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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03)

안동일 작

“방낙아, 보록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타산지석 회암사의 흥망성쇠>

현담은 경내를 산책 하자면서 두 사람을 대웅전 왼쪽 뒷편에 있는 부도탑 근처로 안내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 앉아 있었기에 바람도 쐴겸 좋다며 따라 나섰다. 전에는 몰랐는데 부도탑 뒷쪽에는 부서진 작은 석불상들이 흩어져 놓여 있었다. 팔다리가 부서져 떨어져 나간 불상이며 그 잔해들이 즐비 했다. 몇개는 잘라진 목을 몸체에 올려 놓은 것들도 있었는데 위태위태 했다.

“이것들이 회암사와 조선불교의 현실입니다.”
화암사지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했다.
“큰 것들도 있었지만 너무도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고 또 운반해 올 수 없어 손에 닿는 작은 것들만 어렵사리 수습해 온 것입니다.”
훼불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회암사가 임란 때 왜군에 의해 불타고 훼손 됐다고 하는데 제가 알기에는 그 이전 선조 중엽에 큰 훼불사건이 있었습니다. 망나니 같은 유자들이 나서 불상의 목을 잘라내고 석탑을 부수고 전각들을 불 태웠던 모양입니다.”

“쯧쯧, 자신의 믿음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믿음도 존중해야 하거늘…”

“죄송합니다 스님.”

두 사람이 한마디씩 했다.

현담에게 들은 양주 회암사의 역사는 조선불교의 오늘을 말해주는 시금석이었다. 영광과 치욕 그리고 흥망과 성쇠의 점철이었다. 그리고 권력의 등에 업혀  득세하려는 종교의 부침을 보여주는  눈금이자 좌표였다.
“회암사가 고려말 조선초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 요사채 3백칸을 자랑하며 크게 번성했던 곳이었다는 것은 두 분도 들으셨다니 더 말씀 드리지 않는데 이처럼 큰 가람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려말 삼대화상(三大和尙)이라 불리는 세 명의 스님,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선사와 조선을 개국한 태조임금 이 네분의 얽힌 인연 때문입니다. 스님 세분은 삼대에 걸친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이 분들이 사찰 건립과 중창의 주역입니다. “

초대 창건주는 지공선사다. 경이롭게도 지공선사는 인도 태생 승려였다. 그는 인도와 중국 원나라 그리고 고려 3국에서 뷸명을 떨친 선승이다.
지공(指空, 1300~1363)은 인도 마갈타국의 왕자였다고 전해진다. 10대때 동진 출가해 20대 초반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인도 전역을 주유하며 전법해 청년 법사로 명성을 날렸고 뜻 한 바 있어 25세때인 1324년 중국 원나라로 건너가 수도인 연경(燕京)을 중심으로 법을 전해 다시 크게 선풍을 떨친 뒤 내친 김에 고려로 까지 건너와 1326년 3월부터 1328년 9월까지 머물렀다. 지공은 약관의 젊은 나이 였지만 인도 에서도 원나라 에서도 고려 에서도 부처나 다름없는 고승으로 추앙받았다. 그가 설법을 하면 꽃비가 내렸고 그가 수계를 할 때면 마른 하늘에 뇌성이 들렸고 그의 공안은 너무도 쉽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 들었단다.

고려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법향은 지대 했다. 개경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자 마자 고려의 수도를 흔들었고 금강산에서는 당시 까지 최대인원을 동원한 법기보살도량(法紀菩薩道場)을 열어 명산을 들썩이게 했다. 금강산 유력 뒤에는 전국을 주유 했고 이후 개경 동쪽 숭수사(崇壽寺)에 주석하면서 몰려드는 많은 이들에게 계(戒)를 주었다. 임금 충숙왕 부터 헐벗은 백성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설법을 듣고 무생계(無生戒)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때 지공선사는 이곳 양주의 회암사 자리를 보고는 ‘산수(山水)의 형세가 인도의 날란다 사원과 비슷하구나!’ 하시며 절을 지을것을 부탁해 절이 건립 됐는데 그때는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답니다. 하지만 이 날란다 사원 ​이야기는 회암사를 규정짓는 운명의 말이 됩니다.”

날란다 사원은 인도 동북부 비하르주에 소재했던 불교 사찰이자 교육 기관으로, 인도 및 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여겨지고 있는 역사속의 장소다.  5세기경에 교육 장소를 갖춘 사원으로 출발했고, 이후 승려들의 수행도량이자 교학을 전수하고 익히는 ‘불교 대학’으로써 그 위상을 세우게 된다. 한역 불경에서는 나란타사(那爛陁寺)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불경 번역으로 이름을 남긴 당나라의 고승 현장(玄奘, 602~664)이나 의정도 이곳 유학생 출신이다. 현장이 631년 이곳을 찾았을 때, 날란다 대승원에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지공은 고려에서 2년 6개월을 보내고는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가 원나라로 돌아간 이후에도 많은 고려의 승려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연경을 찾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회암사 출신 나옹화상이다.
충숙왕 7년에 태어난 나옹은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21살이 되는 1340년  출가했는데 4년 만인  25세 때 회암사에서 수행 중 깨달음을 얻었다.

나옹은 더 큰 깨달음을 위해 지공선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28세 때인 1348년, 원나라 유학에 올랐다. 당시 지공은 당시 선종 원찰인 연경의 법원사(法源寺)에 있었는데, 나옹은 지공을 찾아가 그의 문하가 되어 10년 가까이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원나라 혜종이 37세인 나옹을 불러 매우 중요한 사찰인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를 맡겼다는 것을 보면 나옹 역시 연경 불교계에서도 명성을 쌓았던 모양이다.

나옹이 원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자초(自超)라는 고려 승려가 찾아와 제자로 거두었는데, 자초가 바로 후일 조선왕조의 유일한 왕사가 된 무학(無學)이었다. 자초는 무학의 초기 법명이다. 무학은 사조인 지공 으로 부터도 가르침을 얻었고 스스로를 지공과 나옹의 법맥을 이었다고 선언했다. 무학은 스승인 나옹과 나이 차는 그리 크지 않아 7살 차이 밖에 되지 않는다. 사조 격인 지공과도 20여세 차이다.

“무학대사에 대해서는 중국 선종의 큰 원류인 임제종(臨濟宗)에서도 법맥을 이어달라고 부탁할 정도 였다고 하는데 그의 법호 ‘무학(無學)’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랍니다. 무학대사는 법호 처럼 배울게 더 없으셨는지 3년여의 짧은 원나라 유학을 마치고 공민왕 7년 (1358년)에 귀국 했습니다”

무학은 경상도 합천 출생(1327년)으로 속성(姓)은 박씨로 알려져 있다. 그 역시 일찍 출가했는데 원나라에 들어가기 전에도  천문 지리 유학에 걸친 높은 학문과 치열한 선정의 젊은 수좌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그는 이성계(태조)와 깊은 인연을 맺어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만나게 된 정확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으나, 무학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회암사에 감주라는 직책으로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전국을 주유했던 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무학은 고려 전역을 주유하면서 산천을 익혔고 기인이사들을 만났다.
무학은 그때 고려의 명운이 다했음을 온몸으로 직감 했는데 그때 만난 이가 이성계 였던 것이다.

“그날 스님은 함경도 함주 석왕사 부근 산에서 사냥을 나왔던 젊은 이성계를 우연히 만났답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젊은 장수가 인상이 좋다면서 접근을 해 덕담을 던졌고 시간이 되면 석왕사로 찾아오라 일렀습니다. 며칠 뒤 이성계는 석왕사를 찾았고 이렇게 해서 두사람의 인연은 시작됐지요. 무학 스님은 이성계에게 높이 오르게 될 상(相)이 라고 말했고 지게의 세 막대기 왕(王)자 꿈을 해몽해 주었으며 부친 이자춘의 묫자리를 봐 주는 등 인연을 깊이 맺어 나갔습니다. “

이후 위화도 회군(1388)을 계기로 권력을 장악한 후, 왕을 폐하고 충신들을 제거해야 했던 이성계는 문득 문득 불안하고 초초한 느낌을 받아야 했는데 그때마다 무학을 찾아 위안을 받았다. 무학은 망설이는 이성계에게 마지막 결단을 종용한 사람중의 하나였고 그를 도와 새 나라를 세울 철학적·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성계의 휘하 신진 사대부들이 새나라는 유학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고 했을때도 새술은 새부대 라면서 개의치 않았다. 이성계는 1335년생으로 무학과는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풍수에 조예가 있었던 무학은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에게 새 수도를 어디로 정할 것인지 조언했는데, 유명한 일화가 바로 ‘한양 천도 왕십리’ 얘기다.
이는 후일의 일로 다시 회암사 얘기로 돌아오면 나옹과 지공이 다시 등장해야 한다.

무학이 먼저 고려로 돌아 온 뒤 나옹 또한 스승 지공의 허락을 받아 이듬해 1359년(40세)에 귀국했다. 고려에 귀국한 나옹은 잠시 회암사에 있다가 오대산에 들어가 수도를 계속했는데 나옹의 명성을 들은 공민왕이 1361년 그를 불러 법문을 듣고 황해도 선종의 원찰인 신광사(神光寺) 주지로 임명했다.

“스님이 주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침입이 일어났답니다.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할 정도로 고려군이 크게 몰렸는데, 나옹스님은 신광사에 계속 머무르며 절을 불태우려는 홍건적을 막아 섰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절을 지키려는 스님의 태도에서 고승의 면을 보았는지, 홍건적들도 절을 불태우거나 스님을 해치지 못하고 물러났지요. 이후 고려군이 홍건적을 몰아내자 공민왕도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가 이성계와 그의 가별초였지요. 노국공주의 화상이 모셔져 있는 신광사를 지킨 나옹에 대한 공민왕의 존경과 신임은 더 커졌습니다.”

공민왕 19년(1370),에 원나라에서 입적한 지공 선사의 사리(일부)가 고려에 이운될 수 있었다.  나옹과 무학이 적극 나선 백방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지공은 일곱해 전인 1363년에 세수 63세로 입적했다.   나옹과 무학은 스승이 평생 애착을 가졌던 회암사에 그의 부도탑을 세웠다. 두 승려는 이를 계기로 회암사 중창에 나섰다. 기실 회암사 중창은 지공의 평생 유지이기도 했다.
회암사야 말로 고려의 마라난타 사원이 될 가람으로 종국에는 고려 불교, 특히 고려의 선불교가 세계 불교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자 당부였다. 마침 나옹은 공민왕 20년(1371)에 고려의 왕사로 임명됐고 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호를 받으면서 회암사 중창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나옹과 무학은 우왕 2년(1376)에 드디어 회암사 중창공사를 끝내고 낙성식을 열었다. 중창된 회암사는 300칸이 넘는 궁궐을 능가하는 최대 가람이었다. 날란다 사원의 영광을 염두한 대 공사였다. 하지만 이 큰 불사로 인해 나옹은 권문 세족과 사대부들에게 줄기찬 비난과 원성을 받았다. 막강 후원자 공민왕이 없었기에 나옹은 끝내 유배를 떠나야 했는데 유배 길에 그만 병이 나서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했다. 무학은 스승의 사리를 사조 지공의 옆에 모셨다.

여말부터 조선 조에 이르기까지 불교계는 지공과 나옹과 무학을 기꺼이 조사(祖師)라고 여겼고, 함께 일컬어 3화상(三和尙)이라고 불렀다.   조계종 태고종에서는 사찰 낙성식이나 불상 점안식 등 주요 불교 의례에 3화상을 ‘증명법사’ 역할로 청하는 구절이 있는 예불문을 공식화 하고 있다. 행하는 의례가 여법하다는 증인이 되어달라는 의미다. 원효나 의상, 도선 같은 쟁쟁한 선대의 고승들을 제치고 여말선초의 3화상을 조선 불교계의 대표 큰 스님으로 여겼다는 얘기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이성계는 회암사를 매우 아꼈다. 자신이 즉위 하지 마자 (태조 원년 (1392) 10월 9일) 왕사로 추대한 무학대사를 회암사의 방장으로 삼아 꼭 회암사에 머물게 했고 불사가 있을 때마다 고위 대신을 보내 찰례토록 했다.
회암사는 자연스레 왕찰이 됐고, 이성계가 왕자의 난 등의 여파로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뒤에는 상왕찰이 되었다. 실제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함흥으로 칩거하기 전에 회암사에서 머물렀고 함흥에서 다시 도성으로 귀환했을 때에도 궁 보다는 회암사에서 지낸 세월이 많았다. 회암사에는 정전(政殿)이라 하여 대웅전 보다 화려한 전각이 있었고 그곳이 태상왕이 거처하는 곳 이었다. 그 전각의 기와는 당시로는 최고로 귀한 청기와 였다. 청기와를 올리게 된 사연에는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가 등장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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