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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56)

안동일 작

전장의 예수,  교회의 예수,  링컨의 예수

카트라이트는 미국에 있을 때 진짜 공산주의자를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만큼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는 드물었다. 공산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사회주의자도 마찬 가지였다. 어려서 부터 천주교회에 다녔고 주변이 모두 신자들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간혹 사회주의며 공산주의 사상의 근본이라는 모두가 잘 사는 평등한 세상에 매력을 느낀다는 주변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했다. 대신학교 다닐때도 그런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다분히 유토피아를 꿈꾸는 개인적 바램 수준이었다.

카트라이트가 자타가 공인하는 공산주의자를 직접 대면한 것은 52년 한국의 거제도 포로 수용소 에서 수용소장인 도트 준장이 어이없이 ‘포로속의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 났을 때였다. 그때 공산포로들을 만났는데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저들의 태도는 종교 수준이었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강고 하게 만들었을까? 그때 공산주의를 연구해야 겠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던 것이다.

지금 이 소설은 카트라이트의 입장에 서서 그의 시각으로 될 수 있으면 당시의 시점에서 상황을 전하고 있지만 왜 미국 맥아더 얘기며 공산당 얘기가 이리 기냐고 성화하는 독자들 때문에 이 대목에서 저자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짐작 했겠지만 카트라이트 신부는 1960년 4월 개교한 한국 서강대학교의 창설 멤버로 인생 후반부를 그 학교 철학과 교수로 봉직했고 은퇴 후 한참 뒤인 2001년 미국의 한 수도원에서 에서 선종했다. 1911년 생이니 정확히 향년 90세 였다.

카트라이트에게 있어서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의 역사는 그가 천착했던 한국의 보수 진보간 갈등과 관련한 그의 신념체계 형성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안 들이다. 이 사안들은 카트라이트 신부 에게 일생에 걸친 커다란 화두였다.  특히 미국의 기독교, 미국의 반공사상을 받아들여 그 정신이 한국 현대 사상사의 한축이 됐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에서 보여지는 심각한 보혁 갈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생각이었다.  카트라이트는 그 때도 한국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보혁 갈등이라고 진단 하고 있었다. 하긴 그 때문에 그 참혹한 전쟁이 일어난것 아닌가.

그리고 맥아더의 반공사상에서 시작해 미국의 노동운동 역사며 공산주의 역사. 특히 잠시 후 살펴볼 메카시의 미친 바람은 오늘날 미국과 한국에서 공히 지적되고 있는 심각한 정치적 양분 현상, 보혁 갈등, 이른바 과도한 ‘폴리티컬 콜랙트니스’ 와 관련해 그 연원이 되고 있고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다는 점에서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돼 지루한 감이 있지만 더 살펴 보기로 한다. 카트라이트의 시점이다.

미국에서 레드 컴플렉스는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1차 적색공포라고도 불리는 최초의 레드 컴플렉스는 러시아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가 수립된 1917년부터 1920년대 사이에 미국 사회에서 퍼져 나기 시작 했다. ‘내것 네것 없이 빼앗아 나누자는 공산주의’가 ‘자유의 땅 아메리카’를 오염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사회 전역으로 번져나가고 있다고 언론들이 부채질하면서 사태는 과장돼 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이제 막 조직된 소련과 적대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의구의 눈으로 바라보았지 결코 박수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미국에서도 소련의 등장에 힘입어 1919년 8월 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당 됐다. 그전에 1901년에 공산주의자들도 참여한 사회당이 창당되있지만 그 세는 미미했고 그나마도 1차 세계대전에 반전운동과 관련 탄압을 받아 크게 위축돼야 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치안법’ 은 정치적 위험 인물들을 미국으로부터 추방하는 것을 합법화 했었고 각 주정부는 자체적으로 일종의 테러 방지법을 제정하여서 좌파 계열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한편 강제로 구금했다. 이런 상황 아래서 그무렵 사회당은 국제 코민테른에 가입하자는 공산당 파와 그래서는 안된다는 온건파로 분열 됐고 다수파로 등극한 코민테른 파가 급진좌파들을 흡수하며 조직을 확장해 기세 좋게 정식으로 창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창당 직후라 할 수있는 1920년 1월 2일 대다수 당원들이 소련의 첩자로 몰려, 70여개 도시에서 지역 노동자 지도자들과 치안법에 의해 함께 검거당하는 탄압을 받은 것을 필두로 탄압과 합법화의 반복을 계속 겪어여 했다. .

공산당은 합법적인 정당으로 등록 됐지만 그후 이들은 주 전체단위 연방 차원의 선거에서 1% 이상을 득표한 적이 없다. 20년대와 30년대 중 후반에 걸쳐 지방 소도시 시의회 의원, 주 상원의원 한명, 마을 보안관 등 공직자를 배출하였지만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연방 상, 하원의원을 배출한 적은 없다. 이때도 지금도 미국 공산당은 맑스와 함께 아브라함 링컨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이채를 띤다. 노예 해방은 계급 투쟁의 한 상징이란다. (위 사진,  39년 미국 공산당 전당대회장 정면의 링컨상)

1929년 대공황 당시 당세가 크게 확장되기도 했다고 얘기되지만 이때 당원이 크게 늘었다해도 전국 단위의 당원수가 5만명 정도의 수준이었고 저들로 향한 표는 이내 더 급감한다. 루스벨트와 민주당 주도로 뉴딜이 실행되며 경제가 점차 회복세에 들어서 대공황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유권자들은 다시 민주당에 표를 던졌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여론이 온통 그쪽으로 쏠리고, 전후 냉전이 격화되면서 매카시즘의 최우선 타겟이 되며 이미지가 더더욱 악화되었다. (현재 소련의 지원을 받던 미국 공산당은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에 반대함으로써 소련의 지원마저 끊겨 2000년대 이후 완전 개점 휴업 상태다).
형식이 내용을 규제 한다고 미국 공산당도 대중 투쟁을 최고의 강령으로 꼽고 이런저런 투쟁을 간간히 별였는데 결과적으로 이런 투쟁들이 대중들이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공산당 지도부는 1921년 뉴욕에서 당대회를 열어 실업문제 해결을 주요 투쟁과제로 채택했다. 이 이슈는 비공산계 노조인 미국노동총동맹(AFL)과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을 비롯해 35개 단체의 지지를 얻어냈다.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대뉴욕 실업자동맹이었다. 공산당은 노조와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대중적 구호로 “투쟁하며 살자”(Fight and Live!), “노동이 아니면 보상을 달라”(Work or Compensation!)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이 조직은 본격적인 시위 투쟁에 앞서 뉴욕시의 폭발물 사건으로 지도부가 체포되고, 연방정부가 실업자 대책을 수립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공산당이 이끄는 실업자동맹(Unemployment Council)은 1929년말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재개되었다. 대량의 실업자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공산당은 외곽단체인 노동조합단결동맹( Trade Union Unity League)을 앞세워 실업자들을 조직화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 당시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조직된 실업자 소비에트를 그 모범으로 삼았다. “굶어 죽겠다, 투쟁하자”(Fight — Don’t Starve!)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빵 배급에 줄을 선 실직자들, 무료급식소를 찾은 이들을 포섭대상으로 삼았다.

미국 공산당은 국제공산당이 제창한 1930년 3월 6일 세계 실업자 투쟁일에 맞춰 미국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워싱턴 D.C., 뉴욕, 보스턴, 시애틀에서 실업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곳곳에 경찰이 투입되었고, 최루가스가 발사되었다. 이때도 시카고의 시위가 가장 격렬 했는데 도심 일부에서의 경찰 시위대 격돌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시카고는 공산주의자에게 넘어갔다”고 제목을 뽑았다.
참여 인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1만명이 채 되지 않는 공산당은 전국적인 시위를 주도한데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실업자 조직화에 나섰다. 1930년 7월 4~5일 시카고에서 전국실업자동맹 창립대회가 열렸다. 1천 3백여명의 대의원들은 행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정치투쟁에 나섰다. 이때가 미국 공산당의 전성기 였다.

그해 10월 16일 실업자동맹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뉴욕시청에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5백~1천명의 시위대가 공산당의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행진을 해 뉴욕시청을 포위하고, 경찰과 충돌했다. 시위 주동자가 지미 워커 당시 뉴욕시장을 “사악한 정치인”이라고 규탄하자, 시장은 “더러운 빨갱이들, 얼굴을 짓뭉겨버리겠다”고 분노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기물이 파괴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뉴욕시는 경찰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물리적으로 해산했으나, 곧바로 1백만 달러의 실업구제기금을 내놓았다. 시위의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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