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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69)

 안동일 작

” 천주의 가르침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신비요 계시입니다”

광암은 직암의 양근집에 이레 정도 머물면서 논의를 거듭했다. 녹암 형님과도 장시간 천주학에 대해 토론 했고 동섬과도 만나 그랬다.
세례와 삼위일체론에 대한 광암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제 우리는 운명에 따라, 천주의 뜻에 따라 천주의 길에 들어 섰습니다. 천주교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성격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새로운 생활의 기초가 되는 규칙도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이 오묘한 우주 천지가 우리 인간을 위해 창조 됐고 한치의 오차 없이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지요. 남북극이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는 알 수가 없지요. 그리고 천사와 악마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면하기 위한 천주 성자의 강세며, 선한이는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귀는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도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셰례는 두분 숙사님의 운명입니다.”

그럼에도 실제 동섬의 셰례는 스승 안정복 과의 관계 때문에 한참 뒤에 이루어지게 된다.

이어지는 광암의 삼위 일체론은 직암이 듣기에는 탁견이었다. 그 깐깐한 동섬도 종국에는 고개를 끄덕였었다.
결론적으로 광암은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명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하나님의 신비요 계시라고 했다

“야소 기리스도, 야소 지뚜(기독의 중국어 발음)를 뛰어난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만 본다면 천주 신앙은 유다의 야훼교와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그분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야 말로 천주 신앙의 요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인정 하지 않는 다면 왜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 하고 그를 종국의 구원자로 여겨야 하는지 모호하게 됩니다. 야소는 천주 자신이기도 합니다. 천주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나퉈 야소로 현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야소가 천주에게 기도를 올렸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자기가 자기한테 기도를 했다? 그런말이 되는 것 아닌가?”   동섬이 물었다.

“우리들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그러셨던 것으로 저는 이해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천주의 오묘한 가르침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고 설명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하나님의 신비요 계시입니다. 삼위일체론이야 말로 그렇습니다. 인간 이면서 신이라는 라는 이율배반을 천주인 들은 진심으로 믿어야 만 합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초기에 동섬 형님 같은 의문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지만 진작에 정리 되고 확립된 사안으로 알고 있습니다. “

삼위 일체 논쟁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야소의 신격에 대한 논쟁이다. 야소를 인간으로 보아야 할것인지 아니면 신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다. 초기 기독교 전인들은 광암의 말대로 야소를 신이면서 인간이기도 한 절묘한 존재로 정립하고 여기서 성령(성신)으로 세상에 늘 현현 한다고 결론 지웠는데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론이다.

광암이 이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에 대해 얼마만큼 읽었고 이해 하고 있었는지 확인 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말대로 단박에 쉽게 정리되고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 연원과 갈등의 역사는 지난하다.

4세기 초엽인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기독교를 인정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밀라노 칙령이 발표되면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의 호의 아래서 세력을 점점 키워나갔다. 기독교인들은 빼앗겼던 시민권을 되찾고, 몰수당했던 교회의 재산을 되찾고, 돌려받은 재산으로 많은 예배당을 세웠다. 교회가 로마의 다신교를 완전 배척 하기 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 하면서 흡수 통합한 것이 이 무렵이다. 이는 나중에 큰 분래의 소지가 되기도 하지만.
교리적인 체계가 바로 세워지지 않았던  기독교(당시는 단일 천주교) 교회 안에는  갈등과 내분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로마 신앙의 수용 여부 정도를 놓고도 논쟁이 치열 했지만  교회내의 매우 중요한 사안인  삼위 일체 논쟁이 그 대표적인 분쟁이었다.

당시 로마 보다 더 번성했던 비잔틴 지역인 이집트의 최대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지역에서 신망있는 원로 사제이자 교부였던 아리우스(Arius)가 “성자는 성부보다 낮은 ‘이질’(異質)’ 이라는 종래 교회내에서 간헐적을 제기되던  주장을 정립해 확산 시키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교부(敎父)는 말그대로 ‘교회의 아버지’란 뜻을 지니고 있다.  2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학자 사제들을  일컫는다.  아리우스 교부는  성자, 예수 역시 성부의 피조물로 성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주장을 쉽게 정리하자면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데, 예수님도 하나님이면 다신교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말이었다.

이 주장을 ‘아리우스주의’라고 부른다. 아리우스주의는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쉬웠기에 급속히 번져나갔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주장대로라면, 성자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알렉산드리아 아리우스 파가  본격적 마리아 신앙의 발원지로 꼽히게 된다는 점이다.  비판론자들은  이집트의 현모양처 여신 ‘아시스’ 때문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 지역 주교이자 교부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성자와 성부는 완전히 ‘동질’(同質)이라면서 성부와 성자 모두 하나님으로, 한 하나님께 두 개의 위격(persona)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즉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 유일신 신앙에 어긋나지도 않고, 한 분께 두 위격이 있는 것이므로 성부 성자 모두 하나님이라 해도 모순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이 논쟁은 기독교가 전파 돼 있는 세계 각지에서 벌어졌다. 그 결과 세속의 일과 교회의 일을 모두 관장했던 최고 권력자( 폰티펙스 막시무스, 후일 교황)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주선으로 그 유명한 니케아 회의가 열리게 된다.
황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교회 감독들이 회의에 참석하기 원했다. 그래서 아프리카, 시리아, 폐르시아, 소아시야,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멀리는 스페인까지 총 318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동방 지역 교회)의 주교들이었다. 당시 교회는 비잔틴의 헬레니즘 세력이 로마의 라틴 세력 보다 훨씬 강했다. 공의라 불리우는 회의는 325년 5월 20일 시작돼 2개월이 지난 7월 25일까지 계속 됐다.

이 초유의 기독교 대 집회였던 회의는 당초 이질론이 다수로 우세 했으나 격론 끝에 그 무렵 최고의 성가를 인정 받던 예루살렘 지역의 주교 이자 교부인 유세비우스(Eusebius, 263-339)의 마지막 회심과 결단으로 ‘동질’(同質)이라는 주장이 교리적으로 맞는다고 확인돼 이 내용을 담은 ‘니케아 신조’가 작성됐다. 사도신조의 원형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아리우스파는 쉽게 승복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 다르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고집 했기에 교회 내에서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후 그의 아들이 새 황제로 등극하면서 아리우스파의 손을 들어 줘 다시 아타나시우스파가 추방되고 박해되는 일 까지 벌어진다. 두 세력은 이같이  조선의 당파  싸움처럼 엎치락 뒤치락 하다가 451년 니케아 근처의 칼케톤(Chalcedon)에서 열린 제3차공의에서 최종 결론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약 600여 명의 교회 감독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칼케톤 회의에서 감독 주교 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神性)의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성(人性)을 가진 참 ‘사람의 아들’로 교회가 신앙할 것을 다시금 의결했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성품은 혼돈이 없고 변함이 없고 분리가 없고 불화가 없는 것으로 두 성품을 가졌지만 한 위격이라는 것을 확인 한 것이다. 당시에도 감독들과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면 근본주의로 흐르기 쉽고 사람으로만 생각한다면 세속주의로 흐르기 쉽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 논쟁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부터 시작돼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126년 만에 끝났다.   칼케톤 공의회가 확정한 삼위일체 교리는 이후 기독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고백으로 받아 들여져 이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그것이 기독교 2천년 교회 역사의 근간이 되었다.

후일 가톨릭을 박차고 나간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삼위일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도 삼위 일체론은 이해하기보다 믿어야 할 하나님의 신비요 계시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는 사색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것이었다.

강생구속(降生救贖) 문제에 있어서도 광암의 논리는 정연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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