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판”·”위법” 공개비판…요인 방문 및 주요 일정도 무산·연기
2024년 벌어진 때아닌 계엄 사태 이후 ‘혈맹’ 미국의 발언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갑작스러운 계엄으로 인한 외교적 여파가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윤석열 대통령이 심야 계엄을 선포한 지난 3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앙골라를 방문 중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핵심 동맹국에서의 갑작스러운 계엄 소식은 즉각 바이든 대통령에게도 전해졌다.
순방에 동행한 기자단이 던진 한국의 계엄에 관한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세 문장의 짧은 대답을 내놓았다. “방금 브리핑을 받았다. 이제 브리핑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됐다. 기습적인 계엄 선포 이후 국회에는 여야 의원 190명이 신속히 모였다. 마침 예산 정국이라 상당수 의원이 수도권에 있었다. 일부는 경찰의 통제를 피하려 국회 담장을 넘었다.
계엄군은 헬기를 동원해 삼권분립의 한 축인 입법부 한복판에 병력을 투입했지만, 거리로 뛰어나온 시민과 진을 짜 대응하는 보좌진을 이길 수 없었다. 국회는 출석의원 만장일치로 계엄 해제를 요구했다.
계엄의 시계가 바쁘게 돌아가는 동안 혈맹인 미국 쪽에서는 “한국 정부와 연락하고 있다”,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등의 입장을 냈다. 그러나 행정부 내부는 상당히 당혹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혹감은 일련의 발언으로 표출됐다. 국방부와 국무부는 각각 대변인과 수석대변인을 통해 윤 대통령의 이번 계엄과 관련해 사전 통보를 받거나 협의한 적이 없었다고 명확히 밝혔다.
계엄 해제로 상황이 일단락된 이후에는 점차 의미심장한 발언도 이어졌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성명을 내고 정치적 이견(political disagreements)의 법치를 통한 평화로운 해결을 촉구했다.
국무부 이인자인 커트 캠벨 부장관도 법치주의를 통한 정치적 분쟁(political dispute)의 평화로운 해결을 강조했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이번 계엄 선포를 ‘정치’의 문제로 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나아가 불쾌감을 드러내는 듯한 발언도 있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공개행사에서 동맹인 한국의 계엄 사태와 관련해 “세계 다른 곳이 그랬듯 TV를 보고 알았다”라며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설리번 보좌관은 아울러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적절하게(proper) 작동하기를 바란다”라며 계엄이 “미국 정가를 비롯해 모든 곳에 경종을 울렸다”라고 했다. 나아가 이와 관련해 계속 목소리를 내겠다고 했다.
한반도에 2만8500명의 자국 병력을 둔 미국은 사전 협의 없이 이뤄진 이번 계엄 선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미국외교협회(CFR)은 이와 관련, 주한미군도 계엄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는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세계 무대에서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 구도를 강조하며 한미일 협력 강화를 도모해 온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대통령의 명령으로 21세기 한국 국회에 군대가 투입되는 모습을 심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CNN은 이번 계엄 사태 이후 윤 대통령을 “민주주의를 중단하려다 실패한, 아메리칸 파이를 부른 보수주의자”라며 “많은 이는 이번 주를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협 받았지만 끝내 살아남은 때로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세계를 놀라게 한 계엄 선포는 비록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미국 정계에서의 발언 수위는 갈수록 고조하는 모양새다. 특히 이번 계엄을 두고 직접적으로 ‘오판’이라거나 ‘위법하다’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국무부 2인자 캠벨 부장관이 공개행사에서 “윤 대통령이 심히 잘못된 판단을 했다(President Yoon badly misjudged)”라며 한국 국민이 “위법적 절차”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줄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국무부에 따르면 블링컨 장관의 경우 조태열 외교장관과 통화하며 “한국의 민주적 절차의 승리를 예상한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계엄 사태 이후 한국이 탄핵 정국에 접어든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같은 통화에서 블링컨 장관은 “미국 국민은 한국 국민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취지로도 발언했다. 미국 국민이 주어이기는 하지만, 연대·지지의 대상이 한국 정부가 아닌 국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와 관련, 외교부는 이날 양 장관이 “한미 동맹에 대한 미국의 흔들림 없는 지지를 재확인했다”라고 밝혔다. 국무부에서는 같은 날 “한국과의 관계, 동맹, 파트너십은 특정 대통령·정부를 초월한다”라는 발언이 나왔다.
일련의 발언은 계엄 사태가 한미 외교 관계에 미친 파장을 보여준다. 파장은 단지 발언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 양국 간 요인 방문이나 중요 협의·훈련 일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3일 심야 계엄 선포 이후 4~5일 미국에서 예정됐던 한미 핵협의그룹(NCG) 4차 회의와 제1차 NCG 도상연습(TTX) 등은 일제히 연기됐다. 모두 미국 정권교체 이후 순조로운 지속을 장담할 수 없는 사안들이다.
아울러 미국 국방부는 이날 로이드 오스틴 장관의 일본 방문을 발표했는데, 한국은 방문 국가로 언급되지 않았다. 미국 국방장관이 아시아를 순방하며 자국 최대 해외기지를 보유한 한국을 ‘패싱’하는 것이다.
전쟁과 양극화로 세계가 불안한 시기, 국회에 군을 투입하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를 시도한 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계엄 선포가 국내 정치권은 물론 한미 관계에서도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