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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89)

 안동일 작

“방낙아,  보록 처럼 나서 교회에 헌신 하거라”

  직암이 승훈의 시를 놓고 배교의 시가 아니라고 여기는 까닭이 있었다. 광암과 직암 그리고 승훈 만이 아는 사실이기도 했다. 이는 야소회의 적응주의와 관련된 사항이었다. 연경에서 승훈이 세례를 받고 그곳을 떠나올 때 그라몽 양동재 탁덕은  승훈에게 특별히 일러 둘 말이 있다면서 ‘순교도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지만 신앙인의   목숨과 전교의 영속성이  더 중요 하다고 여기는 것이 자신이 속한 야소회의 가르침이며 전통’이라고 일러 줬던 것이다.  

 심정적으로 세 사람은  자신들이 야소회 소속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직암의 세례명이 야소회 창립 성원의 한 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라는 것도 이를 십분 입증하는 일이다.

“장렬하게 순교하기는 멋지고 쉬운 일이지만 어렵지만 생명을 부지하면서 전교를 이어가는 일이 더 가치 있다는 것이 우리 야소회의 일관된 입장일세,  베드로 자네는 이 일을 제대로 명심해야 할 것이야. 때가 되면 내 말을 몸 전체로  알게 될 것이네.”

전교자라면 칼뱅 교회에 가면 그곳 강단에 서서 칼뱅주의를 설교 할만큼 그 소양을 가져야 하고 이교도 무리에 가면 예수를 욕할 수 있는 용기 까지 가져야 한다고 했던  야소회의 노사제는 이렇게 말을 했단다.

 야소회가 (예수회 Jesuit)가 16세기부터 동아시아에서 전교 활동을 펼치며, 현지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는 ‘적응주의’ 선교 정책을 채택했다는 것은 직암 광암 등도 교덕서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적응주의는  현지의 종교, 철학, 사회 구조 등을 깊이 이해하고 이에 맞춰 복음을 전파하는 접근 방식이다.  중국에서는 유교 사상과 전통을 존중하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전파하려 했기에 마테오 리치가 유학자 행세를 했고 하비에르는 일본에서 불교 승복을 입고 전교에 임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적응주의는 다른 가톨릭 수사회 선교 단체들, 특히 야소회에 이어 후발 주자로 추격해 오는 도명회(도미니코회)와 방지거회 (프란치스코회)로 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회의 적응주의가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비난 했다.  이런 내부 갈등은 17세기 초 ‘전례 논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교황청은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기실 직암 광암 등은 제사를 지내면  안된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다. 1700년 대 초에 오랜 논란 끝에 교황청이  완고한 제사 금지령을 내렸던 것을 그들도 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에서 그때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야소회의  고집스런 적응주의 때문에  어름어름 넘어가는 분위기였기에 애써 모른척 하고 있었다. 그라몽신부도 이에 대해 승훈에게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전례논쟁은 특히  직암의 큰 관심사항이었기에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 숙지하고 있는 바 이기도 했다.  따져보면 후일 직암이 제사 금지령은 일시적인 정책이라고 했듯이  실제 교황청이 오락가락 했던 측면이 분명히 있다. 

 1640년대 중반  들어 중국에서의 기제사 문제가 공론화 되면서 인노첸시오 10세에 의해  첫번째 제사 금지 포고령이 내려 지자  이에  1651년,  중국의 예수회에서는   선교 사제 한사람을  특사로  로마로 보내  중국에서의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공경의 표현이고 문화, 정치적 의례일 뿐이지 종교적 의미가 결코 없음을 강조했고, 이걸 금지시키게 되면 중국에서의 전도도 불가능해진다는 이유로 훈령을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1656년,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중국의 신자들은 공자와 조상을 기리는 의식에 참여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다.

 3년 뒤인 1659년에는  도미니코회 선교사 폴랑코(J. Polanco)가 다시 인노첸시오 10세의 훈령과 알렉산데르 7세의 훈령 중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를 교황청에 질의, 10년 뒤인 1669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모두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각각 구체적 환경에 따라 적용돼야 한다”는 절충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도미니코회는 여기서 물러나지 않고, 이번에는 모랄레스의 후임으로 도미니코회 중국 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었던 나바레테 주교가 1674년 로마로 직접  돌아가 정식으로 “예수회 저것들이 중국에서 제멋 대로 전도하는 것에 대해 교황께서  나서 전면 재검토하라고 명령해야 합니다”라고 다시금 문제를 제기했다.  이어서 그는 1676년에는 예수회의 노선을 비판하는 저서를 출간,  중국 의례 논쟁의 무대를 중국 내부에서 유럽 전역으로 확대시켰다.

 이러는 사이에 중국에서는 왕조가 바뀌었고, 기존 명 왕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명한 판단력과 예의 적응력을 발휘해 왕조교체기 중국에서 살아남아서 새로운 중국의 지배자가 된 만주족 청 왕조의 신임을 얻는데도 성공한다

 하지만 1700년대에 들어 오면서 예수회가 유럽 등 전 세계 상황과 맞물려 급격히 힘을 잃게 되면서 중국에서의 저간 상황이 크게 변화 되고 있었던 것이다. 

직암에게는 이승훈의 벽이시가 이런 예수회의 상황 까지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 졌다.

그의 한시를 의역하면 이렇다.   

하늘과 땅을 씨줄과 날줄로 걸어 구획을 짓자 동과 서의 분간이 생겼다.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는 건너기 힘든 깊은 골짜기가 놓여있다. 그 아래로는 ‘묘학(墓壑)’ 즉 무덤들의 깊은 계곡이 있다. 그 죽음의 골짜기 위로 동과 서를 연결하는 홍교(虹橋), 곧 무지개 다리가 걸렸다. 하지만 자옥한 안개와 구름 속에 잠겨있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한 심지의 향을 사르며 서학책을 불에 함께 태웠다. 이제 나는 신앙을 버리고 바른 도리로 돌아오겠다. 이제껏 동양과 서양이 서로 건널 수 없는 골짜기인 줄을 잘 몰랐다. 그 사이로 드높게 걸렸던 무지개 다리는 끊어진 채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구름 안개 속에 잠겼다. 그 다리를 더는 건너려 하지 않겠다. 평소 불우했던 유학자 한유의 묘당에 제사를 지내련다. “

 직암에게는  이 시가 결코 이단, 즉 천주교를 벽파한다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사모하고 못 잊어 생각하는 글로 다가섰다. 천주교를 동경하고 그 교회 서적을 불태운 것을 한없이 마음 아파하는 뜻을  읊고 있다고 보여졌다. 자신에게 보내는 승훈의 깊은 마음 속 진심인 것만 같았다. 

 시귀에서  ‘천이지기한서동(天彛地紀限西東)’이란 ‘그대와 나 사는 곳이 서와 동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뜻이고, ‘저무는 구렁’은 환난과 심란 속에 파묻힌 당신 자신을 말함이요, ‘무지개 마을’은 찬란한 진리의 광명 속에 사는 선교사들을 뜻하고, ‘타오르는 한 가닥 마음의 향불’은 승훈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신앙의 향불이었다.

  서학 서적이 불타는 바람에 일렁거린다고 애통하게 여기면서   멀리 조묘나 바라보고 문공에게 제사를 드려 볼까 했다.   조묘는 중국 조주에 있는 한유의 사당을 말함이다. 승훈이 유독 그이 에게  제사한다는 것은, 평생 불우했던 그의 정신을 자신을 빅대어 특별히 ‘위로한다’는 뜻일 게다.  

 제2구의 저문 골짝의 무지개 다리는 그저 나온 말이 아니다. 주자(朱子)가 「무이도가(武夷櫂歌)」에서 말한 “홍교 한번 끊긴 뒤로 소식이 아예 없고, 일만 골짝 일천 바위 푸른 안개 잠겼구나(虹橋一斷無消息, 萬壑千巖鎖翠煙)”에 근원을 둔다.  「주차집보(朱箚輯補)」 권 9에 나온다. 일반적으로는 도학의 전승이 끊어지고 말았다는 뜻으로 쓴다. 승훈은 천주학의 전승이 끊길것을 못내 염려하고 있었다.

 직암에게는 친척들 앞에서 배교를 공개 선언하며, 그 구체적 증명으로 지은 시를 눈물로써 읽어 내려가는 승훈의 모습이 그려 졌다.  속마음을 애써 은유로 감추고 있는 그의 싯구에 속 모르는 친척들은 고개를 주억 거렸을 게다. 

 아렇듯 승훈은 야소회의 정신을 은연중에 알리고 있는데 고지식한 광암은 그예 스러져 갔던 것이다. 

“참으로 못난 인사 같으니라고…”

 직암은 광의 참혹한 소식을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과장된 뜬 소문이려니 했지만 백방으로 알아본 결과 사실이었다.  

 유생들의 통문이 돌자 이벽의 아버지 이부만은 경주 이씨 문중 회의에 수차례 불려가 문책을 당해야 던 모양이다.  아들을 배교시키지 못하면 족보에서 제명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족보에서 삭제된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양반의 지위를 잃는 패가망신 일이었다. 양반의 지위를 잃게 되면 무과에 급제해 있던 이벽의 형과 아우는 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벽은 부친 이부만 선달(무과 급제자)의 우악스런 강압에도 천주교를 단념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던 모양이다. 급기야 그의 부친은 대들보에 목을 메는 자살 소동까지 감행했다. 그러자 광암은 “아버님의 말을 쫒아 나가지 않겠습니다.” 했단다. 광암은 그 날 이후 방에 틀어 박혀 식음을 전폐했고 열흘 쯤 뒤 세상을 떠났다. 직암은 별당에 갇힌 이벽이 1785년 음력 6월 중순에  사망 해 선산 구석에 묻혔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말한대로 집안에서는 돌림병에 걸려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 장례도 치루지 않았고 조문도 받지 않았다.

직암은 광암이 묻혔다는 포천 화현리의  이씨네 선산을  찾아가 아직 때도 입히지 않은 붉고 작은 초라한 무덤 앞에서 피눈물을 쏟았다.  광암은 승훈 보다 더 고지식했다. 야소회의 정신을 체득하고 있었다면 그리 쉽게 목숨줄을 놓아서는 안되었다. 

 광암을 자신이 죽인것만 같았다.  광암이 너무 고지식 하게 신앙과 계율 준수만을 고집하고 있다고 대중화를 위해서는 그러면 안된다고 여러차례 충고 했던 것이다.   그러지 말걸 싶었다. 승훈이며 정씨네 형제처럼  대처하기에는 그의 신앙과 자존심이 허락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표동 시회에서 사자후를 발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784년 겨울, 서울 수표동  이벽의 집에서는 큰 시회가 열렸다.  내노라 하는 남인 유자들이 거의 다 모인 시회였다. 실은 말이 시회지 천주학 토론회 였다.  이벽이 천주학을 소개하고 옹호하는 입장에 섰고   이가환, 이기양 이 나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의문을 제시하는 형식의 토론회 였다.  시회는 사흘에 걸쳐 게속 됐는데 천주교 교리에 대한 심도 있는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졌다. 조선 초유의 일이었다.

 결국 이가환과 이기양이 이 이벽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에 감복하여  “이 도리는 훌륭하고 참되다”라고 인정했다고 외부에는 알려져 있다.  약간의 괴장은 있지만 대체적으로 맞다.  이 시회  토론회는 당시 천주학 서학이 조선 지식인 사회에  학문적 토론의 주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로서 이벽의  수표동 집은 조선 천주학의 중요한 활동 중심지, 이벽은 그 중심자 로서 주목 받게 됐다. 

 보유론적인 입장에서 서헉 천주학을 받아 들였던 남인 유자들의 시회 였던 만큼 유교적 가치와 천주교 교리의 조화는 이날 시회, 토론회의 가장 큰 주제였다.  이가환과 이기양은  유교적 윤리와 천주교 교리 사이의 충돌을 우려하며, 천주교가 가족 제사와 충 효 사상을 부정하는 것 아니냐고 대뜸 들고 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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