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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78)

안동일 작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날 세례식으로 조선땅에서 성명(聖名)이라 불리우는 세례명을 지닌 세례 천주인은 도합 7명이 되었다. 세례 받은 순서로 이들의 세레명을 살펴 보면  이승훈이 연경에서의 세례로 백다록(베드로)을 세례명으로 받았고 이벽이 세자 요안(세례자 요한),  권일신은 방제각 사물락,  이존창은 루도비 곤자 (루도비코 곤차가) 김범우는 도마(토마스) ,  홍낙민은 루가 (루카), 최창현은 요안 (요한)   정약용은 약망 (사도 요한)  정약전은 일단 ‘자산’으로 세례명을 정했다.  대개들 자신이 태어난 날이 축일로 수록돼 있는 성인을  주보 성인으로 정한 모양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당연히 생일은 음력으로 세었을 테니 성경광익, 성년광익, 성교절요 등 당시 교덕서에 나오는  양력과 차이가 있었음에도 그랬던 것 같다. 굳이 만세력을 동원해 이를 세세히 따졌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가톨릭 교도들에게 세례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권일신의 세례명 ‘방락’에 대해서는 몇차례 설명한 바 있고 이들의 세례명 가운데 특히 눈에 뜨이는 이름은 이존창의 루도비코다. 다른 이름 사도 요한이며 루카, 토마 등은 익숙한데 비해 루도비코는 그렇지 않다.  루도비코는 프랑스의 가톨릭 군주로 알려져 있는 루이 9세의 이름이기도 한데 그역시 성인으로 시성돼 있어 의외로 루도비코는 셰례명으로 자주 쓰인다.

 일본 나가사키 기리스도의 난에 희생된 12살의 어린 성인 이바라키의 세레명도 루도비코다. 일본의 26위 성인의 한사람으로 추앙 받는 그는 본래 체포시 제외되었지만 스스로 자청해 체포되었고 형장에 가서는 “내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일본 26위 성인은 1597년 2월 6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처형을 당한 26명의 초기 천주교 신자를 지칭한다.  이들은  처형된 지 265년 뒤인 1862년에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됐다. 이들은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과 비슷한 니시자카(西坂)에서 죽기를 원했고  지금은 순교성지가 돼 있다. 조선의 박해 2백여년 전인 일본의 천주교 박해도 만만치 않았다. 누군가 민주주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는데 가톨릭 기독교야 말로 신도들의 피를 먹고 성장 햇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루도비코에 곤차가가 붙으면 13세기 이탈리 북부의 곤차가 공국의 젊은 군주를 지칭한다. 그는 20대 초반에 선종 했는데 가톨릭 신앙에 철저했기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고 이교도들과의 전쟁에서 희생당했다고 전해져 있다. 크게 알려져 있지도 않은 그를 주보성인으로 했다는 것이 의외인데 아마도 축일 때문인 것으로 짐작 된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루도비코가 젊은이, 청년 전교의 성인이라는 점이다.  김대건 최양락 조선 최초의 정식 신부 두사람이  모두 루도비코 곤자가 이존창의 후손이라는 점이 이채를 띤다.  

 가톨릭 교단에 에서 성인으로 시성된 인물은 21세기 초반 현재 5천 5백명이 넘는다. 그 당시인 18세기 후반에도 족히 기천을 넘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성년 광익에는 3백 65명의 전기가 수록돼 있을 뿐이다. 성경광익에는 그보다 훨씬 적다. 그 선정에  저자들의 주관적 판단이 크게 작용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형식이 내용을 규제한다는 얘기는 여기에도 적용 되는데 셰례명과 신앙생활, 전교활동은 묘하게도 일치하는 상관관계가 매우 크다. 이승훈은 베드로 처럼 몇번이나  천주를 모른다고  했지만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이벽은 세레 요한처럼 천주의 가르침을 초기에 큰 소리로로 외치다 일찍 희생 됐다. 방지거 권일신이 하비에르 성인 처럼 전교의 화신이 되었던 것고 우연이 아닌듯 싶다. 세례명에도 성신의 뜻이 내재 된다는 얘기가 아닐까. 

 성인의 기념일, 이른바 축일은 대개 그 성인이 선종한 날인데, 성인이 지상에서 사망한 날은 곧 그 성인이 천상에서 태어난 날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가 태어난 날이 축일인 성인 이름을 세례명으로 따는 풍습이 생겼다. 

요즈음 가톨릭에서도 자신이 태어난 날이거나 그 근처가 축일인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하는 풍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라고 강요도 압박도 하지 않는다. 생일과 상관없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걸로 선택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해당 성인을 기념하는 성당이 지어진 날이거나 해당 성인의 유해를 모셔 온 날이 축일인 경우도 있다. 또한 성모 마리아처럼 아예 축일이 여러 개인 경우도 있다.

 정씨 심형제의 세례와 세레명에 관련 해서는 약종이 전날 세례를 받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되 있다고 해서 후일로 미룬 것을 위시해 얘기가 많은 편이다.  실제 약종은 2년 뒤인 1786년에야 세례를 받는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뒤늦게  세례받은 뒤의 그의 활약은 눈 부셨다. 형과 동생인 약전 약용 두 사람이 진심 이었건 위장 이었건 배교를 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 왔다갔다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면  약종은 초지 일관이었다.

 약종은 우리도 잘 아는 초기 교부 성 어거스틴을 주보성인으로 하는 아구스팅이라는 세례명을 받는데 세레명과 어울리게 초기의 방황을 끝내고 학문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이룬다. 최초의 한글 종합 교학서인 주교요지를 집필했고 총신도회 격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으로 무수한 전교를 행했다.   조선 천주교의 우뚝선 거봉 둘째 아들 정하상 바오로를 키워낸 것도 그의 공덕이고 천주의 은혜다. 정약종 그는 초기 천주교 성조, 천진암 강학 도반들 가운데 후일 교황청에 의해 잡음없이 시복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약전은 자신의 생일에 해당하는 날을 축일로 하는 마땅한 성인이 없었던듯 하다.  정약전은 그때 북경에 갈 예정이 있었던지 직접 북경에 가서 정식 세례를 받겠다며 이때 세례명을  받지 않고 그냥 ‘자산’ 이라는 자를 그냥 세례명으로 해서 이승훈으로 부터 대세를 받았다.

 이때 세례명을 받지 않은 것은 후일 탄압 국면에서 의금부에 끌려 갔을 때 자신은 천주학을 공부는 했지만 임금의  명에 따라 멀리 했다는 증거로 사용돼 목숨을 구하는 전거가 된다. 정약용의 경우에도 세례명 때문에 목숨을 구했다. 그의 세례명인 약망(若望)이 많은 기록들에 나오는데 너 아니냐는 심문관의 추궁에 자신과 같은 항렬의 친척 형제가 있는 모양인데 누군지는 모르겠다고 천연덕스럽게 시침을 뗐다는 기록이 확인 된다. 

  사실  정약전은 그날 이후 아우인 약종에게 열심으로 교리를 가르쳤고 약용 역시 형인 약종에게 신심을 불러 일으키려 갖은 애를 썼다. 이 결과 약종이 마침내 1786년 3월 아우구스티노로 영세하고, 장남인 철상과 셋째 부인(약종은 팔자가 그랬는지 부인 두명을 사별해 혼인을 세번이나 했다) 유소사에게 확고한 신앙을 전함으로써 기족 모두 모두 시성 시복되는 성가정을 이루게 됐던 것이다. 소사는 평민의 과부를 일컫는 말인데 유씨의 본명이 확실치 않아 대개들 그렇게 부른다. 정하상과 조동섬을 통해 전해진 유소사의 언문 신앙 일기에는 당시의 많은 애기들이 담겨져 있다.수표동  첫 세례식날 다 함께 기도를 올렸는데 그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고 하는 얘기도 거기 나온다. 

 수표동 통성기도는 정약전 등 4명의 세례식이 끝나고 통회와 각오와 기도 시간에 이루어졌다. 이날은 통회 기도를 세례식이 끝난 다음 모두 함께 올리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한사람씩 차례로 차분하게 올리던 기도가 나중에 모두 소리내 기도를 올리는 통성기도가 됐던 것이다.

세례식을 마치고 일동에게 파스카의 초를 나눠준 이승훈은 광암과 직암 옆 세번째 자리에 앉았다. 

광암이 먼저 기도를 시작했다. 그의 낭랑하고 우렁찬 목소리는 찌렁찌렁 대청을 울렸다. 모두들 무릎을 꿇고 두손을 모은채 눈을 감고 경청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천주님, 당신의 아들 야소 기리스도 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사람이 아니라 일곱 사람이 모였습니다. 우리 일곱 사람이외에 천주님과 그의 아들이 하께 계심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이땅에 천주의 거룩한 가르침이 전파 될 수 있도록 신명을 다할 서원을 세웠습니다. 끝까지 함계 게시어 우리의  행보를 지커봐 주십시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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