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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49)

안동일 작

흥남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기적

포니, 박시창 두 대령은 불타는 흥남항(아래사진)을 보면서 미처 다 싣지못하고 나온 사람들을 생각해야 했다. 내항 도선장 플랫폼에 있던 사람들은 대충 실었지만 항구 바리케이트 철책 밖에는 수만의 시민들이 아직 아우성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포니는 저도 모르게 기도를 올렸다. “저 사람들에게도 신의 은총이 내려 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왔단다. 포니는 냉담자였다고 했다. 박시창도 천지 신명께 간절히 빌었음이 틀림없다.
카트라이트가 후일 본 흥남항 폭파 동영상 필름에는 다행히 사람들의 모습은 없었다. 최후에 남아있던 공병들이 도크 아래로 흔들거리는 폭약 더미 들을 적당한 위치로 내려 고정하는 장면이 나오더니 이내 폭발이 일어나면서 굉음과 불꽃이 솓아 올랐는데 거기에 사람들의 모습은 없었다. 헌병들이 폭파 한다고 경고를 여러 차례 했을 터였다.

이후 미 10군단은 철수 동안 함포를 포함해 잠수함이나 기뢰 등 어떠한 종류의 공산군의 공격도 받지 않고, 부산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다.
이 또한 거의 기적에 속하는 일로 꼽힌다. 20만이 넘는 병력과 인력이 2백여 척의 크고 작은 함선을 동원해 적의 대군이 운집하고 있는 전선을 빠져 나와 거의 1천 킬로 미터를 후퇴 항해 하는데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았고 사고가 없었다는 것은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흥남 철수 작전을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과 비교를 하곤 한다. 압도적인 병력에 의해 포위돼 있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진 대병력의 철수가 큰 피해 없이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민간의 헌신적인 참여와 하늘의 뜻일 수 밖에 없는 날씨가 철수 작전을 크게 도왔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며칠 뒤 카트라이트와 부산에서 만난 포니대령도 이 됭케르크 작전을 얘기했었다. 적절한 순간에 민간인을 실을 배들이 속속 항구로 들어 왔다는 점에서 또 하늘의 도움으로 날씨가 아군의 편이었다는 점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하지만 흥남 철수와 됭케르크 철수는 달랐다. 흥남은 됭케르크 경우처럼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철수는 아니었다.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1940년 5월말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프랑스 남부 됭케르크에서 독일군의  포위망에서 벋어 나기 위해 벌인 해상 철수 작전이다. 규모로 보면 세계 전사상 최대 규모의 해상 철수 작전이었다. 당시 50만에 가까운 연합군이 이 지역에 80만이 넘는 믹강화력의 독일군에 포위돼 정체 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군 지역이 더 위험했기에 철수 작전은 주로 영국에 의해 주도 된다. 5월 26일에 첫 철수 작전을 실행하기로 했지만 선박이 부족했다.
영국 해군은 물론 프랑스 해군, 벨기에, 네덜란드 해군에게 협조 요청을 해서 선박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봤으나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선박 징발령을 내렸는데, 당초 예상보다 더 많은 선박들이 자발적으로 몰려왔다. 9일 동안 860척에 달하는 선박들이 모여들어 결과적으로 33만 8천여명의 병사들 (영국군 192,226명, 프랑스군 139,000명)을 구출했다.
이 유명한 “됭케르크의 작은 배들”(Little Ships of Dunkirk)에는 화물선, 어선, 유람선 및 심지어 왕립 구명정 협회의 구명정 등 민간 선박이 다수 있었는데 이들이 헌신적이며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해안에서 실어 바다에 대기한 대형 선박으로 운반했다.
이 ‘작은 배들의 기적’과 막강 독일 공군을 무력하게 했던 ‘하늘은 짙은 운무에 덮혀 있는데 파도는 치지 않았던 날씨의 기적’ 은 영국과 프랑스 국민의 마음에 하늘이 자신들 편이라는 인식이  각인되어 사기를 높였고 이후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를 뒤집는 계기를 마련 한다.
그러나 철수 작전은 대체로 성공했지만, 영국군이 프랑스에 갖고 들어간 화포 등 중장비 및 차량은 모두 버려야 했고 후방 지역의 수십만 프랑스 병사는 포로가 되어야 했다. 영국 구축함 6척과 프랑스 구축함 3척은 9척의 대형 선박과 함께 작전 초반 독일 공군에 의해 격침되었고, 구축함 19척이 손상되었다. 작은 선박도 200척 이상이 침몰하는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흥남은 달랐다. 전혀 이렇다할 피해 없이 한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병력 105,000명 북한 피난민 98,100명, 탱크 장갑차를 포함 각종 차량 17,500대 각종 물자 350,000톤을 실어 닐랐다.
스미스와 카트라이트의 해병 1사단의 경우 장갑차  M26, 85대와  전차  M4, 12대를 가지고 장진호로 진격했는데 철수 때는 M26  69대와 M4 5대를 LST에 실어 철수 할 수 있었다. 그 참혹했던 전투를 생각하면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이때 건져온 장비들은 이후 각 전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게 된다.

맥아더 원수는 12월25일,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에게 보내는 메시지 (맥아더는 보고라는 말대신 꼭 메시지라고 했다)에서 커다란 피해없이 끝난 흥남으로부터의 철수작전 완료의 소식은 때가 크리스마스이니 만큼 그 기쁨이 더욱 크다고 했다.
맥아더는 장병들에게 크리스마스엔 전쟁을 끝내고 집에 가자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펴다가 난데없이나티난 중공군에게 패하기는 했어도  크리스마스에 맞춰 큰 사고 없이 철수를 완료 함으로써 ‘약속’을 지킨 셈이 되었다.

트루먼 대통령도 고향 집에 내려가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다가 ‘흥남철수 무사고 완료’ 소식을 듣자 벌떡 일어났다. 극동의 동토에서 우리 아들들 다 죽는다고 노심초사하던 미국민들에게 ‘성탄선물’이 되면서 자신에게도 정치적 선물이 된 것이었다. 트루먼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가질수 있는 “가장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했다.
특히 민간인 10만명을 아무 사고 없이 구출 했다는 것이  또 하나의  큰 선물이라고 했다. 처음에 민간인 철수에 난색을 표명했던 상부 인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부터 그런 계획이 있었다고 브리핑했고 각 언론들은 이를 크게 보도해 미국의 인도주의가 다시 한번 세계에 각인됐다. .

AP 통신은 이렇게 보도했다 “유엔군은 24일밤 동북 한국의 최후거점 흥남 교두보를 공산군 수중에 넘겨주었다. 한때 전멸위기라고 까지 했던 10만 수천 명 유엔 대군의 해상 철수작전은 질서정연하였으며 전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무엇보다 감격에 넘친 10만의 북한 반공산주의자들이 민주지구를 찾아 유엔군과 더불어 항구를 출발해 자유의 땅에 안착 한 것이 뜻깊은 일이었다.
공산군 전초 부대는 흥남 근교 고지에서 총 한발 쏘지않고 최종 이륙부대 미3사단 장병들이 상륙용 주정으로 떠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해군 파괴기술자들은 무서울 정도로 흥남항을 폭파시켰다. 미군이 적의 압력을 받아 해상으로 철수한 것은 미국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다. 극동에서 다시 벌어진 ‘기적의 됭케르크 철수’는 적국의 양민 10만명을 데리고 나오는 세계 전쟁사의 전무후무한 일을 해냈다. “

그런데 부산에서 만난 포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카트라이트가 생각하기에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은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다.
그를 진심으로 치하하자 모든 게 신부님의 기도 덕분이었다면서 그때 흥남부두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자신이 확인 했다고 하는 것 아닌가.
“기뢰 소거를 확인하느라 소해정을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부두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소해정들의 보고는 기뢰들이 생각 보다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제거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하늘이 도왔구나 하고 생각 하려는데 사위가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부두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그 혹독한 환경 아래 놓인 어린 아이들의 웃고 있는 표정이 눈에 그대로 들어 왔습니다. 그때 갑자기 어린시절 성경학교 다닐 때 들었던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받아 들이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 났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시면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를 받아 들이는 것이니라’고 하셨다면서요? 거의 30년 전에 들은 뒤에 한번도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말씀 이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계셨던 것이 틀림 없지요? 신부님”

그때가  22일 오후였는데 나중에 라루에게 들으니 라루도 바로 그 시각에 흥남부두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포니는 이른바 냉담자 였다. 어린시절에는 동네 장로교회에 출석을 했지만 그후 고교 , 사관학교에 진학 하면서 어쩌다 보니 냉담해 졌다는 것이었다. 그날 자신은 다시 교회를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는데 확인 하지는 못했다.  후일 그의 아들 손자들과도 만날 수 있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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