래 까지 내려와 세 진객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숙사 어르신들, 만천 형님.”
“마침 두 사람이 함께 있었구먼 아주 잘됐네”
“전갈 받고 오전 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군 두 사람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았길 바라네.”

“방해 라뇨? 우리 인생에 숙사 어르신 가르침 받는 일 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

이말 한마디로 오늘 일은 일사천리가 될것이 예견 됐다.
창현이 교덕서 번역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암도 이미 알고 있었다.
“ 오래 전에 뵙고 오늘에서야 다시 인사를 드립니다. 어찌 이 누추한 곳에 발걸음을…””
창현이 동섬에게 각별한 인사를 보냈다.

동섬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답지 않게 성서적  신심이 뭍어 나는 표현 이었다.

“뜻이 있다면 우리가 오가는 발걸음은 다만 천주의 부르심을 따르는 길일 뿐이라네. 이곳이 누추하다면, 내 행색이야 말로 그것일세, 그런데  천주님의 마굿간을 누추하다 하지 않으셨겠지. 천주님은 가장 누추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 에게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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