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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67)

 안동일 작

“탄압이 있을 텐데 어떻게 하겠는가?”

승훈은 아직 그 경문을 다 외우지는 못했는지 적어온 종이를 보면서 읽었다.
사도신조 처럼 한자어로 외운 다음 우리말로 다시 읽었다.
“성총을 가득히 입으신 마리아여. 네게 하례하나이다. 주 너와 한가지로 계시니, 여인 중에 너 총복을 받으시며, 네 복중에 나신 예수 또한 총복을 받아 계시도소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는,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아멘.”

언뜻 듣기에도 꽤 잘된 우리말 번역 이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에 직암에게는 종이에 적혀 있는 한자와 언문이 다 보였다.
한자와 언문 경문  밑에는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한문과 언문으로 함께 적은 글이 있었다. 아마도 나전어의 음가를 적은 것이지 싶었다. 하지만 승훈은 거기까지는 읽지 않았다.
승훈은 한 손으로는 종이를 펴서 누르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매괴를 만졌다.
일동은 지긋이 승훈의 낭랑한 낭독을 들었다. 승훈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불가에서 반야심경 외우는것과 비슷 하군요.”
누군가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중국에서 전교 하려다보니 토속 전통을 무시할 수 없었었겠지요.”
“그 성모송이라는 것이 그렇게 신심을 크게 불러 온다면서요?”  누군가 아는척 한마디 했고 “ 그렇다는 군요.” 누군가 호응했다.

그때 따지기 좋아하는 유항검이 나섰다.
“ 하지만 하느님이 자신 이외의,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야소야 당신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없겠지만 마리아님은 우상에 해당하는 것 아닙니까?
“마리아님이 보통의 인간입니까? 야소를 낳으신 분인데…”  누군가 그렇게 응대 했고 그때 승훈이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저도 연경에서 신부님께 여쭤 봤는데 마리아님은 섬기는 것이 아니라 존숭하고 받드는 분으로 이 기도는 천주께 함께 빌어 달라는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은 천주님 밖에 없다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 천주교에서는 성인들의 통공을 믿기에 성인 중의 으뜸인 마리아님에게 천주께 함께 빌어 달라는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아버지께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을 어머니께 말하는 이치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더러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마리아를 섬기는 문제는 가톨릭의 큰 논쟁거리의 하나였다. 통공은 기도가 서로 통하는 것을 의미했다.

승훈은 다시 성모송 매괴 독경의 방법을 시범 보였다. 성모송을 열번 외우고 난 다음에는 천주경을 한번 외운다고 했다. 천주경은 대부분 강학 성원들이 외우다 시피 하는 경문이었다.
“재천아등부자,아등원이명현성。이국림격。이지승항어지,여어천언。아등망이,금일여아,아일용량이면아채,여아역면부아채자。우불아허함어유감。내구아어흉악。아문。
“묵주 한 알을 굴리며 성모송과 천주경을 한 번 바칩니다. 성모송 10번과 천주경 한번이 묵주기도 1단(端)입니다.”
모두들 승훈이 하는대로 매괴를 오른손에 쥐고 한알씩 돌려보았다. 직암은 불가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한번씩 명호할 때마다 한알씩 돌리는것 같은데 싶으면서 천주학의 묵주기도는 한알 돌리는데 꽤 시간이  오래 걸리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런 기도를 최소한 10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승훈은 이 묵주기도를 바치기 시작한 것은 초대교회 라마제국(羅馬帝國)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그 유래를 간략히 설명했다. 신자들이 ‘골로시암  광장’에 끌려가 사자밥이 되던 박해 시절, 끌려가는 신자 머리에 장미꽃 관을 씌웠는데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이 순교자 시신을 몰래 거둬 그들이 썼던 장미꽃 관을 한데 모아놓고 꽃송이 한송이 마다에 기도를 한 가지씩 바쳤다는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천주교가 초기에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모두들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아무튼 이날 매괴와 성모송 독송으로 좌중은  천주교 신앙에 한발 깊숙히 담그기 시작 했다.

그때 저쪽에서 홍낙민이 나섰다.
“그럴께 아니라 우리도 이 진사를 통해 빨리 세례를 받도록 합시다.”
평소 조용하던 연장자 홍낙민의 말이기에 모두들 그를 쳐다보며 경청했다.

홍낙민은 1751년 생으로 죄중에서는 직암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날도 굳이 끝쪽에 자리 하고 있었다. 그는 순암 안정복에 이어 남인 소장학자로서 가장 높은 성가를 인정받는 농은 홍유한의 조카이기도 했다. 사실  홍유한이야 말로 조산땅 최초의 본격 천주교 신자라고 할 만 했다. 홍유한은 1726년 서울 태생으로 16세 때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 공부 했는데 1750년경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직방외기(職方外紀)」등을 접했는데 이 책들에 큰  감명을 받아  충청도 예산으로 내려가 칩거하면서 천주학을 더욱 깊이 연구하는 한편 자신의 호를 농은이라고 지어 이후 18년 동안 조용하게 수계생활을 했다.
1775년에는 수계생활에 더욱 적합한 곳을 찾아 내려가 소백산 아래 순흥 고을 동쪽 십리에 있는 배나무실 산촌에 머물면서  전심전력으로 칠극에 의한 수계생활을 하는 한편,  뜻있는 학자들과 서로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때 녹암 권철신과 직암이 그를 여러차례 찾아가 교류했고 실학 공동체를 구상하기도 했었다. 녹암의 선배 농은의 금욕과 절제, 소식 습관이 너무도 과해 건강을 해칠지 모른다는 우려를 여러차례 호소 하기도 했다.   홍유한의 수계생활은 천진암보다 훨씬 앞선 것으로 그는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한국교회의 최초의 수덕자라는 표현을 받게 된다.

어려서 부터 이런 숙부의  큰 영향을 받은 친 조카 답게 홍낙민은 수계 생활에 열심이었다. 천진함 강학에는 다른 이 들 보다 조금 늦게 참여 했지만 그의 천주교 이해는 누구보다 깊고 넓었다.
“전거에 따르면 천주학 세례는 대세라 하여 세례를 받은 신다라면 누구나 행할 수 있다고 합디다. ”

좌중이 술렁였다.

“그렇 수 있습니까? 그거 다행입니다.”
“그래도 세례는 더 신중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것 보다는 힘있는 서양인 탁덕을 모시는 일이 화급한 일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힘있는 탁덕이 군주와 담판을 했기에 천주학이 정착 할 수 있었지요.”

“세례라면 정말 신자가 된다는 표식인데 저로서는 아직 자신있게 준비가 돼 있지 얺습니다. ”

“그래요 나도 그래요.”

이런 좌중에게 낙민은 준비가 끝나기를 바란다면 부지 하세월 일 것이라면서 회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언재 부터인지 기존의 모든 생활 태도를 불식하고 새출발하는 회개가 중요하다고 역설하곤 했다.

“준비가 안됐다고 하는 것은 회개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때 광암이 나섰다.

“낙민 형님의 말씀도 참으로 일리가 있지만 이 셰례 받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 차차 형제님들 모두와 얘기하도록 합시다.”
광암은. 낙민을 형님이라 부르고 있었고 좌중을 형제라 했다.

“그래요,  골치 아픈 얘기 나중에 하도록 하고 기쁜 날 한잔 합시다.”
골치 아프다는 표현이 다소 걸리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이 말에 모두들 수긍했다.
“그럽시다”

그날 명례방 김범우 형제의 집 술은 달았고 안주는 썩 입에 맞았다. 저마다 흥에 겨워 재주를 선보였다.
이벽과 약전은 일필 휘지로 휘호를 썼고 창현과 인길은 멋진 대나무를 그려냈고 항검이 국화와 난초를 쳤다. 이날의 압권은 항검의 남도 창과 존창의 동물춤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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