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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54)

안동일 작

전장의 예수, 교회의 예수, 로웰의 예수

맥아더는 공산주의를 미국을 위시해 당시 세계의 최대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를 세계 평화를 해치는 일종의 전염병으로 생각 했고  이에 대한 처방책으로 강력한 무력응징과 기독교 사상의 보급을  꼽았던 인물이다.

맥아더가 일본 천황을 전범으로 처벌하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천황의 처벌을 당시 일본의 공산주의자 들이며 혁신계 인사들이 원했기에 그들의 말을 따를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1946년 1월 1일 쇼와 일왕은 맥아더 군정청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때 맥아더는 그가 기독 교회에 까지 나가기를 바랬는데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나중에 차분히 전후 과정이며 공부, 연구한 내용 등을 얘기 하겠지만  그 무렵 카트라이트는 한국과 미국을 아루르는 천주교계 내에서 공산주의 전문가로 통했다. 그가 로마의 그레고리 신학교에서 연구하고 학위를 받은 주제가 공산주의 였다. 천주교회와 공산주의자 들과의 관계, 그들을 전교하는 방안들을 연구하려 했지만 마땅한 지도교수를 찾을 수 없어 고심 끝에 정한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변증법적 유물론자들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화’였다.  제목이 학위 논문과는 다소 어울리지는 않지만 내용이 튼실하고 독창적이라고 바오로 교황의 코멘트도 받은 역작으로 회자됐다.

때문에 미국의 반공주의 또한 카트라이트 에게는 커다란 화두가 아닐수 없었다. 이는 미국의 기독교를 받아들여 그 정신이 한국 현대 사상사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상황에서 보여지는  보혁갈등의 한 근원이기도 하다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생각이다.

기실 미국 반공주의의 시작은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20여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흔히들 공산주의는 1848년 2월 21일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 함으로써 탄생했다고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공산당 선언 첫머리에도 “지금 유럽에는 공산당이라는 유령이 배회 하고 있다”고 나오듯이 초기 모습의 단체며 연구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 첫 구절의 정확한 원문 번역은 이렇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비밀경찰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공산당을 조직 하기 전이고 그 사상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무렵이지만 공산주의( Communism, 독일어 Kommunismus) 라는 말을 썼다.  당시에도 꽤 널리 퍼져 있던 사회주의( Socialism, Sozialismus)까지를 통털은 말로 이해 해야 한다. 이 문장 뒤에 ‘세상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섬뜩한 말이 나온다.

알고 있는 대로 사회주의 또한 연원이 깊다. 그 스펙트럼이 넓지만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에서 시작해 이른바 공상적 사회주의 자들의 ‘ 불평등의 해소’,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 확충’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 땅에 왔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기독교 인들을 위시해 많은 이들에게 솔깃한 생각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맑스에 의하면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적 단계를 의미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자원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를 지향하고 실현해 나가지만, 공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여전히 존재하며 자원과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 또한 일정 부분 남아있다. 국가는 계급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 복지 정책을 확충해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는 데 역점을 둔다.  이런 과도기적 단계를 거쳐 사회는 진정한 자유의 왕국인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맑스는 ‘지금까지의 철학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했던 것이다.

1850년대는 농업국가 였던  미국이 산업화의 첫발을 떼면서 협동조합 수준의 노동자 단결운동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주로 북부지방이 그랬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그 무렵 노동운동에 대한 당국의 탄압은 그리 혹독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극렬하고 폭력적이지 않았다. 이는 첫 노조 투쟁이 여성들로 부터 시작 됐다는 것에도 기인한다.

1850년대 북부의 도시 성장이 극적으로 가속화 되면서 뉴욕은 31만 인구에서 에서 80만, 필라델피아는 22만에서 56만, 보스턴은 9만에서 17만이 되었다. 곳곳에 운하가 건설 돼 있었고 1836년, 이미 11개 주에서 1,000마일 이상 철도가 놓여 있었다.
북부 메사추세스는 방직공업이 특히 발달 했는데 지역의 공장들은 시골의 젊은 여성을 고용해 부족한 노동력 문제를 해결했다. 10~20대의 미혼 여성들은 공장주 입장에선 훌륭한 노동력이었다. 농부의 딸인 이들 시골 춯신 젊은 여성을 채용하는 일은 그곳 로웰이라는 지방에서 처음 시작됐기에  이를 로웰 방식이라 불렀다. ,

당시의 사회분위기 상, 여성들은 대개 힘든 일도 잘 참아냈고 남성적 권위에 순종적이었으며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일감이 줄어들어도 큰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 신변에 문제가 생겨도 그저 순순히 고향의 가족에게 돌아갈 뿐이었다.

여성들 입장에서도 나름 수지타산이 맞는 일이었다. 일단 학교를 가거나 결혼을 하기 위한 돈을 벌 수 있었고,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거나 오빠나 남동생들의 대학 학비를 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족이나 시골, 지루한 일상에서부터 벗어나 새로운 도시에서 독립된 생활을 하며 다양한 사회생활을 경험한다는 게 여성들에게 큰 매력이었다.
공장주들이 애써 모집 광고를 할 필요도 없이 시골의 젊은 여성들은 소문을 듣고 자매끼리, 친구끼리 짝을 지어 공장으로 왔다. 그들은 수년간 일하면서 임금을 저축, 고향으로 돌아가 결혼했다. 타운에서 마음에 드는 오빠를 만나 결혼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일은 그만두었다. 초기의 로웰 여성 노동자는, 청결한 하숙집 이나 기숙사 생활  식사의 질도 좋았고, 세심한 감독을 받았고, 임금도 후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위의 온정주의적 공장은 없어져갔고 하루에 12시간에 달하는 과도한 업무량과 빡빡한 일과에 여성 노동자들은 지쳐갔다.
기업들은 갖은 방법으로 급여를 줄였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경우 1836년부터 1850년까지 생산성은 50퍼센트 이상 올랐지만 임금 인상률은 4퍼센트에 그쳤다.
이때 사라 베글리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전투적인 여성 지도자가 등장해 로웰의 여성  노동자들은 조직을 결성했고 파업을 단행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나는 수녀가 되지 않을 거야(I won’t be nun)>을 패러디한 노래를 부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 나처럼 예쁜 여자가 공장에 가서 힘없이 죽어버린다면 너무 애석하지 않은가? 아, 나는 노예가 될 수 없어. 노예가 되지도 않을 거야. 자유가 너무 좋아서 노예가 될 수 없어.” (위 사진, 당시의 투쟁 모습,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 예쁘긴 예쁘다.)

2년여에 걸친 투쟁은 모두 실패했지만  베글리가 이끄는 ‘여성 노동 개선 연합’은 마침내 1853년, 매사추세츠 주 대법원으로 부터 ‘노조는 합법적 조직이며 파업은 합법적 무기’라는 선고를 받아낸다.
대단한 승리 아닌가. 다른 주들도 곧 수용. 하지만 고용주들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결성된 . 모든 남성 직능조합은 여성 노동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1855년, 여성 스스로 여성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이는 유명한 ILGU (국제 여성 봉제 노조)의 모태가 된다.

하지만 곧 남북전쟁이 터지고 여성 노동자들은 투쟁을 멈추고 열악한 근로 조건을 계속 안은 채 오빠, 아저씨들의 군복이며 군수품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재봉틀을 돌렸다. 전쟁이 여성 노동운동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
그런데 그즈음 이처럼 애틋하고 온건한 여성 민생투쟁 조차도 정부기관, 언론, 사회단체 등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외부에서 온 급진주의자들(foreign socialists, ultra communistic radicals)이 이끄는 난동’이라고 몰아세웠다. 고향의 아버지들은 돈벌러 보냈더니 빨갱이 물이 들었다고 딸들을 집으로 불러 들여 밖으로 못나가게 머리를 깎았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백여년 뒤인 1970년대 한국 청계천 봉제공장, 구로공단 여성 노동자들과 고향의 아버지들 모습 아닌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불과했던 당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미국의 적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심지어 이것이 ‘미국 정부와 인민의 재산을 뒤엎으려 영국에서 시작한 국제적 음모의 일부’라고까지 했다. 각 지역의 교회 목사들이 이 선전의 일선에 섰고 신도들은 고개를 주억 거렸다.

청교도 정신의 기독교적 기반이 확실한 미국에서 유물론을 바탕으로 하는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또  자원이 풍부했던  축복받은 땅 미국은 계속 성장하고 있어 노예제도가 존속하고 있기는 했지만 유럽처럼 절대 빈곤의 비율이 매우 적었고 목사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보수적 중산층이 형성돼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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