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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97)

 위 사진은 서울 광화문광장에 조성된 역사물길의 모습. 연도별로 역사를 적은 돌판 위로 물이 흐르고 있다. 
 역사물길은 지난 2022년 광화문 광장을 재정비 하면서 조성된 조경용 물길로  1392년 조선 건국부터 2022년 광화문광장 조성까지 우리나라 주요 역사를 비닥 돌판에 새겼다.
 보는대로 1565년에는 '문정왕후 사망, 보우 처벌, 윤원형 추방'으로 적혀 있는데  '1846년 병오박해 김대건 신부의 순교'라는 문구와 비교해 종교간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는 불교계의 원성을 들었다.

  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라마의 보록과  조선의 보우>

유학, 유교가 나라 근간 사상이기는 했어도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동안 집안에 환란이 있으면 조선 조의 부녀자들은 절을 찾아 치성을 드렸고 애가 없는 부인은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부처와 삼신에 기도를 올렸다. 왕가의 여인들도 그랬다. 절을 찾는 부녀자들은 생전에 착한 일을 하면 극락에 들고 악행을 저지르면 육도를 윤회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종교가 없었던 시대에 거의 유일한 종교가 불교였지만 그 불교가 다시 나라의 지도 이념으로 등장한다 던지 사회개혁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조선조에서 불교가 거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잠깐 반짝 중흥을 한 적이 한번 있었다. 바로 명종조 문정왕후가 섭정으로 전권을 행사하던 때 였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보우스님이다.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국사격인 판선종사대도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에 올라 승과를 부활시키고 전국의 불교를 일신 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 또한 조선의 근간인 유교를 무시하고 배척 하는 것이 아니라 보유론 적인 입장에서 상호 통섭을 통해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을 구하려 했지만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인물이다.
직암과 동섬의 입장에서 이번 용문사 피정에서 큰 수확이 있다면 보우를 알게 된 일인데  탄압과 배척의 상황 에서의 종교 중흥책을 펼쳤고 상황에 맞는 전교활동을 벌이려 했던 이의 사연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보우가 바로 이곳 용문사 출신이라는 것 아닌가. 게다가 양근 태생이라는 것이었다.
주지 현담 스님이 해준 말이었다. 두 사람은 용문사에 있으면서 주지 현담당과 꽤 많은 대회를 할 수 있었다. 현담과의 대화는 불교 뿐 이니라 종교 전반에 관한 두 사람의  지평을 새로 열게 했고 후일의 일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되는 이른바 선지식과의 만남이었다.

“보우스님이라고 들어 보셨지요?”

어느날 요사채 툇마루를 찾아온 현담당과 라마 천주교의 보록의 전교 활동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그가 이렇게 물어 왔다.  현담은 두 사람에게 천주학에 대해 듣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천주학의 인물들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왔고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예, 명종조에 국사에 올라 승과도 재개하고 교종과 선종을 나눴다는 고승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국사라는 직책은 아니었지만 그분 이야말로 척박한 땅에서 새로운 불교를 일으켜 세상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상구보리 하화 중생에 나섰던 스님 이십니다. “
“그랬다고 하지요, 하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요. 그런데 왜 갑지가 그 스님 얘기를? ”
“ 스님이 바로 이곳 용문사 출신 입니다. 이곳으로 동진 출가 하신 분입니다. 거기다 두 분 선비님들처럼 양근 출신이십니다.”
처음듣는 얘기였다.
“그랬습니까?’

“그분이야 말로 종교를 통해 세상을 구하려고 하셨던 분입니다.”

현담당에게 간략히 들은 보우의 일생은 파란만장의 전형이었다. 현담은 보우의 불교 중흥책과 인재 양성론이 조선땅 에서 천주학의 보급과 정착에 어떤 배울 점이 있고 어떤 점을 조심하고 우려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고 염두 했던 모양이다. 현담당은 참으로 현명하고 담백한 승려였다. 그는 보우의 일생을 짧지만 굵게 그리고 여운이 남도록 차분하게 설명했다…

연산주를 몰아내고 반정으로 상에 오른 중종조 2년 (1507년) 양근 출생인 보우는 조실부모하고 어린나이에 용문사로 동진출가, 용문사에 다니러 왔던 금강산 마하연의 지행스님을 따라가 사미계를 받았고 25세때 인근인 금강산 이암굴에서 깨달음을 얻었단다.
득도 후 큰 뜻을 세우고 운수납자로 전국을 떠돌 때 사찰이 마구잡이로 헐리거나 불에 타고, 스님들이 이유도 없이 구타당하고 노역에 끌려 다니는 험한 꼴을 목도 해야 했다.  중종 시절 도학정치 (道學政治) 가 강조 되면서 불교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승과제가 폐지됐고 경국대전에 명시된  도승조(度僧條)마저 삭됐다.

보우가 운수하던 그해 1538년(중종 33)에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지 않은 사찰을 일체 철거하라는 명이 떨어져, 수많은 승려가 죽음을 당하고 사찰이 파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사건을 불교계에서는 무술법란이라 했다.
그는 승려 신분으로는 이 땅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음을 통탄하며 금강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때의 심경을 읊은 선시에는 통한의 피 눈물자국을 흥건하게 남아있었다고 회자된다.
‘불교가 쇠퇴하기 이 해보다 더 하겠는가/ 흐르는 피눈물이 갈건을 흥건하게 적시누나/ 구름 뒤 산속에서도 발붙일 곳 찾을 수 없으니/ 티끌 같은 세상 어느 곳에 이 한 몸 맡길 수 있으랴’
일필휘지의 명필로 쓰여진 이 선시를 강원도 어느 사찰에 남겼는데 우연히 이를 읽어본 강원 관찰사 정만종(鄭萬鍾)은 이를 가슴에 두었고 마하연을 찾은 길에 이 선시의 주인을 찾았단다.  이렇게 만난 두사람은 걸어온 길과 사상은  달랐고 연배도 차이가 났지만 의기가 투합했고 남다른 교분을 맺는다.

이 교분은 당대의 최고 실력자 문정왕후와의 파격적인 독대로 이어지게 된다.
이 독대에서 보우는 자신의 불교 지식과 신심은 물론 경세의 경륜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의 신앙 에서 뿐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라도 불교에 힘을 실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문정왕후는 1548년 양주 봉은사를 왕실의 원찰로 정하고 보우를 주지로 발탁했다.

힘을 얻게 된 봉은사 주지 보우는 왕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오랫동안 철폐되었던 선·교(禪敎) 양 종을 다시 일으켜 세워 봉은사를 선종수찰로, 봉선사를 교종수찰로 복원시키는 등 발군의 수완과 실력을 보여 1551년 판선종사 대도선사(判禪宗事 都大禪師)에 올랐다. 보우는 선승이었지만 교(경전의 가르침)를 등한히 하는 선은 빗나간 선이라고 설파했다.

판선교 양종(兩宗,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사 도대선사는 문정왕후가 새로 만든 벼슬로 품계는 정 2품에 판서와 같은 급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종교 관련 관직이었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사후 이 직책은 폐지되었다.

모든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강조했던  보우는 1552년,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출가자 선발전형 제도인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인재불사로  청허당 휴정(서산대사)을 필두로 송운당 유정(사명대사)에 이어 처능·처영 등 출중한 종장 인재들을 발굴 했다. 이때 선·교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선발했고 전국에 300여개 사찰을 국가 사찰로 공인했다. 후일 이들은 임진·병자호란 등 외침시 승병을 이끌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일에 적극 나서 ‘호국불교’의 기틀을 닦았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는다.

“스님은 지방 어느곳에 인재가 있다고 하면  그곳을 찾아가 그를 만나 승과에 응시할것을 권했습니다.”

빛이 크면 그늘도 깊다고 했던가.  그는  척불세력인 유림들의 집요한 질시와 모함을 피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왕후와 ‘줄대기’를 하려다 거절당한 지방 토호들은 적으로 돌변했다.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빛발 치자 46세에 봉은사 주지직과 선종판서 직에서 물러나며 자신이 발굴한 제자인 서산대사에게 후임을 맡기고   청평사에서 7년을 머믈랐다.   53세에 문정왕후의 간청으로 선종판사의 소임을 다시 맡았다. 다시 국사의 소임을 맡은 그는 더욱 온건하고 합리적인  노선으로 전국의 불교 사찰을 하화중생의 요람이자 전진기지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구휼과 관부에 제출하는 소장의 대필인 대서에 적극 나설것을 하달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진심은 기득권 유림세력에는 눈엣 가시였다.   거기에 문정왕후의 청을 이기지 못해 함께 나선 양주의 대고찰 회암사(檜巖寺) 중건 불사는 국력을 소진 시키고 민초들의 고초를 불러온다며 강한 비난의 대상이 돼야 했다.

명종 즉위 후 20년간 계속된 문정왕후의 절대 권력은 1565년(명종 20) 그녀의 죽음으로  끝을 보게 된다. 이즈음 문정왕후는 보우와 함께 전국 전무후무 최대 규모의 회암사 중창에 열성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낙성식 및 무차대회를 눈앞에 두고서 숨을 거뒀다.

문정왕후가 죽자 보우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전국각지에서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중에는 한때 (1554년 금강산에서) ‘의암義庵’이라 자호하며 ‘머리를 깎았던’ 율곡 이이의 상소문도 있었다.  이 상소문은 내용 보다도 형식과 언어구사에 있어 율곡의 명문장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영민했다는 청년 율곡 조차 그의 ‘유불무이(儒彿無二), 선교일체(禪敎一體), 인천합일(人天合一)’  원융무애 통섭의 사상을 이해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불선을 회통했던  보우는 성리학의 이기설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자신의 독특한 학설 일정설(一正說)에서 하나(一)를 가지고 하늘의 이치를, 바른 것(正)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 했다.

“하나라는 것은 성실하여 망녕됨이 없는 것을 말하니 하늘의 이치이다. 물(物)의 어느것 하나 그 이치를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의 체(體)를 말하면 하나(一)일 따름이니 처음부터 물(物)이 둘이나 셋 있는 것은 아니다.  바르다(正)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그릇됨이 없고 순수하며 잡되지 않는 것은 이르는 것이니 곧 사람의 마음이다. ”

이는 퇴계 이황의 일원론과 궤를 같이한다. 직임에게는 성신, 성령과도 일맥 통한다고 느껴졌다. 그러니 율곡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보우는 마침내 승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 그해 가을, 악연이 얽혀 있던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유배지에서도 혹세 무민 한다고 관찰사 전결로 교수형에 처했던 것이다.  세수 56세, 법랍49년이다. 변협과의 악연은 변이 경기도 광주목사 시절 왕후와의 줄을 대보려고 3번이나 보우를 찾아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한 것에서 기인 했단다.

” 그렇게 스님은  잊혀지고 사라져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우리의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간추린 보우의 행장을 끝내면서 현담은 합장을 한 뒤 잠시 염주를 굴리면서 기도를 올렸다.

현담스님을 위시해 용문사 대중의  바람은 보우 선사의 유해를 수습하는 일이라고 했다.

“조실부모로 동진 출가해  이렇다 할 피붙이도 없고, 유림과 조정의 눈 밖에 난 ‘죄인’으로 생을 마감한 비구 수행자의 사후 뒤처리가 변변했을리 만무하지요.”

그러면서 현담은 중요한 말을 던졌다.

“보우 스님께서 이땅의 민초들을 위한 하화 중생을 위해 가장 강력히 주장했고 시행하셨던 것이 바로 인재 발굴과 조직이었습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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