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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61)

안동일 작 

“기리에 엘레이손 (자비를 베푸소서)”   

하지만 이날의 감격적인 을묘년 조선땅 최초의 부활절 미사는 그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그 결과로도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한 밀고자의 밀고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지고 주문모 신부는 피신했지만 성소를 제공한 집주인 최인길과 신부 초빙의 일등공신 윤유일과 그를 도왔던 역관출신 지황이 체포돼 끝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1795년 을묘년에 일어난 박해라고 해서 ‘을묘박해’라고 부른다.

모든 희생이 안타깝지만 윤유일의 희생은 더욱 그랬다. 윤유일은 당시로서는 조선 땅에서 가장 확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북경의 정식 사제들로 부터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았고, 성체성사와 고해성사 까지 마친 이름처럼 유일한 인물이었다.  당시 조선인 초기 교우들은 최초 세레자인 만천 이승훈으로 부터 대세를 받아야 했고 나머지 성사들도 임시직이었던 가성직 신부들로 부터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견진성사는 가톨릭의 7성사 중의 하나로, 세례성사를 받고 난 사람이 신앙을 확고히 했음을 증명하는 ‘종교적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성사다.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들만이 세례성사 때 신앙적 후견인으로 함께 하는 대부의 역할과 교회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게 돼있다. 이런 견진성사를 윤유일은 북경의 완고한 주교 구베아 신부로 부터 직접 받은 이다.
윤유일이 직암의 천거에 의해 조선 초기교단에서 북경에 파견된 밀사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의 품성과 천주교 지식, 신앙태도, 또  독학으로 연마한 중국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유일을 북경에 밀사로 파견 한 것은 당시 가성 주교 직암 권일신의 결단 이었고 성실한 윤유일이 이 위험스런 일을 기꺼이 이를 수락해 성사된 일 이었다.  윤유일은 경기도 여주 출생이었지만 어린시절 인근인 양근 한강포로 이사 와 권일신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일신과 철신 아래서 학문을 닦았다. 당시 권씨 가의 서당으로 쓰이는 행랑채며 별채에 상주하는 학동 유생들이 꽤 있었지만 아침부터 서당을 찾아 마당을 쓸고 마루를 닦는 유생은 유일이었다. 겸손한 유일은 양반 테를 전혀 내지 않았다. 학문에도 큰 총기가 있었음에도 빈한한 자신 가계를 일구기 위해 과거대신 역관 시험을 보겠다고 중국어 공부에 열중인 것을 직암도 알고 있었다.

“유일이 자네는 왜 사는가?”
어느날 새벽 열심히 마루를 닦고 있는 유일에게 직암이 물었다. 천진암 강학이 막 시작돼 물이 올라 있던 무렵이었다.
“저도 모르게 태어 났고 아직 안 죽었기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그려. 숙사”
유일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허어 자네도 그런 농담을 할 줄 아는가”
“예 농 이구요, 사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인생이 바람직한 인생인지 아직 영문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스승님과 숙사의 가름침을 받으려 할 밖에요…”
“자네 요즘에 내가 서학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 알고 있지?”
“예, 저번에 말씀 하셨지요.”
“이책 한번 읽어보려나, 자네에겐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바 이겠지만…”
이때 직암이 유일에게 건넨 책이 칠극 이었다.
유일의 천주학 공부는 이렇게 시작 되었다.
디른 이들은 책을 건네면 무슨 질문들과 의문이 그리 많은지 토를 달고는 했지만 유일은 그렇지 않았다. 해면처럼 천주학을 빨아 들였다. 성교요지를 건냈을 때도 천주강생을 건냈을 때도 그랬다. 얼마 뒤 천진암에 함께 갔을 때도 유일은 발치에 앉아 조용히 강학에 열심이었고 아침저녁으로 강학 요사채를 쓸고 닦는 일을 도맡았다.
그런데 그는 세례에 대해서는 남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듯 했다. 만천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직암을 비롯해 강학 도반들이 거의 모두 대세를 받았을 때 그에게도 세례를 권했지만 아직은 공부가 부족 하다면서 한사코 사양하곤 했다. 예비신자로 열성을 다하겠다는 것이었다.
한참 후 명례방 모임 적발 사건 때 형조에 항의하러 직암이 나섰을때 치도곤을 각오하면서 따라나선 이가 유일이었다. 정작 유일은 그날 집안에 일이있어 모임에 참석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1789년 12월 (양력 1790년 1월 30일) 조선에서 온 선비 하나가 북경의 북당(北堂)을 찾았다. 북당은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를 받았던 성당이다.
선비는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던 그라몽 (梁棟材) 신부를 만나기 위해 북당으로 갔지만 그라몽 신부는 이미 북경을 떠났고 조선에서 온 선비를 맞은 사람은 북당의 새로운 책임자 로(N.J. Raux, 羅廣祥) 신부였다.
북당을 찾았던 선비가 바로 윤유일 이었다. 임시주교 권일신 등 지도부가 그를 밀사로 북경에 파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에 천주교회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조선천주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태생적으로 두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는 천주교 신앙생활에서 가장 핵심적 요소인 미사와 성사(聖事) 등을 집전할 성직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왕정 체제에서 천주교를 자유스럽게 믿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왕이나 정치권력과 어떤 형태로든 대화가 있어야 했는데 그 창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직암 등 지도부가 파악 하기에도 일본이나 중국 모두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정치지도자와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조선에는 선교사들이 직접 오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천주교회는 그런 대화의 창구를 원천적으로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태생적 문제들을 단번에 풀기 위해서는 수학자 선교사나 의사, 화가 선교사 등 서양학문에 조예가 있는 서양 선교사를 조선에 영입하는 것이 필요했다. 선교사가 오면 당연히 성사나 미사 집전은 가능한 것이고 조선의 왕이 유럽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왕과 교섭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윤유일이라는 인물의 선정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윤유일은 권일신이며 지도부의 뜻을 모아 문장가 정약용이 쓴 편지를 옷 속에 품은 채  북경에 도착했다. 그는 은자 20냥을 들여 동지사 일행의 마부 자리를 사서 사신 일행에 끼어 갖은 고생을 하며 따라갔다.
로 신부를 만난 윤유일은 조선 천주교의 편지를 건네고는  중국어로 자세한 설명을 했다. 그의 사연을 들은 로신부는 눈물을 흘렸다. 특히 김범우의 희생과 이벽의 죽음의 사정을 들을 때 로신부는 성호를 몇번이나 그었다.

로 신부의 감격적인 환대를 받은 유일은 그곳 성당에서 며칠 지내며 평소의 태도를 그대로 보였고 그 결과 북경의 선교사들의 큰 감동을 받아냈고 튼실한 공감대를 형상하게 했다. 북경 교구가 조선에 선교사를 즉각 파견하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후에 여러  이유로 서양 선교사가 중국인 선교사로 바뀌었지만 윤유일은 자신이 북경에 온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당시 로 신부는 교황청에 보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에서 온 이 밀사가 도착하였을 때 그가 보여준 겸손한 태도와 너무도 깊은 신심을 보고, 또한 그가 천주교에 대해 대단히 많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저희 북당의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북경에 있는 네 성당의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자들 모두가 너무도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고지식과 완고의 대명사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로 신부가 윤유일에게 조건부로 세례성사를 베풀어 주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주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윤유일에게 견진성사까지 주었다.
이렇게 해서  윤유일은 조선천주교 신자로서는 처음으로 세례와 견진 성사를 포함해 네 가지 성사를 받은 초기교회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윤유일의 세례식은 그해 2월 5일(양)에 있었다. 구베아 주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세례는 화려하게 진행되었으며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사드렸답니다. 저는 같은 날 그에게 견진성사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깊이 통회하는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받았으며 천사와 같은 열정으로 성체성사를 모셨습니다. 북경의 수많은 천주교 사제와 신자들은 윤 바오로가 신입 교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복음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완숙한 경지에 이른 오래된 천주교 신자들한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결코 평범하지 않은 모습과 언행 그리고 덕스런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모두들 쏟아지는 눈물을 억제하지를 못했습니다.”

북당의 부책임자인 길랭(J.J., Ghislain) 신부는 윤유일이 세례를 받고 난 다음 미사에 참여했을 때 역시 대단히 큰 감동을 받아 이렇게 쓰고 있다.
“저희들은 그 조선 신자들의 대표에게 세례를 준 후 대 미사에 참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얼마나 하느님께 몰입해 있었던지, 만일 제가 여러 차례 그에게 제대를 좀 바라보라고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제 생각에 아마도 그 사람은 제대에 서 있는 사제는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성당 문을 나섰을 것입니다 … 저는 그가 깊이 기도하는 모습과 교회에 대한 열정을 보고는 정말이지 눈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길랭 신부는 고향에 있는 자기 가족에게 이런 편지까지 보냈다.
“우리 가족들도 그 젊은이가 보여주었던 정신을 배워 누가 뭐라고 빈정대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심지어 길랭 신부는 자신이 직접 조선에 가겠다고 자원하기도 했다. 비록 길랭 신부가 조선에 올 수는 없었지만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선에 선교사들을 보낼 수 있기를  염원했고 그래서 로 신부를 비롯한 북당의 신부들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전구를 청하는 9일 기도’를 하기까지 했다.  ‘키리에 일레이손’ (계속)

*위 사진,  윤유일 등 당시 순교자를 기리는 경기도 이천의 어농성지, 윤유일이 그때 가져온 포도 묘목이 대를 이어 자라고 있는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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