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전장의 예수, 교회의 예수, 맥아더의 예수
카트라이트는 존 리, 이종현과 닥터 현, 현봉학과는 로마에 있을 때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있을 때도 주로 안부 편지거나 크리스마스 카드, 여행지 엽서 등 이었지만 끊이지 않고 연락을 주고 받고 있었다. 이종연은 그때 예일대 법대를 나와 뉴욕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었고 리 보다 여섯살 위인 현봉학은 콜럼비아 의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성공한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셋은 ‘부산 피난시절’, 두 한국인 청년들이 그렇게 말하는 통에 카트라이트도 군인들로서는 피난이 아니었음에도 그말을 배워 사용했다. 두 청년들과는 상륙 전함, 장진호와 흥남에서 인연을 맺은 이후 대연동에 있었던 8군 사령부에서 몇달 함께 근무한 인연이 평생을 갔던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묘했다. 세상사, 인생사는 사람을 만나고 그 중 몇 사람은 선택이라고 할것은 없지만 자주 어울리게 되고 일을 도모해 함께하는 것이 일반이라지만 두 사람과의 만남은 사제의 길을 걷고 있던 카트라이트의 소명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개신교도들 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도 역시 그랬다.
진작 의사의 길을 선택했던 현은 덜했지만 존리는 카트라이트와 주변 해병 장교들의 주선과 추천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명문 예일대 유학에 오를 수 있었고 그 어렵다는 그 대학 법대를 나와 변호사까지 됐던 것이다. 한국인 유학생 출신 최초 미국 변호사였다. 존리는 회사에 큰 일이 있어 달려오고 오고 싶지만 못 온다고 안타까와 했었다.
그때 흥남에서 돌아왔던 51년 1월, 동경의 센터에서는 카트라이트에게 이번에는 일선으로 나가지 말고 부산 사령부 군종실을 맡아 달라고 했다. 일종의 순환보직 관례이기도 했다. 카트라이트도 속 마음으로는 전장의 끊이지 않는 종부성사가 너무도 끔찍한 기억이어서 이를 못이기는 체 하고 클리어리와 임무를 교대했다. 존리와 닥터 현도 당분간 사령부에 남아 있게 되었기에 세 사람의 부산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노포크 맥아더 기념관 이야기 부터 간략히 적는다.
항구인 노포크는 군사도시이기도 했다. 현봉학이 뉴욕 부터 몰고온 쉐보레를 타고 리치몬드에서 한시간 이상 달려 오자 대서양 연안에 정박한 해군 함정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카트라이트와 현이 탔던 배도 있지 싶었다. 도심으로 들어서자 흰 대리석의 높은 남군 병사 기념비가 먼저 눈에 띄었다. 남북전쟁에서 패한지 15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 지역 주민들의 마음속에는남부연방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노포크 도심 시가지에는 맥아더 장군의 흔적이 많이 있었다. 맥아더기념관이 있는 일대는 ‘맥아더 스퀘어’라고 명명했는가 하면, 주변 거리와 건물 벽 곳곳에는 미국 역사상 몇 명 안 되는 오성(五星) 장군 맥아더를 상징하는 별 다섯 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기념관 정면에는 맥아더의 동상이 서 있었고, 기념관 꼭대기 국기게양대에는 커다란 미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원래는 인구 25만의 미국 내에서는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닌 노포크 시청 건물이었다고 했다. 기념관에 들어서자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은 중앙의 높은 도움 천정 아래 약간 밑으로 내려간 지면위에 놓여 있는 맥아더의 검은 석조 대리석 관 이었다. 맥아더는 이곳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옆에는 사망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부인 진여사의 빈 관이 놓여 있는 것이 이채를 띄었다. 장군과 아내의 석관은 그의 다양한 사령부의 배너와 기, 그가 싸웠던 전투에 대한 부조물 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죽음을 얘기하고 준비하고 또 자꾸 죽으라고 하면 오래 산다는데 진 여사는 정말 장수해서 102살 까지 뉴욕에서 살다가 2000년 에야 영면해 이 관에는 거의 40년 만에 주인이 들어올 수 있었다.)
맥아더기념관 자료실은 단층으로 조촐하게 꾸며져 있었다. 맥아더가 생전에 소장하였던 도서와 선물들이 잘 진열돼 있었고, 자료실에는 수많은 자료 파일들이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맥아더기념관의 선물들은 대부분 일본인에게 받은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일본이 맥아더를 구워삶아 천황제를 유지하고 전범 처형의 확대를 막았고 이 때문이라도 일본인들이 그를 그렇게 좋아 했다는 얘기가 틀린 말이 아닌 듯싶었다.
안내원이 자료실에 놓인 필름 영사물을 틀었다. 한국전쟁 직전 서울 근교에서 벌어졌던 좌익사범을 처형하는 장면이 화면에 나왔다. 아마 그당시의 극심한 좌우 대립, 한국사회의 혼란상을 보여 주겠다는 의도 였던 모양이다.
1950년 4월 14일 15:00시 서울 동북쪽 10마일 떨어진 언덕에서 39명의 좌익 혐의자를 한국군 헌병대장 감독 하에 약 60여명의 헌병들이 총살로 집행한 장면이라는 영어 설명이 나왔다.
39명의 혐의자들은 나무기둥에 묶인 채 가리개로 눈을 덮고 가슴에 원형의 사격표지판을 붙이고 있었다. 나무기둥에서 2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집총한 헌병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총살이 끝나자 권총을 빼내든 검열관이 나무기둥에 묶인 처형자들의 사망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고 미처 죽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 자리에서 머리에 권총을 쏘아 확인 사살하는 장면이었다. 카트라이트는 그 잔인한 장면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닥터 현도 또 닥터 정도 그런 모양이었다.
좌우 대립의 혼란상을 보여 주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정부의 잔혹한 공산당 탄압이라 할 수 있는 이 광경이 영상의 3분의 2를 차지 해 10여분 이나 계속됐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영상을 계속 틀고 있지요?”
정 박사가 먼저 말했다.
“그렇네요 차라리 좌익들이 난동을 부리는 모습이나 저들이 잔혹하게 양민을 학살하는 그런 장면이 나와야 되는것 아닙니까?”
닥터 현이 대꾸했다.
“좌익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이에요?”
정박사가 못마땅 하다는듯 현을 쳐다보며 한마디 했다.
현은 반공 보수인사였고 천주교 신자 이면서 6.25를 연구하고 있는 정은 혁신계라고 할 것은 없지만 현에 비해 중립적이기는 했다. 당시에는 진보 라는 말보다 혁신계라는 말을 더 사용했다.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지만 정교수의 남편은 혁신계 탄압의 대표적 사건인 진보당 조봉암 당수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은 인사 라고했다. 때문에 전임강사 임용 때도 문제가 됐었는데 카트라이트의 학교이기에 가능했다는 말도 있었다.
안내원은 동경에서 공수된 자료를 그냥 보관했다가 관심이 있는 관객이 오면 틀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녹화물은 대부분 맥아더의 기록물 그리고 전쟁 기록물 들이었다.
정 박사에 따르면 무언가 고증이 잘못돼 있는 것 같다고 했다. 50년 4월 이라면 이승만 정부의 공산당 색출 탄압이 극에 달해 있을 때이기는 했지만 4월 중순에 저런 집단 처형은 없었다는 것이다. 남로당의 최고 간부였던 이주하 김삼룡이 체포 된 것이 4월 초순으로 그때 남로당이 괴멸 됐다는 보도는 있었고 정작 두 남로당 인사는 6.25가 터진 다음날 서대문 형무소에서 즉결 처형 됐다는 것이다.
북한 정권은 6.25 남침 이틀전인 6월 23일 이 두사람과 평양의 대표적 기독교 지도자인 조민식 선생을 교환하자는 방송 제안을 하기도 했었단다. 아무튼 너무도 잔혹한 광경이었고 6.25가 없었더라도 한국 사회는 무언가 큰일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 필름이었다.
“이 집의 주인인 맥아더 원수가 워낙 유명한 반공 주의자 였기에 자연스레 저런 영상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 되었던 모양입니다. 좌익의 행위야 영상에 담을 수 없었겠지요. 그것 참…”
카트라이트가 두 사람의 신경전을 무마할 요량으로 한마디 했지만 그래도 기념관측의 무신경은 못내 아쉬웠다.
맥아더의 반공사상은 유명했다. 그는 언제부터 그랬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공산당이야 말로 세계 평화를 좀먹는 박멸해야 할 기생충’ 이라고 생각했고 여러차례 이를 공표 하기도 했다. 하긴 미국의 반공사상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도그마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