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그날은 온정을 즐기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가을 햇살이 환하게 비추이고 있었지만 바람도 간간히 불었고 기온이 뚝 떨어져 있었다. 이런 날 직암과 승훈은 존창의 권유와 안내에 따라 정산 어르신을 모시고 덕산 온정에 왔다.
“어허 좋다, 내가 말년에 후학들을 잘 둬 이런 호강을 다하는군. 어이쿠 시원하다… “
정산 노인네는 연신 찬물과 더운물을 몸에 뿌려 대며 어린아이 처럼 좋아 했다. 처음에 남사스럽게 무슨 목욕이라며 사양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는게 가당한지 모르겠네, 직암.”
“뭐 이 정도를 호사라고 하십니까? 숙사도 참.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직암도 승훈도 모처럼 누리는 호사였다.
직암은 정산 이병휴를 숙사라고 호칭했다. 따지고 보면 직암도 성호를 직접 대면하고 가르침을 받은 안산의 성호학당 육영재의 막내뻘 이었지만 장인이자 본격 스승인 순암과 동년배였고 이제 꽤 상세히 말하려는 기호 남인 성호학파 좌파의 장형 격이었기에 그렇게 불렀다. 정산은 1710년 생으로 직암보다는 20 여년 연상이었다. 하지만 직암의 큰형 녹암은 숙사라 부르지고 정산 형으로 불렀다. 성호 이익선생이 장수하는 바람에 기호 남인 성호학파의 이른바 학연 족보는 상당히 꼬여 있는 편이었다.
존창의 여사을 온정은 상당히 잘꾸려져 있었다. 4칸짜리 온천 건물에는 욕실 (浴室), 양방(凉房), 협실(挾室), 탕실(湯室)이 꾸려져 있었다. 두칸은 기와였고 두칸은 초가였다. 욕실에는 오동나무 바가지, 큰 함지박, 조그만 물바가지, 놋대야, 의자, 수건 등 목욕 용품이 갖춰져 있었고 창을 통해 밖 경치를 보며 바람을 쐴 수 있는 방이 남북으로 하나씩 있었다.
천덕산 온정의 온천욕은 단원 이존창 덕분이었다. 전날에는 동리 청년을 시켜 정산의 집으로 먹을 거리를 잔뜩 날라다 주더니 오늘은 점심을 막 끝냈을 때 직접 찾아와 온정을 하자며 이곳으로 안내 했던 것이다. 당시 덕산과 예산은 분리된 현이었다. 두 고을 모두 현청이 있었고 현감이 따로 있었다.
직암과 승훈은 이곳 존창네 온정을 여사울 온정이라 불렀지만 실은 여사울과 가까운 덕산 동북쪽 천덕산 자락의 끝마을 서동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전부터 이 집 뒤로 졸졸 흐르는 개천물에서 온기가 있는 것을 보고 온천이 있으리라는 짐작은 했지만 워낙 돈이 드는 개발이었고 그런 집이 예산,덕산에서는 흔히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엄두를 못내고 있었단다. 그런데 이 집주인이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고 이를 떠앉은 장 조카가 여사울 마을 성원 이었다. 어차피 살 집이 아니라면 온정을 파 동리 사람 욕간으로 이용하자고 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말하자면 이 서당리 온정은 여사울의 인력과 재원이 합쳐져 개발 된 것이었다. 이런저런 공과 돈이 들어간 끝에 꼴을 갖춘 이곳은 존창이 자랑할 만 했고 존창의 부인이 대뜸 온정에 다녀러라고 권유 할 만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호사는 왕들이나 누리는 것 아니었겠는가? 그래도 선왕인 영종 임금과 현 주상이 백성들을 생각해 많은 규제들을 철폐하고 많은 것을 개혁한 것은 틀림없어. 그렇지?”
속곳 바람으로 탕실에 몸을 담구고 적당한 온도로 섞여진 탕물을 손으로 퍼올려 얼굴과 머리에 끼얹으며 정산이 말했다. 정산은 아래도 막힌 남자속곳 폐당고를 입고 있었고 직암과 승훈은 아래가 열리는 개당고 속곳을 입고 있었다. 깨끗한 새 속곳을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직암은 생각 됐다. 그 시절 양반들은 결코 남 앞에서 발가 벗지 않았다.
민간이 온천을 개발해 온정으로 사용 한다는 것은 숙종조 때만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땅에서 나오는 더운물 집에서 쓰는 것이야 규제 할수 없었다지만 이처럼 탕실까지 갖춘 온정을 민간이 개발해서 쓰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위쪽 온양과 덕산의 유황물은 예로 부터 유명했다. 역대 왕들은 왕실 전용 온정을 꾸려 치병을 핑게로 이곳들을 찾곤 했었다. 현 주상도 아버지 사도세자와 마찬가지로 피부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어 온양의 온정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존창은 자신들의 온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번 만 온 사람은 없다고 자랑했다. 양 고을 현감과 현청 관리들도 자주 찾는 다고 했다. 오늘은 숙사 어르신들 모시기 위해 일반 사람들 안 받기로 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일반 백성들에게도 소정의 이용료를 받고 개방하는 모양이었다.
볼수록 존창은 억척 스럽고 부지런한 재주꾼인데도 사려도 깊은 인물이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먼, 아런 호사를 많은 이들이 해야 하는데… 모두들 열심히 일하고 가끔씩 이런 온정을 푹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나라 관리들 다수가 단원 같은 청년이라면 그런 날이 앞당겨 질 수 있을텐데… 지금 자네들 억척으로 봐선 그런 세월이 빨리 올 것 같기도 한데. 안 그런가? ”
나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정산이 옆의 직암에게 동의와 다짐을 구하듯 물어왔다.
“전 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숙사는 참으로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십니다. “
어제 계속된 토론의 주제가 이나라 백성들의 사는 형편, 살림살이 였기에 그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언사였다. .
“참 자네들 세례라는 것 했다면서? 그때도 물에 이처럼 첨벙 들어 갔는가?”
“아닙니다. 약식으로 이마에 물 흘리는 것으로 대치 했습니다. 대개들 그렇게 한다는 군요.”
“그렇게도 하는 구먼, 천주교도 상당히 탄력적이야 융통성도 있고…“
“꼭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정산이 세례 얘기를 꺼내 천주학 애기다 다시 나왔다. 천주학에 대해 무척 호혜적이었던 정산은 알고 싶은게 많은 모양이었다. 정산은 라마 사람들이 천주학을 알면서 목욕을 즐기게 됐다는 조금 와전된 이야기 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제 오후 직암과 승훈은 덕산의 정산 집을 찾았다. 존창에 대한 삼고초려가 일고에 끝나 든든한 심정으로 정산을 찾았던 것이다.
정산은 특히 처음으로 자신 집을 찾은 외 종손자 승훈을 무척이나 반겼다. 그리고 두 사람이 너무 큰 고초를 겪었다면서 심심한 위로를 해 줬다. 사실은 추조의 옥에 하룻밤 갖혔던 것 뿐인데 알려지기는 엄청 과장돼 있었던 것이다. 하긴 마음 고생도 고생은 큰 고생이었다.
단도 직입적으로 전국적인 단위로 천주학 공동체를 결성하기로 했다는 말을 했을 때 크게 놀라지 않으면서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면서 먼저 직암의 형인 녹암은 어떻게 말하더냐고 물어왔다.
녹암도 적극 찬동하고 뒤에서 힘껏 돕기로 했다는말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당연자사로 여긴다는 태도를 보였다.
“책 잡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할것이네”
천주학 교리와 원리에 대한 몇가지 원론적 질문을 제기했고 승훈과 직암이 아는대로 성실히 답변 했다. 실은 그보다는 조직에 참여할 인물에 대한 얘기가 주종을 이뤘다. 정산은 이존창과 홍낙민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정씨 형제들은 내버려 두는게 어떻냐는 기색이었는데 저들의 친 매형인 승훈이 약전과 약용이 반드시 나서야 한다고 하니 굳이 입 밖으로 반대의 말은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실학에 대한 얘기가 시작 됐다. 정산은 약전과 약용이 천주학 보다는 자신의 실학을 더 계승 발전 시켰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직암과 승훈에게 그리고 녹암과 동섬을 포함해 천주학 성원들은 이미 실학으로만 이땅을 살릴수 없디고 결론 지운바 있다. 하지만 실학을 한번 돌아보고 그 앞날을 계산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병휴는 조선과 유학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직암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동섬과는 그 결이 크게 달랐다.
“천주학의 가르침이 아무리 수승한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천년 이상을 탐구하고 전승해 온 유학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었고 유해하기만 한것이라면 우리가 너무 초라해지지 않겠는가?”
“그습니다. 숙사, 천주실의의 이마두 성현도 유학의 가르침이 지고 하다는 것은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은 중국에 임기응변으로 그랬고 속 마음은 유학을 딱하게 여기고 있었던 같은데…”
“아닙니다. 외조부님, 제가 연경에서 만나 본 사양 탁덕 님들은 모두 하나같이 유학의 깊이와 효용성에 대해 감복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서오경 원론 유학에 대헤 그랬습니다. 그 후의 주자학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견해를 보였지만…”
“서양 중들이 정말 그러던가?”
정산은 서양 중이라는 말을 썼다.
1763년 성호 이익의 사망 후에 성호학파의 중심은 경기도 안산에서 충남 예산으로 옮겨왔다는 얘기는 이미 전한 바 있다. 성호의 조카였던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와 농은 홍유한이 그 중심에 있었다. 두 사람은 성호의 영향으로 진작부터 천주실의 , 칠극 등 서학서를 접하고 있었고, 이 예산 땅으로 이주를 결심한 것도 성호학파의 재편 구도와 이른바 성호 좌파들의 공동체 건설 시도와 맞물려 있었다.
이병휴는 예산군 덕산현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터 상경해 작은 아버지인 이익에게 수학했다. 양아버지인 이잠이 노론의 모함으로 곤장을 맞아 죽은 후 관직에 뜻을 버리고 안산과 덕산을 오가며 지역에서 이익의 학문을 계승했다. 이익의 대표적인 제자들인 안정복(安鼎福) 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등과 깊이 교류했지만 학문적인 면에서 볼 때 이병휴는 이익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급진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안정복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경전을 자주적으로 해석했다. 주자학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것이므로 당연히 뒷사람이 그 결함을 변론해 완성해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성호의 학문 중에서도 진보적인 면을 주로 계승, 발전시켜 성호 좌파로 불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