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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57)

안동일 작

 전장의 예수,  교회의 예수,  매카시의 예수

   1930년이면, 17살의 카트라이트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였다. 뉴욕의 가두시위며 그 무렵 공산당이 중심이 된 거리 투쟁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전해 지고 있었기에 카트라이트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카트라이트는 그때 ‘왜 공산당 사람들은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가고 있는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했었다.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학교의 사회과목 선생이나 성당의 신부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원래 뜻은 좋으나 신을 부정하면서 자신들의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폭력적이 방법으로 이룩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판과 비난을 받고 있다고 가르쳤다.  

   당시 대공황기에 미국 공산당의 가장 유명한 투쟁은 1932년의 ‘포드 기아 행진’(Ford Hunger March)이다. 이 행진은 카트라이트의 막내 삼촌이 포드 자동차에 다니고 있었기에 관심있게 주시했던 일이다.   그때 미국 최대 자동차메이커 포드자동차는 판매가 급감하면서 직원을 대규모로 해고했다. 포드의 자동차 생산은 1929년 132만대에서 1932년 40만대로 감소했고, 일부 공장은 가동을 중단했다. 포드 노동자의 임금은 일당 7달러에서 4달러로 떨어졌다.  공산당은 디트로이트에서 굶주림(hunger)을 기치로 내걸고 투쟁을 준비했다. 카트라이트의 아버지는 연일 삼촌에게 전화를 걸어 절대로 앞장서지 말라고 신신 당부 했고 삼촌은 그러마고 약속 했다.   

 후일 여러차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하는  공산당 지도자(서기장) 윌리엄 포스터는 1932년 3월 초 디트로이트의 실업자들을 조직해 디트로이트 시내에서 외곽 디어본에 있는 포드자동차 본사까지의 대규모 가두 행진을 추진했다.    3월 7일 공산당과 디트로이트 실업동맹 소속  3천명의 남녀 노동자들이  디어본으로 향했다.  시위대는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   “부스러기가 아니라 빵을 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행진 했다.  

 디어본의 경찰은 시위대의 행진을 시 경계에서 멈추라고 경고했다. 포드자동차의 창업자이자 CEO인 헨리 포드가 조직한 구사대도 경찰과 함께 보조를 맞췄다.   경찰과 구사대는 최루가스와 곤봉으로 시위대를 진압했지만 일부 시위대가 시 경계를 넘어서자 실탄을 발포했다. 4명이 즉사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  시위대는 그 자리에서 퇴각해야 했다. 그때 카트라이트의 삼촌 윌리엄도 하마터면 희생 될뻔 했다. 삼촌은 큰 형의 신신 당부에도 불구하고 시위대 앞쪽에 서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과격시위자 전원을 체포했다. 다행히 삼촌은 그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경찰은  검거 부상자들을 병원 침대에 꽁꽁 묶어 놓았다. 뉴욕타임스는 “디어본 거리가 피로 물들었다”고 전했다.   그 후 며칠동안 디트로이트에서 몇차례 시위가 더 발생했고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이때 모르모트 칵테일이라 부르는 화염병이 등장했다. 언론들은 불타는 디트로이트 시가지 사진을 대서 특필 했고  공산당의 대중 투쟁은 부쩍 대중적 지지를 잃었다.   그후 국제공산당은 파시즘과의 대항하기 위해 인민전선 전술로 전환하면서 미국 공산당도 그 방침에 따라 사회당과 기타 제정당 및 사회단체 연합 전술로 전환하게 되지만  찻 잔 속의 태풍이 된다. 

 두번째 운위 되는 미국의 레드 컴플렉스 현상은  한국 사회에도 잘 알려진 1950년대 초반의 매카시즘이었다. 디어본 시위 사태가 일어난 지 20년 쯤 뒤의 일이다. 이번에는 공산당의 폭동이 아니라 공산당을 때려잡는다는  반대의 광풍이었다. 

 매카시 광풍은 카트라이트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꽤 자세히 다뤘던 사항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조금 알고 있는 사안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들려 주면 흥미 있어 하게 마련이다. 주제와 결론에는 큰 상관이 없었는데도 논문 발표 후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얘기를 카트라이트 신부에게 먼저 했다.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는  1909년 위스컨신 그랜드슈트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매카시 가족은 아일랜드계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집안이었다. 매카시 광풍이 일었던 시기에 카트라이트는 주로 전장 아니면 부산, 서울 등  한국에 있었지만 그  매카시가 천주교인이었고  해병대 장교 출신이라는 것이 카트라이트에게는 남의 얘기처럼 다가오지 않았었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주시했던 사안이다.  

 7명 자녀 중 하나였던  조지프는  가난했지만 영민했던지 고교 졸업 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자신 소유의 양계장과  식료품점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1929년 20세의 나이로 그는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 1930년 인근 마케트 대학교에 입학했고  5년 후에 법학 학위와 함께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에 그는 식품점 종업원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변호사가 된 매카시는 처음에 소도시인 워파카, 쇼워노 지역에서 일했다.  그가 처음부터 극렬한 반공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민주당원 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찬양자였던 그는 대공황이 있던 동안 1930년대에 루스벨트의 뉴딜을 지지했다.   매카시는 3번이나 루스벨트에게 투표했다. 

 그는 1934년에 순회 판사로 선출됐다. 30대 초반의 나이인 그는 위스콘신주 역사상 최연소 순회 판사였고 융통성있는 판결을 많이 해  현지 변호사들이 좋아했다.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매카시 판사는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는 중위로 임명되어 첩보 기관에 배치 되었는데 그의 임무는 태평양 지역 적군들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임무에  공훈을 세워 수훈 비행 십자장과 에어 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후에 정치에 뛰어들묜서  자신의 공적을 이용하려고 전쟁 중에 선박 낙하로 다리 부상을 입었다고  허풍을 떨기도 했다.

  1944년 7월 매카시는 위스콘신주로 돌아와 현직이던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를 상대로 공화당 후보 예비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참패했다.  공화당을 택한 이유에 대해  자신은 군에서 정보를 접하면서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절감 했고 이때 공산주의에 호의적인 민주당과 결별 했다고 말했다.    2년 뒤 1946년 매카시는 다시 공화당 상원 후보 선거에 도전해 에선에서 공화당 현직 상원의원 로버트 라폴레트를 상대로 승리해 후보 지명을 얻어냈다. 

 본 선거 운동 중에 매카시는 상대인 민주당 후보 하워드  맥머리를 공산주의적 성향이 있다며 공격했다. 이때부터 공산당 타령이 시작 됐던 것이다. 그 선거에서  당시 연방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압승하는 가운데 그 역시 71개의 군 중에 70개를 이기며 상원 의원에 당선됐다.   38세의 나이의 매카시는 주목 받는 상원의 최연소 의원이었고, 경솔한 언변과 행동으로 비판을 받는 일이 자주 있어 당 내에 많은 적들이 생겼으나 몇몇 측근 집단을 만들기는 했다.

  6년 임기를 지내고 50년 재선이 다가올 때 매카시는  위기에 처했다. 위스콘신주 검찰에 의해 탈세와 윤리 위반으로 조사 받는 처지가 됐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지기반이 미약 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해 1월 그와  몇몇 동료들은 대중의 관심과 호의를 끌기 위해 강력한 반공주의 운동을 택할 것을 결심했던 모양이다. 

 그해 2월 9일,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서 열린 한  공화당원 집회에서 자신의 유명한 연설을 했다. “여러분, 지금 국무부는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당의 당원으로서 국무부에서 일하고 정책을 만든 자들 205명의 이름이 제 손에 들려 있습니다.” 

 이 ‘휠링 연설’을 본문의 대부분은 강경 보수 성향의 ‘워싱턴 타임스-헤럴드’의 기자에 의해 준비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명단의 근거로 들어진 국무장관에게 보낸 감찰국 간부의  편지에는 공산당원 명단이 담겨있지 않았었다.

 당시 중국 국공내전의 공산당 승리와 소련의 핵실험 성공 등으로 미국 내에 공산주의 확산에 대한 경계심이 고조돼 있었기에 매카시의 이 폭로는 나름 시의적절 하기는 했다.  또  3주 전 재판에서  국무부 전직 고위 관리 앨저 히스가 루스벨트 행정부 동안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판결된 상황이었다.

그의 주장으로 인한 파장은 엄청났다. 언론은 그의 주장을 대서 특필했고 미국사회 전체가 술렁였다.  매카시의 소속당인 공화당은 당시 야당이었다. 공화당으로선 여당인 민주당을 몰아붙일  좋은 소재였다. 공화당은 상하원 할 것 없이 여당인 민주당을 향한 강공을 계속했고 민주당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매카시의 독주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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