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중간 작가의 말 5. >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말라”
병인박해로 순교한 신자들은 공식 기록이 남아있는 숫자만 따져도 8,000명 남짓으로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에서도 역사상 최대 규모다. 해미읍성의 경우처럼 공안등 기록없이 처형된 신자들 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크게 증가 한다. 일부에서는 2만이 넘는다고도 하고 있다.
조선 역사 뿐이 아니라 전세계 천주교 박해 역사상 최대 규모다. 대규모 기독교 박해의 효시로 꼽히는 로마 대화재 때의 희생도 기백 단위 였다. 역사적으로 박해 와 순교는 선교사들에게 가해진 일이었지 자국민을 그렇게 대량으로 살상한 일은 없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수만의 희생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쪽은 반란 봉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1627년의 일본 나가사키 반란이나 1850년대의 중국 태평천국의 난 때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를 기독교가 게재 돼 있다고는 해도 종교적 수난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저들이야 말로 관부에 대항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려 한 봉기이자 반란을 일으켰다지만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반항 한번 않은 양순한 양떼 들이었다. 이런 양떼들을 대원군의 권부는 학살했던 것이다.
병인 학살로 정점을 찍은 조선조의 천주교 탄압은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국교 수립으로 천주교 포교가 공식 승인되면서, 비로소 1세기 만에 끝났다.
그리고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천주교 신자의 수는 병인박해 이전 수준을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무려 2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니, 그만큼 병인박해가 조선 천주교에 얼마나 큰 시련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훗날 한국 천주교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등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원인을 병인박해에서 찾기도 한다. 조선시대 최초 순교자인 김범우 토마스가 1787년에 희생된 이후 병인박해가 끝난 1872년까지 90여년 가까운 박해 기간 동안 권력에 저항한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시절 활동했던 천주교 포교자들이며 개신교인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의 가정사를 보면 누구는 병인박해 때 부모가 참수형으로 순교하는 걸 지켜보고, 누구는 병인박해 때 조부모가 옥사했다더라. 같은 경우가 넘쳐나고 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흥선 대원군 그의 세도는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1873년 11월 흥선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이용하던 전용문이 굳게 닫혔다. 최익현(崔益鉉)이 흥선대원군의 시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바로 뒤였다. 최익현은 이 상소에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날 것을 정면으로 요구했다. 따라서 왕명으로 전용문이 폐쇄된 것은 그로 하여금 물러나라는 신호였다. 흥선대원군은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양주 곧은골(直谷)로 내려가 은거했다. 의외의 조용한 수용이었다.
일차 실각한 그는 그후 권토중래를 위해 갖은 애를 쓰다가 임오군란(1882) 때와 을미사변(1895) 때 잠깐씩 재기해 권좌에 올랐지만 그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때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겨를이 없었는지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 사이 대원군 없는 조선호는 본격적인 개항 모드에 접어든다. 일반적인 의미의 개항은 외국과 국교를 맺고 통상 관계를 갖는 일을 말하지만, 조선 에서의 개항은 1876년 2월 26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을 체결, 문호를 개방하게 된 일을 말한다.
조선은 일본의 무력까지 동원한 끈질긴 압박에 굴복, 그해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하게 됐다. 그후 몇 년 동안 청일의 각축속에 우위를 점한 일본의 전횡이 계속 되다 1882 년에 청의 강권으로 미국과 수호 조약을 맺었고 이어 83년에 독일, 영국, 그리고 이태리와 차례로 조약을 체결 했으며 84년에는 러시아와도 통상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한다. 프랑스와의 조불수호조약은 1886년(고종 23)에야 맺어진다. 구원이 있었기 때문에 늦은 모양이다.
일각에서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각 국과의 개항은 대원군이 실각한 뒤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그사이 상황이 변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나라의 곳간이나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더 나빠져 있었다.
프랑스와의 조약에는 프랑스어 교육과 선교의 자유가 포함돼 있었다.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는 종교 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청국의 이홍장이 적극 나서 청국 땅에서 체결한 미국과의 조약이 그렇다. 교육과 의료에 대한 지원만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얼음장 밑에서도 강물이 흐르듯 그 사이에도 조선 천주교는 지하에서 명맥을 유지했고 선교사들은 계속 비밀리에 입국 했다.
한 한국 천주교의 흑역사와 중흥 시기를 함께 점묘하고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뮈텔 주교가 조선에 입국 한 것이 1881년 이었다. 외방 전교회 선교사 들에게 계속 조선은 경외의 땅이었고 축복의 땅 이었다. 순교의 성지였던 것이다.
하늘은 유대인들에게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 바빌론에서 노예생활의 고초를 주셨듯이 조선 천주교 인들에게는 백년에 걸친 박해의 시험대 저울 위에 서게 했던 것이다. 이 저울의 눈금에는 외방 전교회 사제들의 피가 얼룩져 있지만 종국에는 큰 영광으로 이어지게 안배 하셨던 것이다.
역시 하느님은 역시 원수를 사랑하셨다. 「척화비」 를 나라 곳곳에 세우고 천주교신자를 무참히 살해한 「신앙의 원수」 흥선대원군의 부인과 그의 손자 손녀들을 하느님이 용서하고 간택하실 줄이야!
박해가 끝난 80년대와 90년대 흥선대원군 부인 민씨는 천주교인 궁녀들을 통해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와 여러 차례 접촉했다. 아들 고종의 유모 박 마르타(1868년 순교) 영향으로 박해 이전부터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민씨는 천주교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더니 이윽고 세례받기를 청했다. 민 부대부인은 1896년 뭐텔 주교를 초청, 운현궁옆 궁녀의 집에서 「마리아」 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뮈텔 주교는 자신의 일기장에 민씨 세례를 이렇게 기록했다.
”1896년 10월 11일 왕의 어머니가 세례를 청해왔다. 합의한 대로 나는 저녁 7시에 조 회장과 함께 출발, 대원군 궁궐 하녀인 이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15분이 지나자 왕의 어머니가 가마를 빌려 타고 비밀리에 그곳에 당도했다.(…) 부인은 나에게밖에 희망을 둘 곳이 없다고 하며(…) 나는 그녀에게 우리의 첫째요 유일한 의탁처는 오직 천주님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고령(79살)이고 궁궐에서 나오기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견진성사까지 받도록 권고했다.(…)”
그후 민부인은 뮈텔 주교에게 종부성사를 받을 때 병환 중에 있는 대원군도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청했단다. 「죄 많은」 남편을 속죄시키고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은 뮈텔 주교의 심방을 의외로 젊잖게 거절했단다. 염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원군은 얼마 안가 세상을 하직했다. 1898년의 일이다.
뮈텔 주교는 그후 고종황제도 방문, 전교를 한 적이 있는데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내가 순교자들의 비참한 정경을 이야기하자 황제는 벌떡 일어서면서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고 힘차게 말했다. 』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대원군을 위해 그의 손자들은 대부분 보속의 길을 걸었다. 모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잘못을 참회 한다며 용서를 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를 받아 드렸다. 고종의 둘째아들 의친왕 이강이 1955년 「비오」를 세례명으로 영세를 한 후 약 보름 뒤 79세의 나이로 선종한데 이어 그 부인 김숙도 같은 해 서울 가희동성당에서 「마리아」로 세례를 받았다. 뒤를 이어 고종의 셋째아들 영친왕(垠) 이 1961년 동경에서 그곳에 머물러있던 프란치스코회 석종관 신부에 의해 「요셉」 이란 세례명으로 입교했다. 영친왕은 1963년 귀국, 종부성사까지 받고 73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장례식장에는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했다. 그리고 그의 외아들 이구(玖) 또한 진작에 세례를 받았고 옛 러시아 황족의 후손인 신자 쥴리아와 결혼했다.
끝으로 지난 2020년 4월21일 조선왕조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엘리자벳이란 세레명으로 대세를 받고 하느님 품에 안김으로써 고종의 6자녀 중 어려서 병사한 완화군과 1926년 세상을 떠난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주의 품에서 조부 대원군의 죄를 보속한 셈이 됐다.
개항이후 하느님의 조선 백성에 대한 섭리는 일단 천주교를 제쳐 두고 ‘하나님’으로 화해 개신교 쪽으로 방점을 찍게 된다. 천주교 인들에게는 그동안 너무 아프게 수고 했으니 잠시 쉬라는 뜻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문외한 이라도 천주교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이 같은 존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계속)
*위 그림과 사진은 서울 양화의 절두산 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