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직암이며 승훈 등 천주교 공동체 재건을 꾀하고 있는 측의 입장에서 남인의 중추이자 조정의 실력자인 번암이 천주학을 어떻게 생각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번암 채제공과 녹암 직암 형제와의 인연은 깊었다. 그런 인연을 바탕으로 근자에도 몇차례 타진했고 긍정적인 결론을 얻었기에 이일에 적극 나섰는 던 것이다. 한마디로 채제공은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천주학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직암으로서는 몇번에 걸쳐 확인한 일이다.
사실 직암과 번암의 인연은 그 연원도 꽤 오래 됐다.
직암 권일신이 번암 채제공을 제대로 만난 것은 직암이 열아홉, 스물. 혈기 왕성할 때 안성 성호장에서 였다. 그때 번암은 경기 감사로 있으면서 여유가 생기면 수원 에서 부터 단신으로 안성을 찾아와 한나절 씩이나 성호와 준론을 나누곤 했었다. 성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것이 63년의 일이었으니 그 이태 전 무렵 이었기에 번암은 성호의 마지막 말벗 후배였던 셈이다.
성호는 기력은 쇠해 있었지만 정신은 초롱초롱했기에 후학 제자들은 이를 매우 자랑 스러워 했다.
약관 청년이었던 직암이 우연히 듣게된 준론은 조선의 과거 제도의 폐단에 대한 두 어른의 한탄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사랑에 들어 담소를 나눴지만 날이 유난히도 더웠던 그날 두 남인의 거목은 상호장 채마밭 초옥에서 대화를 나눴다. 유자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노 스승의 방침에 따라 채마밭을 맡아야 했던 갓 스물의 직암은 두 어른이 열을 올려 가며 나누는 준론을 낱낱이 들을 수 있었다.
두 거목의 얘기는 이랬다.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스무살 약관 즈음에 목민과 경세의 자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예론에 물든 성리학에 대한 소양 만으로 평생의 팔자를 결정 짓고 덩달아 집안 권속과 당파까지 영향을 주게 되는 과거 제도는 너무도 문제 투성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두 노장은 일종의 추천제인 공거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었다.
성호 선생이야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그 과거를 통해 관직에 들어 양명하고 있었던 현직 고위 당상관의 입에서 나온 그 얘기는 그렇지 않아도 그런 점 때문에 과거를 접기로 작정했던 직암에게는 귀가 번쩍 뜨이면서 번암 그를 다시 보게 했던 것이다.
며칠 뒤에는 번암과 오래 대화를 나눌수 있었다.
텃밭의 김을 매고 예의 작은 초옥 원두막에서 서가에서 들고 나온 시경을 읽고 있을 때 번암이 다가왔다. 직암은 사실 시를 좋아했다.
“무엇을 그리 얼심히 읽고 계신가? 세찌 도령”
“시경 입니다. 전에 한번 읽기는 했는데… ”
뒤에 말은 그 무렵 남인 유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양명학 책이 아닌 것이 쑥스러워 짐짓 붙인 말이었다. 그랬더니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시경, 정말로 좋은 책이지, 나도 선진 유학의 사서 중에는 가장 웃길로 꼽는다네.”
번암은 ‘선진(先秦) 유학’이라고 했다. 공맹의 정통 유학을 남인들은 그렇게 불렀다.
“자네는 그래 시경은 어떻게 읽었는가?”
“읽기는 했지만 급히 읽었다는 기억입니다. 하지만 다른 경서와는 달리 흥이 났었습니다. 특히 국풍편의 시들이 그랬습니다…”
“어찌 그랬을꼬?”
“천년도 넘은 오랜 시절의 이야기인데도 우리네 현실과 별반 다를 게 없었고 특히 백성과 관의 대비며 풍자가 마음에 들어 왔었다는 기억입니다,”
“그렇지, 왜냐면 거기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백성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일세. 그래서 시경을 한마디로 사무사의 정신, 바를 정(正)을 일깨우는 경전이라고 한다네. “
청년 직암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암은 평소 자신과 남인 중진들이 눈여겨 봤던 젊은 영재 직암이 성경 현전 고전을 어떤 체계로 공부했는지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훈고와 실사의 이치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학문이 학문을 위한 학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두 스승 성호와 순암의 일관된 가르침이었기에 직암은 자신의 생각과 공부 한 바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번에는 번암의 눈이 반쩍였고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러면서 번암은 자신이 시경 만큼이나 높이 산다는 중용의 가르침 한대목을 들려 줬다.
“군자거이 이사명, 소인행험 이요행 일세 새겨 들어 명심하게나.”
<君子居易以俟命, 小人行險以徼幸> 군자는 편안함에 처하여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하며 요행을 바란다는 애기다.
“다시 말하지만 꼭 명심하게나. 세찌 자네야 천성이 과묵하고 성실하지만 그 온화하고 우직한 면이 오히려 화가 될 지 모르네 소인배들의 참소를 받게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일세, 그러니 모든 일을 급히 서둘지 마시게. 세상일이라는 것이 내맘대로만 되는게 아니거늘… “
그때 번암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무언가를 느꼈음일까?
학문이 높아지면 예지력도 깊어 지는지 채제공의 예지력은 유명하다. 후일의 일이지만 추사 김정희의 입춘첩을 보고 그의 부친에게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추사 집 대문에 멋진 입춘첩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썼는가 물었더니 7살 추사가 썼다는 얘기였다. 번암은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 대감을 불러 ” 이 아이는 천하의 명필이 될 테지만 그 재주 때문에 너무도 큰 고초를 겪을 터이니 꼭 자중하게 하라” 일렀다는 얘기다. 서로 당색은 달랐지만 젊은이의 재주를 아끼는 충정에서 나온 고언이다. 추사는 1786년 생, 그가 7살이었다니 1793년 무렵 이다. 그때 채제공은 영상, 우상 없는 좌상으로 만인지상의 이른바 독상에 올라 있을 때 였다. 그날 그에게는 이태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직암 권일신이 떠올랐던 게다.
번암은 영민한 권씨 형제들을 각별히 아꼈다.
공거제를 실천 하듯 몇 해 뒤 과거도 안한 녹암 철신을 거의 반 강제로 세손을 가르치는 시강원 설서로 초빙해 세손과 각별한 관계를 맺게 했다. 그때 직암도 몇 차례 번암의 주선으로 장형을 따라 입궐해 세손 뒤에서 장형의 강의를 청강하기도 했다.
1762년(영조 38년) 번암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순암과 장형과 함께 홍성까지 내려가 조문을 했었다. 삼일장을 꼬박 함께 자리 했었다. 이렇듯 2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그랬던 사이다.
실은 그사이 번암에게도 부침이 있었다. 현 주상 등극이후 각별한 신임으로 병조 판서, 형조 판서, 도성 병부사, 중추부사등 요직을 두루 맡았지만 77년에는 권세가로 변한 홍국영(洪國榮)과의 마찰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야 했던 것이다. 이듬해 홍국영이 실각하자 다시 예조판서에 등용되었으나, 1781년 소론계 서명선(徐命善) 정권이 집권하면서 소론과 노론으로 부터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의 과격한 주장,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 들과도 연관 등을 이유로 저들의 집중공격을 받았다.
그는 홍국영과의 관계는 세손을 지키기 위해 당색을 초월한 관계였으며 친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를 입었다고 해명했고 사도세자 신원은 평소의 소신이라고 맞섰지만 , 노론과 소론 서인의 연합 공격은 계속됐고 결국 벼슬을 버리고 서울근교에서 은거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주상의 신임과 존경은 대단해 은거는 몇 해 가지 않았고 지난해 1785년 가을, 지중추부사로 임명돼 권부인 규장각 도설서로 출시하고 있었다. 영의정 없는 우의정 또는 좌의정 임명이 오늘 내일 이라고 얘기되고 있는 터였다. 문제는 노론과 소론의 악의 가득찬 견제였다.
그리고 보면 장인 어른인 순암의 ‘어렵사리 우리 번암이 기회를 잡았는데 이를 망치려 하느냐?’ 는 얘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장인 어른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실은 용문산에서 내려와 번암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동섬과 승훈도 함께 였다.
그가 은거하고 있던 한양 근교의 명덕산 자락 이었다. 그런데 그를 찾고 보니 은거하고 있다는 이가 왕명을 받았다며 금난전권 완전폐지 방안이며 노비제도 소작 제도 개선 등 국정 경세에 관한 궁리를 골똘이 하고 있었다.
왕과 계속 연통을 주고 받고 있었던 것이다. 라마 제국과 같이 위로부터의 천주학 전파를 생각하는 직암 일행에게는 매우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