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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93)

 안동일 작

“방낙아, 바오로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봄 햇볕은 며느리 쏘이게 하고 가을 햇볕은 외동딸 쏘이게 한다고 했던 대로 그 풍성한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을사년 가을 직암과 동섬은 용문사 대웅전 앞 돌계단 댓돌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점심공양을 막 끝내고 거처인 요사채로 가던 길이었다.

대웅전 기둥 네 개에는 경전 게송을 적은 주련이 걸려  있었다.

佛身充滿於法界 부처의 몸 법계에 충만하여
普現一切群生前 일체 중생에게 두루 나타나고.
隨綠卦感靡不周 인연따라 감응하여 두루하니
而恒處此菩提座.항상 보리좌를 떠나지 않네.

불교 총림들에서는 부처를 찬양하는데 이 게송을 많이 사용한다.  화엄경 제 6권에 나오는 게송이란다.

” 심충만 여법계라 …더딘 해가 강산에 걸린 것이고,   봄바람에 화초가 향기로운 소식이며,  지저귀며 서로 어울려 나는 제비이고,  따뜻한 모래에서 졸고 있는 원앙새의 소식이라네, 이처럼 여여한 것이 화엄이라는데…”

동섬이 자신만의 해석을 일신에게 들려 줬다. 다른 생각에 골똘해 있던 일신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나는 보록의 라마서야 말로 천주학의 화엄경이라고 생각 하는데 자네는 어떤가?”

“ 천주학의 화엄경이라 …듣고 보니 그렇네요.”

“형님은 어떻게 그렇게 그 짧은 시간에  사도 보록의 이신칭의론을 꿰고 계십니까?”

일신은 동섬의 화엄경 해석에는 반응하지 않았지만  오전 내  끙끙댔던 보록의 라마서와 그 중심사상 이신칭의에 대해서는 신명나게 응대 했고 질문을 던졌다.

“알긴 뭘 알겠는가. 그저 장님 코끼라 만지기 식으로 추측 할 뿐이지, 큰 형님의 정문일침이 있었기도 했고… ”

큰 형님은 철신을 말했다.

그랬다.  바오로의 로마서는 직암이 볼때도 다른 천주 경전에 비해  유달리 수승했다.

현대의 평가에 있어서도 로마서는 바오로, 바울의 서신 중에서도 가장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며, 그의 신학이 초기  완성된 형태로 드러나는 저작으로 이는 바오로의 다른 많은  서신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수라고 얘기된다.
때문에 로마서는 단순한 서신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삶의 실천을  심오하게 다루는 신약의 핵심 저작으로 꼽힌다.

거기에는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화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돼  있다. 화해 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특이하다.

특히, “이신칭의”(믿음을 통한 의로움의 정립, 구원)라는 개념을  중심 주제로 하여  인간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천주 신앙의  핵심 교리를 설파하고 있다.
원죄와 은총을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인간의 죄와 타락,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통한 구원의 서사가  실증적 경험을 통해 제시된다.  거기에 구원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다는 보편적 메시지가 강조되는 점이야 말로 수승이다.

더욱이 로마서는  신앙적 논의를 넘어서, 구원받은 천주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윤리적 지침 까지 제시한다.  특히, 사랑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내세워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화목하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은 압권이다. 로마서의 이 지점이  일신등 조선 초기 성조들에게 던진 신선한 충격은 99칸 대 저택 후원 별당에 떨어진 홀아비의 속곳 같은 것이었 는지도 모른다.

또 약한 자, 소외 받은 자들을  돌봐야 한다고 무한 강조한다. 신앙적으로 약한 형제를 배려하고 사랑으로 그들을 세워주는 이타의 삶을 권장하는 것이다. 로마서는 당시 로마 교회의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 간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지만, 이는 모든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에게 적용 가능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철신을 포함해 일신과 동섬 세 사람이 로마서에 대해 이런 소양을 갖게 된 것은  이 또한 광암의 공헌이 지대 했다.   광암 이벽은 지난번에 양근에 왔을때 교덕서 한권을 동섬에게 읽어 보라며 건네 주고 떠났는데 그 책이 바로 오고사정(奥古斯丁, 어거스틴) 교부의 라마서 강해 (羅馬書 講解, 로마서) 였던 것이다.  광암의 증조부가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서 귀국할 때 아담 신부로 부터 구한 책인 모양이다. 동섬은 이신칭의를 거기서  발견했고 사형인 녹암을 찾아 서로 궁리를 했던 모양이다.  이 대목이 녹암과 동섬을 회심하게 만들었고 스스로들 세례명 까지 찾게 만들었던 것이다.

보록은 들여다 볼수록 대단 한 인물이었고 대단한 일을 해 냈다.
그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그저 서로 차별없이 사랑하며 살자는 유대교 내의  예수 운동으로 치부 됐음직한 일단의 움직임을  신비의 종교로 한차원 높였다는 것에  직암 동섬,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천주 신앙의 핵심인  십자가 사망과  부활에서 그  의미와  대속의 논리를 정립한 이가  바로 보록이었다.  그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을 이룬 십자가 사망이  대속이었으며 이를 믿어야만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신칭의는 이후 천주학 천 육백년을 관통하는 촤대의 화두가 됐던 것이다.

“믿음으로서만 구원을 받고 천당에 들 수 있다는 논리는 너무 나간 것 아닙니까?”

“그렇지,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지. 물론 개혁파 들에게도 나름대로 무슨 깊은 논리가 있기는 할거야,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데 쉽지 않구먼”

두 사람은 개혁파로 불리는 노덕파 (路德派, 루터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던 중이었다. 노덕파들은 인간의 행위는 너무도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는 믿음이라고 했다.
예수회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두사람은 노덕  추종자들을 이단자(異端者, Heretic)로 간주하고 그들로 부터 교회를 구해야 한다고 나섰던 로욜라의 사상을  전폭 지지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동섬은 표현을 완화헤 개혁파라고 했지만  이단자라는 말은  루터 등장 이후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자들로 간주하며 사용한 용어였다. 파당을 만드는 자들, 도전자들  이라고도 불렀다.

이른바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바오로의  로마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절에서 감명을 받아  시작된 일이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를 새롭게 조명한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로욜라를 비롯한 기존 천주인들은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포함돼야 한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것이 상선벌악의 진리라고 생각 했던 것이다. 유가적인 인간 이성을 내심 높이 평가하는  동섬과 일신은 자신들이 만난 천주학이 개혁파가 아니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서로 격려 하기 까지 했다.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신칭의론이다.  노덕파들은 여기서 이신만을 강조해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초기 교부들은 행위가 개제 된다고 설파했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등 초기 주요 교부들이 한결  같이 이 바오로의 바오로의  칭의론에 대해  논의하며 중요한 해석을 남겼다.

이 가운데 초기 천주학 최대의 교부로 일컫어지는 오고사정 교부(성 어거스틴) 의 해석이 독보적이며 권위 있는 해석으로 꼽힌다.    어거스틴에 앞선 시대의 또 한 사람  뛰어난 교부  암브로시우스는 바오로의 칭의 개념을 다루면서  믿음이 중심이지만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행위가 반드시 게재 되야 한다는 논리를 강조 했던 것이다.  이는 제자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영향을 미쳤지만 동섬과 녹암에게도 큰 감명과 공감을 던졌기에 녹암은 서슴없이 자신의 세레명을 암브로라시오로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와 존 칼뱅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로마서 강해’ 는   칭의와 은총, 구원을 해석하는 초기 천주교의 가장 중요한 저술의 하나다.  당시 녹암, 직암,  동섬이 어떤 한역본을 만나 탐구 했는지 백방으로 찾아 봤지만 알아낼  수 없었다.  후일 직암이 공초를 받을때 자신이 교부 어거스딩(이렇게 쓰이기도 했다. 정약종의 세례명이 어거스딩이었다)  의 저술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술회 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 천주, 하느님의 은총이 결정적이라는 점은  명백히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행을 쌓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에는 회의론을 펼치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논지를 펼친다.
그의 로마서 강해는 “칭의(justificatio)”가 무엇이며, “믿음과 행위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 이어진다. 그는 바오로가  말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라는 구절을 적극 해석하여,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자의적 행위 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에 적극 동조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지킨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대신 의롭게 된다, 구원을 받는다는 “칭의는 하나님의 은총(gratia)으로 가능하며, 믿음이 그 출발점이다” 고 설파한다.  믿음은 필수적이지만, 출발점이기에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사랑과 선행이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바오로가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를 시간적 요인까지 적용해 적극 해석한 것이다.
“믿음이 사랑을 통해 역사할 때(Fides caritate operatur) 참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명제는 믿음이 구원의 시작이지만, 은총을 받은 자는 사랑의 선행을 통해 그 믿음을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이미 죄로 인해 약화되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다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궁극의 선한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오로가 말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 를 강조하며, 의인은 단순히 선언적으로 의롭다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실제로 변화되는 존재라고 했다.
따라서 칭의는 단순한 ‘법정적 선언’(forensic justific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성화, sanctificatio)과 연결된다고 보았고 그렇게 결론 내렸던 것이다.

오고사정,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말한대로  가톨릭의 공식적 교리가 되어,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에서 그의 칭의론이 케리그마 된다. 그때  가톨릭 교단은 그의 견해에  따라 “칭의는 오직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선행)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도그마를 케리그마 (교회의 공식선언) 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들을 저항자, 프로테스탄트라 불렀던  개신교 신학의  루터와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의 강조점 특히 성화와 사랑의 역할 과는 다른 해석을 했다.  루터는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라 보았고 칼뱅은 사람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칭의 하는 이,  구원 받을 이는 이미 정해졌다는 예정설을 설파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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