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험난한 순명의 길 ”
정작 이총억을 임시 탁덕으로 끌어 들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직암이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자네가 아려운 일을 좀 맡아 줘야 한다고 했을 때 총억은 숙사님이 하라시면 열심히 명을 따르겠다면서 탁덕단의 전령, 심부름꾼이 되어 신명을 다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실제로 총억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 천주 공동체가 전국적으로 예상외의 빠른 성장을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역시 젊음의 패기와 추진력 그리고 기동성이 빛났던 것이다. 하지만 총억과 정약용 그리고 잠시후 살펴 볼 최인길과 같은 약관의 청년들을 임시 탁덕으로 임용 하지 않았더라면 초기 천주교단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 졌을지 모른다.
비극이 그리 빨리 오지 않을 수 있었다. 후일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직암 권일신의 희생이 있었던 것은 1791년 신해년 갸울의 일이다. 그래서 신해 옥사 혹은 신해 박해라고 한다. 젊은 공서파 남인 유학생 들이 천주 동학들을 질시하고 모함해서 비롯된 일이다.
열 포졸이 한 도둑 못 막는다고 일은 그때부터 몇몇 공서파 젊은 유생들 때문에 촉발돼 세월 두고 엄청난 비극과 참극으로 번져 갔던 것이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노론 보다도 남인 공서파가 더 혹독하고 집요하게 나왔다. 그런데 그때 남인 공서파의 선봉에 섰던 청년 유자들은 약용과 총업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미워 했고 질시했다. 사생결단을 내야 한다는 각오를 자녔던 듯 했다. 당초의 명분은 서학 세력의 준동을 놔 두면 남인 전체가 공멸한다는 이유 였다.
직암이 장인이자 스승인 순암 안정복을 찾은 그날 그 비극의 잉태와 초기 전개 과정이 그대로 노정 됐다. 하지만 그때 직암ㄴ은 일이 이렇게 번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그날의 현장, 직암의 처가이기도 한 안산 순암장으로 으로 돌아가 본다.
그날 순암은 성호의 실학사상에 그 답이 다 들어 있다면서 서학, 천주학은 필요가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 했다.
“스승님 성호 어르신이 길을 다 밝혀 놓으셨는데 지난봄 무어 그리 야단 법석을 떨어 그 사단을 일으켰어야 했단 말인가?”
지난 봄 수표동 광암의 집에서 있었던 천주학 토론회를 말하고 있었다. 야단 법석은 불교 용어다. 뜻이 변이 돼 요란 법석이라는 말로 쓰이지만 원래는 실외, 야외에서 벌어지는 큰 법회를 말했다. 그날 강학회도 법석이라면 법석이었기는 했다.
“ 야단 법석이라 할 만큼 어수선 하지는 않았는데요. 저도 처음부터 다 참여 한 것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나중에 얘기 다 들었습니다. ”
“자네는 중심이 아니었단 얘기군. 그건 다행이지만 법석이 아니라면 평온이었단 말인가? ”
순암은 말을 이었다.
“광암의 일은 너무도 가슴아픈 일이지만 다 따지고 보면 그 법석 때문에 일어난 사단 아닌가? 그 일만 없었더라도. 그리 졸지에 세상을 뜨지 않았을 텐데, 모두 자업자득이야.”
“ 자업자득이라뇨? 다른 사람도 아닌 장인어른께서 광암의 일을 그렇게 말씀 하시면 섭섭합니다.”
직암은 볼멘 소리를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섭섭해도 할 수 없네 사실이니까. 그 사단이 일어니고 이기경군과 홍낙안군이 나를 찾아와 그날의 일에 대해 다 얘기해 줬다네, 정조와 사흥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광암과 작당해서 일을 꾸몄다는 것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라네, 그리 떠벌이고 요란스레 구니 일이 그렇게 풀릴수 밖에…”
“제가 알기에는 미리 작당한 것은 결단코 아닌데요.”
” 작당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몇번의 문답 끝에 천주학의 가르침은 깊고도 오묘 하다니 그게 다환과 기양이 중인 환시리에 할 소리인가. 소도 웃겠네.”
순암은 그날의 일을 그렇게 단정하고 있았다. 더 따져 들어 정정을 받아넬 일은 아니다.
정조는 가환의 호 사흥은 기양의 자였다. 그 무렵 양반들은 자신보다 어린 상대를 부를 때 얼만큼 예우를 해 줄때는 호를, 그렇지 않을 때는 자를 불렀다. 물론 자를 부르는 것에는 친근한 의미도 있었지만 이번 경우 한 사람은 호로 부르고 한 사람은 자로 부른다는 것은 함의가 있었다. 아무튼 노인은 그날의 떠들레한 강학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하고 있었다.
“지금이 어느 때 인가? 은인자증하며 때를 기다려 온 우리 남인들이 그동안 향리에서 불철주야 궁리한 안민과 경세의 정치 사상을 펼치기 위해 번암 대감을 중심으로 젖먹던 힘도 모아야 할때 이거늘 그 야단법석으로 평지 풍파를 일으키다니 쯧쯧쯧…”
” 명례방이라고 했던가 그 역관의 집이 있는 곳이? 그곳을 추조 관헌들이 쳐들어간 일이 우연이었다고 생각 하는가? 도박판인줄 알고 이를 검거하기 위해 쳐들어 갔다는 말을 믿는가?”
추조 적발 사건에도 직암이 모르는 일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누군진 말할 수 없지만 벌써 형조와 금부, 사간원에 까지 고발 상소가 올라가 있었던 것을 자네들은 알지 못하지?’
“누가 그런 고발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까?”
” 나도 그 이름은 알지 못하네, 홍군과 이군의 말일세, ”
“일이 그쯤에서 끈난 것도 다 번암의 공이야 번암. 그가 없었으면 자네도 오늘 이자리에 없었을지도 몰라. 김화진이를 주저 앉힌 이가 번암이야. ”
남인 공서파의 실체적인 윤곽이 그려지는 순간 이었다. 홍군 홍낙안, 이군 이기경 조선 천주인이라면 뼈에 사무치는 는 이름이다. 그리고 벙암 채제공, 꼭 반대의측면 서학으리 옹호자 후원자 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늘 호혜적으로 나왔던 번암 채제공의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번암 채제공은. 남인의 역사에서 그리고 직암 권일신의 인생 행로 그 마지막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영조조에는 이른바 탕평책이라 해서 각당을 두루 등용 했다고는 하지만 소론과 남인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 햇고 사실상 노론의 독주 시대 였다 .
이런 가운데 영조 사후 현 주상이 즉위하여 남인의 대들보, 채제공을 정1품 판서로 다시 기용하면서 힘을 실어 주고 있었고 목만중을 다시 복직시켯고 가환을 입시케 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과 남인들은 노론 특히 벽파의 끈질긴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번암 그는 남인의 대들보 답게 잘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남인의 세를 늘리고 있였다. 그 때문에 순암이 번암이 만든 절호의 기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근기 남인들이 대개 그렀듯이 채제공 대감도 암자를 호로 하고 있었는데 그의 호가 번암이다.
번암 채제공(蔡濟恭)은, 1720년 5월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1799년 2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직암이 희생된 신해 박해가 1792년 의 일이나 직암보다 7년을 더 산 셈이다.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748년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청요직인 예문관 사관직에 올랐다. 1753년(영조 29년) 에는 호서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충청도를 암행 감찰하고 돌아와 균역법의 시행을 진언해 성사 시켜 남인 실학도 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후일에는 신해통공이라 해서 금난 전권 폐지에도 큰 몫을 한다. 이후 세자 시강원 홍문관수찬,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사헌부 집의를 거쳤는데 그 시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학문정진에 대한 많은 건의를 했다.
이후 그는 사도세자의 스승의 한 사람으로 그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위기에 봉착해야 했던 이인좌의 난이나 나주 괘서 사건 등의 국면에서 세자를 극력으로 보필해 화를 막았다. 1758년 도승지로 있을 때 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목숨을 걸고 이를 극력 막아 철회시키기도 했다.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이러니 정도가 그를 얼마나 존숭했을지 집작이 간다.
이후 경기감사를 대사헌, 대사간, 역임했고, 1762년(영조 38년)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그가 모친상으로 내려가자 이해 윤5월 사도세자가 폐위되고 바로 사사되었다.
1767년(영조 43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 부제학,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1769년(영조 45년)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무렵 내 외직에 있는 동안 당색은 다르지만 노론의 청명당 김종수, 소론의 서명선 등과도 사이가 좋았고 이들과 연합해 노론벽파 계열 및 외척으로부터 세손을 보호 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나중에 노론의 김종수는 그를 비판하면서도 그의 주장도 나라를 위해서는 일견 필요한 이론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영조의 깊은 신임과 함께 약방 도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1776년 3월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국장도감 제조에 임명돼 행장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현 주상 즉위 이후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는등 확실한 실세로 자리했다.
남인 실학의 맥을 이었다고 자부하는 그는 조선 유학의 적통(嫡統)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에게 시작하여 정구(鄭逑)와 허목을 거쳐 이익(李瀷)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이에 대해 탁남과 허적 등은 지나치게 시류에 영합했으며 선명성이 떨어진다며 비판하였다. 경기감사로 있을 때는 이익을 자주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