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탁덕(鐸德)의 길 순명의 길 ”
임시 사제단은 아무래도 초기 세례자를 중심으로 꾸려져야 했다. 사제단이라는 말이 그날 나오기는 했지만 직암 등은 보탁 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다. 탁덕을 보좌(補佐) 한다는 뜻이다. 사제라는 말은 제사를 주관하는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직책을 말하기에 사양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보좌 신부는 실제 직임이 있는 말이라고 해서 보좌 탁덕 줄여서 보탁으로 쓰기로 했다. 가 탁덕 이라는 얘기도 나왔지만 임시라는 뜻 보다는 가짜라는 뜻으로 여겨 질 염려가 대두 돼 제외 됐다.
논의는 장형 녹암과 동섬 그리고 직암과 승훈 네 사람이 양근 권씨가 사랑에서 했다. 녹암과 동섬은 양근을 찾은 승훈으로 부터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입교 했다. 두 노장이 진작에 찾아 선택한 세례명 교부 성인 암부락 (암브로시오)과 변증가 성인 유수도 (유스티노)는 두사람에게 썩 어울렸다. 두 사람은 가성직 사제단 에는 초기에 참여 하지 않고 뒤에서 적극 밀어주기로 했다. 젊은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는 생각과 두 사람이 전면에 나서게 되면 적잖은 주목을 받게 되고 스승 순암 선생을 위시해 남인가 주변의 우려와 비난이 더 커지게 된다는 고려가 있었기에 그랬다.
일단 그 대상자는 지난번에 이벽의 수표동 집에서 세례를 받았던 초기 강학 출신 교우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네 사람은 많은 고려 끝에 내포의 이존창을 그 첫번째 인물로 선정했다. 그의 영민함과 특유의 친화력도 그랬지만 그가 천민 노비 출신이라는 것이 그 큰 이유였다. 천주학이야 말로 이땅 신분제의 굴레를 타파 할 수 있는 유력한 탈출구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일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1785년 늦가을, 재법 찬 바람이 내포 벌판을 스치고 지나던 날이었다. 내포는 충청도 서북부 예산 당진 서산 홍성을 통털어 일컫는 지명이었다. 권일신과 이승훈, 두 사람은 존창이 살고 있는 예산 여사울을 향해 길을 걷고 있었다. 닷새 일정의 순전한 도보 였다.
야밤에 쪽잠만 자고 밤낮없이 걸으면 사흘길로도 당도할 수 있다지만 그리 화급을 다툴 일은 아니기에 일견 쉬엄 바쁘게 걸었다.
저쪽 내포평야 논에서 농부들이 가을걷이가 끝난 논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가을 걷이 수확을 얻은 농부들 치고는 너무도 활기가 없었다.
“산천의구하다는 말, 틀린 말이 아니지만 조금도 낳아지지 않는 우리네 백성들의 형편이 의구한 것이야 말로 딱한 일 아니겠나?”
직암이 모처럼 승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저도 오는 내내 벡성들의 어려운 살림살이가 계속 눈에 밟혔습니다. 숙사”
“야은 선생은 오백년 도읍지 개경을 돌아보며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다며 어즈버 태평세월이 꿈이런가 했는데 당신은 태평세월을 경험 하기는 했다는 말일까?”
“그런것 같지는 않습니다. 고려 시대에도 딱히 백성들 살기 편한 태평세월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야은선생 시대에는..”
“그렇지? 그래도 태평세월을 기린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싶다네.”
“그렇죠.” 함의가 있는 대화였다.
예산으로 오는 내내 둘은 그리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직암은 직암대로 승훈은 승훈대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할 것이 많기는 했다. 직암은 존창을 만나 건넬 말이며 보탁단이 꾸려지면 어떤 식으로 그들의 소양을 진전 시킬 것인가에 골몰했고, 또 정산 이병휴 선생을 찾아가서는 어떻게 어디까지 얘기 해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승훈은 승훈대로 생각이 많았다. 이처럼 폭풍우가 휘몰아 치듯 일이 너무도 급히 진행되는 것이 과연 천주의 뜻일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또 직암과 동섬 뿐만 아니라 녹암 스승까지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시급히 천주교단을 세워야 한다는데 천주학이 그것 만을 위한 학문이고 종교인지 마음 저 한구석에서 의구가 모락 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사람의 자신의 큰 스승인 그라몽 탁덕님과 세바찬 신부의 얼굴이 자꾸 떠 올랐다.
“승훈이 자네 실학 공동체에 대해 들어 본적이 있는가?”
몇걸음 걸었을때 직암이 물어왔다.
“처음 듣는 데요.”
“이번에 찾아뵐 자네 외종조부 되시는 정선 이병휴 선생과 이곳 여사울에 사셨던 농은 홍유한 선생과 우리 장형 녹암, 그리고 이기양과 내가 중심이 돼 추진했던 일인데 실학을 중심 사상으로 해서 공동체를 꾸려 집단 생활을 하면서 만인평등 태평성대의 모범을 한번 보여 보자는 그런 구상이었다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 시절에 그런 공동체라면 특이 합니다.”
“그리 오래전도 아니야, 우리 천진암 강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 어간 이었으니까…”
“그랬군요 그런데 그 구상은 어떻게 됐습니가?”
“아직 진행중이라고 해도 틀린말은 아닌데 자네 외조부가 돌연 와병중에 계시는 바람에 휴의가 되고 있기는 한데 어제 얘기 한 농은 홍유한 선생이 먼저 경상도 영주땅으로 내려 가 계시기는 하다네. 그곳에 공동체를 꾸린다는 것이 당초 계획 이었기 때문일세.”
직암은 이 기회에 승훈에게 자초 지종을 일러 주기로 했다. 녹암도 이번 여행 중에 승훈의 외종조부 정선을 만나기 전에 대강의 상황을 일러 주는게 좋다고 했었다.
“그랬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승훈의 표정이 밝지는 않다. 사실 대뜸 자신들의 실학 공동체에 천주학을 이용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했다.
“이백다, 영민한 자네라면 벌써 짐작 했겠지만 이제 그 계획은 변경 되었네, 실학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가 아니라 천주학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로…일간 찾아뵐 홍유한 선생이 먼저 그길을 걷고 계시네 ”
직암의 단도직입적인 결론에 승훈의 표정이 금새 밝아졌다. 그 동안의 왜 이리 이 어른들이 몰아치나 의구했던 의문이 어느정도 풀리는 모양 이었다.
“농은 선생이야 말로 천주학 수덕자 일세 대단한 열성이지…”
“낙민이 형님에게 듣기는 했습니다.”
홍낙민은 농은의 조카였다.
사실 직암 권일신에게는 여사울 가는길, 예산 방문은 낯익은 길이었다. 예산은 근기 남인들의 수양소를 겸한 학괸과도 같은 곳이었다. 몇 해 전에도 장형 철신과 함께 이곳을 찾아 며칠 묵은 적은 있었다. 그때도 정산 선생과 이곳을 떠나 소백산 으로 가기 전인 홍유한 선생을 만나 이런저런 상의와 결의를 했었다.
성호의 수제자, 정산 이병휴는 이른바 성호 좌파의 종주격이었기에 남인 학자들은 틈만 나면 예산 덕산의 그의 거처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생각의 깊이를 더했던 것이다. 홍유한이 예산으로 들어온 것도 정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홍유한은 한발 더 멀찍이 나가 있었던 것이다.
전에도 한번 언급 했듯이 농은 홍유한은 조선 초기의 수덕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믿을 만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1750년 경부터 순암 안정복, 녹암 권철신 등과 함께 ‘천주실의’, ‘칠극’등 서학을 접한 이래 천주학에 남달리 깊은 관심을 갖고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1757년, 아예 한양의 생활을 청산하고 예산으로 내려가 혼자 18년간 칠극에 따른 수계생활을 했다. 1775년 부터는 소백산 밑의 경상도 순흥 고을 현 영주시 단산면으로 가서 더욱 철저한 수덕생활을 했다.
농은 선생이 수덕생활을 하던 시기는 제대로 된 성서나 기도책, 축일표, 심지어는 신부와 대세로라도 세례를 제대로 줄 수 있는 교리를 제대로 아는 신자조차도 없던 상황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사실만 알고서 매달 7, 14, 21, 28일에는 안식하며 속세의 모든 일을 물리치고 기도에 전념했다. 또한 그날은 좋은 음식은 먹지 않았으며 배려와 자비를 실천하기에 힘썼다.
직암이 자신이 들은 바 대로 농은의 근황을 전하자 승훈의 표정은 더 밝아졌다.
여사울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평야가 끝나는 곳에 구릉이 하나 있었고 그 구릉을 넘으면 여웃골, 여사울이었다.
“이 백다. 이제 다 온 것 같소.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은 긴 싸움의 시작인 길이오, 우리는 이일을 끝낼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일을 시작해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으러 가는 길이오.”
직암은 짐짓 중간 경어를 사용했다. 광암에게 그랬듯이 지금 부터는 백다 승훈에게도 그리하리라 작정 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라는 생각이오 . 하지만 종국에는 우리 백성과 웃전들이 우리의 뜻을 알아 주리라 굳게 믿고 있소. 백성들이 결국에는 옳은 법이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무엇보다 우리는 천주와 함께 하고 있소. 자 갑시다. 우리들의 대들보 반석 이 백다.”
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진중했다. 이미 한 차례 마음의 고난을 겪고, 또 다시 시작하는 이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직암 녹암 동섬등의 상황을 모두 이해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포 여서울 호동리 마을에 들어, 지나는 주민에게 단원 이존창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벌써 그의 주변을 대하는 그의 성정과 평판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표정까지 밝아지면서 친절하고 흔쾌하게 길을 일러 주었고 마지막 이는 집 대문까지 두 사람을 안내해 줬다. 직암과 승훈은 그의 집 싸립문 앞에 서서 입으로 문을 두드렸다.
“존창이 계시는가?”
“단원 형님, 승훈이 직암 숙사 모시고 왔습니다. ” (계속)
<위 사진, 충남 예산 여사울 성지의 예수님 조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