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중간 작가의 말 2.>
박해 속에서 피어 커져가는 신앙
또 애꿎은 생명들이 불의의 사고로 희생됐다. 사망자가 자그마치 179명이나 된단다. 무안 국제공항 태국 발 비행기 참사 얘기다. 고인들의 명복을 충심으로 빌면서 안전제일, 생명제일의 원칙을 다시한번 가슴 속 깊이 새기게 되는 세밑이다.
애꿎은 생명을 잔혹하게 앗아간 조선조의 천주교 박해는 신유박해에 이어 1839년의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세개의 큰 박해로 이어지는데 프랑스 선교사 3명의 신부 까지 참형된 본격적인 박해, 기해박해 또한 조정의 정치 지형과 맞물린 정권 다툼 때문에 일어난 측면이 강하다.
찬주교 박해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시 자세히 종합적으로 다룰 겨를이 없는듯 해서 이번 기회를 빌어 주요 박해에 대해서 간략 하게나마 살펴 보려 한다. 박해의 희생이야 말로 오늘의 한국 천주교, 나아가 기독교 중흥의 큰 텃밭이고 주요 토양이기 때문이다.
신유박해를 주도했던 노론 벽파 경주 김문은 1802년 시파에 속했던 안동 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의 비에 오르면서 안동 김문에 정권을 빼았겼고 이 후 잠시 풍양조씨가 전면에 등장하기는 했지만 반백년이 넘게 진행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됐다.
기해박해의 주역 풍양조씨의 등장 역시 외척의 발호와 맞물려 있다. 순조는 1827년 2월 총명했던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으로 정사를 대신 맡아보게 했다. 효명세자는 안동 김문을 견제 하면서 처가인 풍양 조씨에 힘을 실어 준다. 장인 조만영(趙萬永)이 이 풍양 조씨였다. 당시 실권직인 어영대장의 자리에 오른 조만영은 아우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은연중 세력을 펴기 시작했지만 그 무렵 표면적인 큰 다툼은 없었다. 또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그의 돌연한 죽음으로 2년에 그치고 만다.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를 싫어하는 벽파와는 달리 관용적이었다. 1834년 순조 마저 세상을 떠나자 손자인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의 최고 지위에 있던 안동 김씨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순원왕후를 지근에서 보필한 이가 오빠인 김유근(金逌根)이었다. 김유근은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로 세례까지 받은 이로 당연히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그러나 김유근이 1839년 지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면서 정권이 자연스레 풍양 조씨에게 넘어갔다.
풍양조씨는 집권하자 마자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우의정 이지연을 동원해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내막은 안동 김문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지연은 1839년 3월 천주교에 대한 정책 상소를 올려 이를 시행하게 했다.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과 지방에 다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했지만 당시의 형조 판서며 포도 대장 등은 안동 김문의 눈치를 보았는지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보름이 지나도 천주교의 요인이 잡히지 않자, 조씨들은 사헌부, 사간원 등을 동원해 원흉을 잡지 못하면 천주교의 근절을 기할 수 없다는 요지의 상소를 다시 올렸고 5월 25일에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교인체포에 전력을 기하라는 새로운 칙령이 반포되어 교인 색출이 이루어진다. 대왕대비는 불똥이 안동 김문에 튈것을 염려 했던 듯 싶다.
하지만 그때 판관들은 배교 하겠다고 하면 풀어 줬다. 당시 형조판서의 보고에 따르면,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으로 그 중 15명이 배교해 석방됐고, 28일에는 나머지 중에 11명이 배교했으며 이어서 또 5명이 배교했다고 나온다. 43명 중에 31명이 배교 했다는 얘기다. 배교와 순교 무척이나 민감하면서도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는 주제다.
그러나 김유근의 죽음과 교인을 가장한 밀고자 (김순성 金淳性) 등의 배신행위로, 유진길·정하상(丁夏祥)·조신철(趙信喆) 등 조선교회 재건운동의 중요 인물이 잇따라 체포 되면서 기해 박해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다.
유진길의 체포령은 이미 내려져 있었으나 당상역관이라는 정3품의 벼슬에다가 김유근과의 친분도 알려져 있어서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가, 김유근이 병으로 죽자 즉시 체포되었던 것이다.
그때 조선에는 3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입국해 있었다. 우의정 이지연은 이 외국인 선교사 체포를 국사로 다뤄 의금부로 하여금 취급케 하여 줄 것을 청했다. 그러면서 서양인 3명(앵베르·모방·샤스탕)이 현재 남도(南道)로 갔다 하니 즉시 정예 포교들을 보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대왕대비는 국청(鞫廳)을 차리는 것이 시급한 일이 아니라면서도 포교를 남도로 보내 즉각 체포 하라고 지시했다.
조정에서는 7월 종래의 오가작통법을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엄격히 적용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피신했던 주교 앵베르도 양감(陽甘)이라는 동리에 안전하게 숨어 있었지만, 배신자의 책동과 고발이 이어지자 포교 앞에 자현(自現)할 수 밖에 없었다. 애끚은 신도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였다.
앵베르 주교는 1839년 8월 10일에 밀고를 당했다. 밀고를 한 배신자(또 김순성)는 관리들과 짜고 포도대를 꾸려놓고는 한 순진한 천주교인 농부를 현혹해서, “조정에서 천주교를 허락해 고위 관리들이 입교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꾸며 “프랑스인 신부들이 한양으로 가서 그들을 개종시켜야 한다”라고 말하게 했다.
농부는 포졸들 보다 먼저 앵베르 주교를 찾아가서 들은 이야기를 말했다. 사목 경험이 많은 주교는 잘못된 정보인 줄 알면서도 교우들의 안전을 위해 자수를 결심했다. 주교는 간절한 미사를 올린 뒤 그를 기다리던 관리들에게 제발로 걸어갔다.
그는 한양으로 보내져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행방을 드러내면 신자들에 대한 탄압이 줄어 들 것으로 생각한 주교는 동료 수하 신부인 피에르 모방, 자크오노레 샤스탕 신부에게 조선 관가에 자수할 것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좋은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 그때 앙베르 주교(아래 사진)가 한 말이다.
주교의 명을 받은 두 신부는 7월 말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자현해 역시 서울로 압송됐다. 포청에서는 3명의 선교사를 8월 5일과 7일 양일에 걸쳐 신문한 뒤 의금부로 이송헸고 그들의 안내자로 알려진 유진길·정하상·조신철 등과 함께 추국(推鞫) 받게 했다.
이 때 선교사들은 각각 국적과 입국 목적을 명백히 했다.
“천주의 가르침을 이 땅에 전하기 위해 , 천주가 사랑하는 조선 백성들과 함께 하기 위해 왔다.”
모진 고문에도 입국 때 의주에서부터 조신철과 정하상의 인도를 받았으며, 서울에 들어와 정하상의 집에서 거처했다는 사실만을 자백하고, 그 밖의 물음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대왕대비는 이제 와서 진상을 밝힐 단서도 없으니, 신유년 주문모(周文謨)의 예를 들어 모두 군문(軍門)으로 출두시켜 효수경중(梟首警衆)하라고 지시 했다.
이리하여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는 군문효수의 극형을 받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정하상과 유진길 조신철에게도 모반부도죄(謀叛不道罪)로 참형선고를 내렸다. 그들은 감옥에 한동안 수감된 뒤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당했다. 이 참혹한 일은 서세 동점의 시대에 조선 조정으로 서는 도끼로 제 발등 찍는 정도가 아니라 제목에 칼을 그은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앙베르 주교와 샤스텡, 모방 신부의 숭고한 이야기는 정하상 바오로와 유진길, 조신철의 이야기와 함께 당연히 나중에 다룬다.
“파란 눈의 세 분 불란서 신부님들은 늘 조선 옷을 입으셨고 조선말을 하셨고 가난한 신자들과 함께 꽁 보리밥을 잡수셨습니다.” 당시 신자들의 말이다.
참형은 이미 계속 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6월 10일에는 한성지역 신도 농부 이광렬(李光烈)과 여자교인 7명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됐고, 7월 26일에는 경기도 광주의 농부 박후재(朴厚載) 외 여자 교인 5명이 같은 장소에서 참형됐다. 이처럼 여자들이 많았다.
이지연의 후임으로 조인영이 우의정이 되면서 박해는 더욱 가열됐다. 조인영은 체포가 계속되고 순교 하겠다며 죽음을 불사하는 공적 처형이 민심에 영향 줄 것을 두려워 해, 서울의 옥중 교인들을 포도청이나 의금부 경내에서 교수형에 처하도록 조치 했다.
조정에서는 10월 18일에 조인영이 제진(製進)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서울과 지방에 돌려 박해의 종말을 예고했다. 남은 옥중 교인들의 집행을 서둘러 11월 24일에는 역시 평민 신도 지도자 최창흡(崔昌洽) 외 6명의 여자교인이 참형됐다. 조정은 옥중의 교인들을 가능한 한 감옥에서 교수 처리하게 했다. 이에 많은 신자들이 교수형을 받았다. 조정은 박해를 공공연하게 끝맺으려는 의도에서 12월 27일과 28일 양일에 걸쳐 박종원(朴宗源)·이문우(李文祐) 등 10명을 마지막으로 공개리에 참수형에 처했다.
기해박해는 그 어느 박해보다도 전국적인 것이었다. 교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추적되었고, 비록 투옥을 모면한 사람일지라도 가산과 전답을 버리고 피신해야만 했다. 박해는 강원도·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지에 골고루 미쳤으나, 가장 박해가 심하였던 곳은 경기도와 서울지역이었고, 또한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기에 따르면 참수되어 한양 지역에서만 순교한 사람이 54명이고, 그 밖에 옥에서 교수되어 죽고 장하(杖下)에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또한 6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또한, 일시에 배교했던 사람들도 다시 배교를 철회하고 순교한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배교하여 석방된 사람도 40∼50명이나 된다고 했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방법으로 천주교를 근절하려 한 대학살이었다. 그러나 그 박해의 배경에 있어서 신유년에는 정치적 원인에다 종교적 편견이 곁들여 있어, 다시 말해서 종교를 가식적으로 의탁한 정치적 보복이었다. 따라서 그때는 천주교 요인인 동시에 남인의 요인인 인물들이 많이 처형됐다.
그러나 기해년의 경우는 천주교인 중에 그 지위나 재력으로 보아, 반대파의 정치적 보복을 받을만한 그러한 인물은 이미 없었다. 물론, 정하상·유진길 같은 저명한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명문의 후예이기는 하지만 정하상은 세속적으로는 벼슬길과 멀어진 사람이었고 유진길도 비록 당상의 벼슬에는 있었으나 또한 역관에 불과했다. 조신철은 천민 이었다.
기해년의 박해기간이 신유년에 비하여 그렇게 길지 않았다는 점, 또는 신유년에는 황사영 백서의 영향으로 천주교인의 처단을 청하는 상소문이 그렇게도 많았던 반면, 기해년에는 그러한 상소문이 거의 없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도,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점점 옅어져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박해에 열을 올린 조씨 일파와 그 세도권에 있던 이지연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고관과 유생들이 조정의 조처에 거의 무관심하였거나 마지못해 따라 갔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해박해는 전적으로 정권에 의한 민중에 대한 본격적 박해 였던 것이다.
기해 박해는 1839년 기해년 힌해 동안 벌어졌지만 풍양 조씨가 우위에 선 세도정치는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들어설 때 까지 계속 되다가 다시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면서 조선 천주교는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기 까지 근 20여년 동안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신부가 순교한 병오년의 몇몇 희생 말고는 큰 변란 없이 얼음장 밑에서 강물이 흐르듯 내밀한 발전을 계속하게 된다. 박해 속에서 피어, 커져간 신앙이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