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기가 먼저냐 이가 먼저냐’는 현실적인 정치 문제와도 맞닿는 다는 것이 정산의 해석이었다. 독특하면서도 탁월한 해석이었다. 직암과 승훈은 자신들이 몰입하려는 천주학의 근본 정신과 관련해 많은 시사와 나름의 깨우침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후일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정산은 나라로 비유하면 ‘기’는 백성이고 ‘이’는 국가질서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기’가 먼저라는 입장은 백성이 국가질서보다 먼저라는 이념과 연결된다. ‘이’가 먼저라는 주장은 국가질서의 우위를 강조하는 입장과 연결된다. 그래서 주기론은 진보, 주리론은 보수와 연결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진보, 보수가 뒤바뀔 여지도 있단다. ‘백성이 국가질서보다 앞선다’에서 ‘백성’을 양반층으로 국한시킬 경우에는 주기론도 보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주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실이나 특권층의 이익이 아닌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국가질서를 구축할 경우에는 주리론도 진보가 될 수 있었다.
서경덕과 이황의 사후에 실제 전개된 상황이 그랬다. 조선 후기에 대체로 진보적 입장을 취한 쪽은 이황의 사상을 따르는 동인당이었다. 동인당의 분파인 북인당이 광해군 시대의 여당이 되어 개혁을 추구한 것, 또 다른 분파인 남인당이 대체로 개혁 노선을 지향한 것이 그 증거다.
반대로, 조선 후기에 보수적 입장을 취한 쪽은 율곡 이이의 사상을 따르는 서인당이었다. 서화담이 처음에 동인, 북인으로 분류 되었기에 대놓고 서인들은 서화담을 비조로 하지 않고 율곡을 비조로 하고 있다고 정산은 부연 설명했다.
언제 부터인지 조선의 유자들은 자신의 당파를 일가의 족보 만큼이나 중요시했다.
아들이 태어나 천자문을 익혀야 할 무렵이 되면 때면 자신의 가문이 어느 당파에 속한다고 일러주는 것이 관례였다. 적어도 어느 당파와 가깝게 여겨진다는 얘기는 해 줘야 했다. 과거, 특히 대과를 볼 때는 증조부 까지 3대의 벼슬 이력을 밝혀야 했기에 당색은 확실히 들어 났다.
각 당파는 자신들에게 정통성과 정당성이 있다고 가르쳤음은 물론이다.
정산은 붕당의 변천과 전일르 간략하게 설명했다. 직암이 어릴적 부친과 양근의 서당 훈장에게 들은릉 바와 대동소이 했지만 촌철살인의 의미 부여와 등장하는 인물론은 귀를 쫑긋 하게 했다.
“동인과 서인의 탄생은 이조전랑이 라는 직책을 두고 사림이 양분 되면서 붕당이 시작 됐다고 얘기 되고 있지 않은가 . 조정 인사권을 쥔 중요한 자리인 이조 전랑직을 누가 차지하느냐와 훈구세력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내부 분열이 이루어 졌다고 하지, 양쪽 다 문제가 있었지 권신 윤원형의 집을 기웃거렸다던지, 형제가 비위에 연루해 있다는 결격 사유가 있었지 하지만 그 기저에는 퇴계를 따르는 이들과 율곡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었던 게야.”
“ 초반에는 동인이 숫적으로 우세했지만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되지, 이 정여립의 모반 사건, 기축옥사야 말로 비극중에 비극이라네.”
직암과 승훈은 전산의 설명으로 말로만 들었고 어렴풋이 알고 있엇던 기측옥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노론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까지 기축옥사는 거론되는 것이 불온시 되는 금기의 역사였다.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기축년이었던 1589년 10월,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에서 시작되어 약 3년간 정여립과 연루된 무수한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불리는 이 기축옥사는 조선시대 역모사건 가운데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사건 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었다.
정여립이 대동계(大同契)를 이끌고 반란을 꾀한다는 역모고변으로 옥사(獄事)가 시작되었다. 정여립의 자결로 역모는 사실로 굳어졌고,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재탈환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 서인들은 사건을 확대시켜 3년간이나 옥사(獄事)를 이어가며 1,000여 명의 동인들을 유배나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비판, 견제, 공존이라는 붕당정치의 금도가 깨지고 당쟁은 유혈숙청으로 비화되었다.
이이(李珥)의 문하생 이었던 정여립은 24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며 서인들의 천거속에 1583년에 예조좌랑(정6품), 이듬해에는 홍문관 수찬에 올랐다. 그런데 1584년에 이이(李珥)가 사망한 뒤 서인을 탈당하고 다수당 세력인 동인에 합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승 이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서경덕과 조식의 논리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자 서인들이 반발했고 평판이 나빠졌다. 선조 역시 그의 행위와 이당을 불쾌히 여기며 배척하자 정여립은 사직하고 전주로 낙향하였다.
낙향한 정여립은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을 펴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호남 지역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양반, 중인, 노비, 승려 등도 받아들였으며 강론과 더불어 말타기, 활쏘기, 칼쓰기 등의 무술연마도 했다.
1587년 음력 2월, 손죽도(損竹島)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당시 전주 부윤으로 있던 남언경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출병하여 왜구를 격퇴시키기도 했다. 이 일로 정여립은 문과 무를 겸비한 선비로 호남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그의 대동계는 활동영역을 넓혀 황해도 지역으로 까지 조직을 확대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를 따르기 시작하면서 정여립의 세력이 갈수록 커지자 점차 주변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비밀장계가 선조에게 올라왔다. 안악에 사는 조구라는 자가 밀고자였는데 정여립이 대동계 사병을 이끌고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선조를 몰아내려 한다는 것이다.
선조는 즉시 의금부도사와 를 황해도와 전라도에 급파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또한 춘추관 검열로 사관에 입적하고 있던 정여립의 생질 이진길을 하옥시켰다. 10월 7일이 되자 정여립의 도주사실을 알리는 장계가 올라왔고, 17일이 되자 정여립은 죽도 은거지에서 자결했다는 보고와 함께 그의 아들 정옥남과 관련자들이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오면서 처절한 옥사가 시작 되었다.
도피 했다가 자결했다는 정여립의 집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던 무수한 편지들이 그 결정적 증거가 되어 이발을 비롯한 그와 서신을 주고 받았던 동인 거물 영수들이 줄줄이 끌려 나와야 했다. 이 옥사를 주관한 위관 (취조 대감)이 서인 송강 정철이었다.
정산은 정여립의 도피와 자결에, 아니 모반 사실 전체에 큰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엄청난 의문이지, 정여립이 위기를 느끼고 도망쳤다면 집 안에 각종 수신(受信)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 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알려진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추포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는 않았을 것 인가? ” .
“가장 석연치 않은 점은 대동계 무장 조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역모를 꾀하던 자가 싸워보지도 않고 자결했다는 점 아닌가 . 관군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말이여… 역모 주모자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력에 의한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하다 할 수 있다네”
아무튼 이발(李潑)·이길(李洁) 형제와 백유양(白惟讓)·백진민(白振民) 부자 등이 일당으로 몰려 초기에 심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 영의정 노수신(盧守愼)과 우의정 정언신(鄭彦信), 직제학(直提學) 홍종록(洪宗祿) 등 동인의 핵심 인물들이 파직되었다.
특히 조식(曺植)의 문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식의 큰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 옥사(獄死)를 당하기도 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은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묘향산에서 끌려가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으며,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종교인들도 고초를 겪었다. 옥사로 인해 수백 명이 유배되었고[45] 사망자는 최소 수백 명이고, 많게는 관련자의 가족을 포함하여 1,000명 이상이다.
이때 정찰은 동인백정으로 불리기도 했다. 후일 오익창은 상소문에서 “간교한 무리들이 그 기회를 타 역적을 토벌한다는 구실을 빌어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날조를 하여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은 모조리 다 죽이고야 말았습니다.”라고 지적했다.
“ 몇 가지 정여립의 주장 등으로 볼 때 역모가 사실이었다는 반론도 있는 것은 사실인데 나는 이또한 다르게 생각 한다네”
정여립은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계승이 합당하다는 주장을 했다. 또한 그는 “천하는 공물(公物)로 일정한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며 혈통에 근거한 왕위 계승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왕의 자격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정여립은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며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不事二君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혁신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 이런 당시로서는 불온하다고 해야 했을 사상적 경향은 정치의 도리와 의(義)를 강조한 조식(曺植)의 문인이나 성리학의 주체적 해석을 강조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모반의 근거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지.”
기축옥사는 그동안 절대 다수였던 동인들을 괴멸해 조정에는 유성룡 이산해 등 일부 소수만 남아 숨죽이고 있었는데 권불 십년이라고 했지만 10년은 커녕 이태만에 상황이 역전 된다.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 유배를 가게 되면서 다시 동인이 집권하게 됐던 것이다. 1591년 좌의정에 오른 56세의 정철은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는데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됐다. 명천(明川)에 유배됐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 이때 정철과 서인을 처리하는 문제로, 동인이 분열하게 된다네. 이산해 등 강경파가 ‘북인’이고 유성룡등 온건파가 ‘남인’이 되는데 그 바탕에는 북인이 서경덕과 조식의 주기론에 기울어 있었고 나머지 남인은 이황의 주리론을 지지 했었던 사변적 차이가 있지.”
정사의 붕당 변천사, 그리고 인물론이 이어졌다.
북인의 주축은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남명학파와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화담학파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발, 이산해, 정인홍, 허균, 유몽인 등이 있다.
“북인은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성리학의 의리론이나 명분론에 집착하는 경향이 약했으며, 성리학 이외에 양명학, 노장사상 등을 절충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 이 가운데 허균선생 이야 말로 역모로 고변 돼 억울 한 죽음 맞게 되는 매우 안타까운 북인의 인물이 아닐수 없다네. ” (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