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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65)

 안동일 작

“탄압이 있을 텐데 어떻게 하겠는가?”

직암 권일신 하비에르의 빼어난 전교 활동에 대해 얘기하다 어쩌다 보니 관천 최창현의 희생까지 언급하게 됐는데 초기 성도들 가운데 희생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더러는 후일  그 희생이 순교로 인정 받아 시성되기도 했지만 대개는 한때 배교의사를 보였다 해서 시성되지 못했다.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 5대 성조로 추앙받고 있는 이 가운데 성인으로 추대된 이는 정약종 아구스티노 뿐이다.

이벽의 경우 죽음이 신앙을 지키려다 희생된 순교인지 불확실하고 이승훈과 권일신은 배교를 했다고 추정되기에 그렇고 권철신은 공적이 크지 않고 죽음의 순간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이에 반해 정약종은 세례 이후 한번도 흔들임 없이 신앙에 매진했고 죽음의 순간도 의연했기에 논란없이 시성됐다.

하지만 후일 더 살펴 보겠지만 정약종의 경우 초발심이 다른 이 보다 아주 어려웠다.
강학에는 열심히 참여 했지만 확신이 들지 않는다 하여 세례는 받지 않았다. 그가 세례를 받은 시기는 1786년 직암이 용문사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명례방 사건 때도 약용 약전등  형제들은 이승훈에 의해 세례를 받았던 상태였지만 약종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약종은 이벽의 일견 교조적인 태도와 천주관에 적지않은 불만을 직암에게 토로 하기도 했었다.
약종에 대한 세례는 그를 설득하고 끝내 감화시켰던 직암이 직접 행했다. 그때 이승훈은 배교문을 지어 공표한 상태였기에 대세 집례를 사양 했다. 이 부분은 조동섬과 정하상 이야기 때 다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아무튼 사람을 낚아 신명을 바치게 하는 신앙의 어부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무렵 강학 일동 중에는 홍낙민과 최인길 같이 스스로 알아서 적극적인 천주교인 으로서의 신앙 태도와 생활 규칙을 보인 이도 있지만 약종이나 항검 관천 처럼 직암이 나서 궁리를 다한 전교를 해야 했던 이들이  많았고, 실제 이렇게 공들인 이들이 후일 아주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형식이 내용을 규제한다고 조직 건설의 마중믈이 될 정식  세례자 한 사람이 아쉬운 형국이었다. 세례는 천주교로 들어가는 확실한 문 이었기 때문이다.  직암과 광암등은 이를 너무도 잘알고 있었다.

1783년 초가을, 직암은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李東郁) 대감이 동지 연행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정해졌고 올해는 사정관 까지 자제군관을 동행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출사하고 있는 이가환으로 부터 였다.
소식을 들은 직암은 다음날 아침 인근의 수표교 이벽의 집으로 갔다. 그때 직암은 인사동 매재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숙사께서 왠일 이십니까? 이 새벽에”
“여보게 덕조, 하늘이 진정으로 우리를 도우심 일세.”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만천의 부친이 동지사로 연경에 가시게 됐다네, 서장관으로 낙점 되셨다는데 더구나 올해는 서장관도 자제군관을 동행할 수 있다고 하네”
그쯤이면 덕조도 알아 들었다. 진작부터 천진암 동학들은 누구라도 연경에 가서 천주성당을 찾아야 한다고 논의 했던 터였다.
“그런데 만천이 적임일까요?”
“나는 그가 가장 적임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만천은 너무 재주가 승해서 진득한 면이 없이 경하지 않습니까? 재승박덕이라고 할까요”
“자네도 그렇게 보고 있기는 하는구먼, 오히려 그래서 제격이 아닐까 싶네만…”
“만천 보다는 관천 창현이 더 어울리는게 아닙니까?”
“하지만 관천은 자제군관이 될수 없지 않은가?”

“역관으로 선출되는 방안이 없을 까요?”

“역관 임직은 벌써 정해진 모양이고 또 역관으로 가게 되면 행동의 제약이 많이 따르지 않겠는가. 그에 바하면 자제 군관이야 행동이 훨신 용이하디고 하지 않던가.”
고개를 끄덕인 광암은 그길로 이승훈에게 달려 갔고 그를 설득했다.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아도 승훈 스스로도 연경에 가고 싶은 바 였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만천의 연경행은 급믈살을 타게 된다.

만천이 도반들의  환송을 받으며 두둑한 전별금을 품에 안고 북경행에 오른 것은 1783년 가을의 일 이었다. 그해 연행사 일행은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
연행사란 북경의 또다른 지명인 연경에 가는 사신이라는 의미로 부연사라고도 불렸다.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을 포함한 30명의 정관(正官) 외에도 200∼300명의 인원이 동원됐다. 한양 → 의주 → 압록강 → 봉황성 → 요동 → 심양 → 산해관 → 통주 → 북경으로 대략 3천여 리 이어지는 5개월 내외의 긴 여정이었다.
북경에 도착하면 약 60일까지 체류할 수 있었다. 공적인 업무를 마치면  중국 학자들과 교류하고, 서점과 역사적 명소를 관광했고, 성당에서 선교사를 만나 서양의 과학과 문물을 접할 수 도 있었다.

이승훈은 1756년 서울 반석방 남인가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동욱이 영조의 탕평책으로 문과에 급제, 벼슬살이를 시작할 때였다. 어머니 여주 이씨는 실학자 이익의 조카인 이용휴의 딸 이었고 이가환의 누나였다. 가환이 승훈의 외삼촌이다.  그는 일찍부터 서학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천문학과 기하학에 정통한 외삼촌 가환의 영향을 받아 수학에도 조예가 꽤 깊었다.
이승훈이 20세 되던 해 나주 정씨와 혼인하면서 서학과의 인연은 더욱 튼튼해 졌다. 처남인 정약전·정약종·정약용은 물론 이들의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  그리고 이들의  조카사위인 황사영 등 열혈 신서파와 혈연으로  엮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학 공부는 실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매제인 신동 정약용과  천주학에 대해 담소를 겸한 토론을 하는 모습을 직암도 몇 차레나 목도했다.

연경에 도착해 급한 용무를 마치자 마자 승훈이 먼저 찾은 곳은 사신단 일행의 숙소와 가까운 남당 이었다. 당시 북경에는 남당, 동당, 북당, 서당 등 4개의 천주당이 있었다. 남당이 가장 먼저 생긴 주교좌 성당이었다.
마테오 리치를 선두로 중국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당연히  수도인 북경을 천주교 전파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들은 북경에 들어와 자명종, 세계지도, 혼천의 등으로 중국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초기에 그들은 자니해서 천문을 다루는 흠천감에서 일하면서 황실의 환심을 샀고 황실의 후원으로 성당을 건립했다. 명나라 말기 북경에 남당(南堂)이 세워진 이후 청나라 시대에 들어 동당(東堂), 북당(北堂), 서당(西堂)이 차례로 창건됐다.

승훈이 먼저 찾은 남당의 포르투갈 신부들은 천주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그를 반색하며 포옹해 주고 어깨를 두드려 주기는 했지만 세례를 받을 수 있냐는 요청에는 난색을 표했다. 실은 짐작하고 있었던 바였다. 그곳 신부들은 세례를 받으려면 1년 이상의 신자 수업과 수련을 거쳐야 한다고 애기했다.
풀이 죽어 성당을 나오려는데 그런데 그 중 한 신부가 승훈과 통역하는 역관을 불러 세웠다.

“북당으로 가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를 만나 보라”는 귀뜸 이었다.

그래서 승운은 며칠 뒤 북당을 찾았다.
당시 남당과 동당에는 주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이 있었고, 북당에는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있다가, 예수회에 대한 해산명령이 나오면서 주임 신부며 운영진이 같은 프랑스 출신 이지만 라자로회 출신들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래도  예수회 선교사들이 여럿 머물러 있었다. 그라몽 신부도 그 중 하나였다. 그라몽 신부는 그중 가장 연장자였다.
그날 그라몽 신부는 성모상으로 까치가 날라 드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첫 눈에 서로에게 강한 끌림과 호감을 느꼈다. 첫날에는 역관 김인문을 대동했었다.

“신부님, 조선에서 온 이승훈 입니다. 천주님의 품에 들고 싶습니다.”
“천주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이승훈은 사도신조를 외웠다. 물론 한자를 조선말로 읽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예수회의 맹장 그라몽 신부는 알아 들었고 흡족해 했다.
급물살 처럼 번져가는 개신교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수회. 그 예수회는 엄청난 일을 했지만 당시 로서는 10년 쯤 전인 1773년 해신 명령을 받아야 했다. 당시의 예수회 해산 명령에 대하여 여러 얘기가 있는데 어떤 이들은 “교회의 간섭에서 벗어나 절대왕권을 확립하려는 18세기 유럽의 군주들에게 국경을 초월한 활동을 펼치는 예수회가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자단체 총장에게만 순명하는 것이 위협으로 비친 것이 원인 이었다”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예수회가 왕실과 사회 고위층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면서 권력을 탐하고 교만해진 때문” 이라고 했다.

아무튼 보다 실용적이었고 융톤성이 있었던  이들을 이승훈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천우신조라고 할 수 있다. 어찌보면 불행의 씨앗 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라몽 신부는 중국 이름을 양동재(梁棟材)로 했다.  1736년 생인 그는 1750년 예수회에 입회했고 1768년 중국 선교사로 파견되어 북경에 머물면서 그역시 처음에 흠천감에서 종사했고 북당의 주임신부로 봉직했다. 1773년 예수회가 해산 명령을 받은 후에도 북당에 머물면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몬시뇰 급의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라몽 신부는 스무날 쯤 승훈을 매일 성당으로 오게 했고 천주학 수업을 겸한 면담을 진행 했다.

1984년  2월 22일 (양력),  이승훈 베드로의 역사적인 세례식은 상대적으로 조촐 하게 진행됐다. 역시  예수회 일을 돕던 중국인 신자가 급조된  대부역을 맡았다. 집전자 그라몽 신부는 승훈에게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으로 베드로 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그라몽 신부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는 이유로 이듬해 부임해 온 남당의 주교신부에게 처벌을 받아 85년 마카오로 쫒겨 가기 까지 했다가 1790년 북경으로 귀환했는데 꽤 오래 살아 1812년 북경 북당에서 선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라몽 신부는 예수회 본부에 보낸 서찰에서 이승훈 세례 당시를  이렇게 전했다.

“성세를 주기 전에 많은 문제를 물어보자 승훈 청년은 모두 잘 대답하였습니다. 천지창조와 종말, 천체의 움직임, 영혼육신의 결합, 강생 구속과 천당과 지옥의 상선벌악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라몽 신부와 이승훈은 주로 필담으로 대화 했다.

“탄압이 있을 텐데 어떻게 하겠는가?”
“ 배교강요에는 모든 형벌과 죽음도 감수하겠습니다. “

이 부분에 대한 그라몽 몬시뇰의 반응과 승훈에 대한 당부는 후일 다루도록 한다. 사람들이 모르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조선에는 축첩제도가 횡행 한다지?”

의외로 이부분이 강조됐다.

‘’예, 하지만 저는 여러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도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신자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고향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공명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시골로 물러가서 영혼 구령에만 전력 하고자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적극적 선교자의 활동으로 바뀐다.
“그리고 해마다 소식을 전하겠습니다”고 약속했다.

이승훈은 후일 큰 문제가 되는 제사금령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제사 금령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사람은  1785년에 북경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온 구베아 주교였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의 프란치스코 회원으로서 수학 박사이기도 했다. 이 부분도 의외의 사연이 많다.

이승훈은 1784년 3월(음력)에 여러 성물과 서책들을 잔뜩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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