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흥남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기적
철수 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됐다. 13일 오후부터 해병 1사단이 미군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철수선에 오르기 시작했다. 전체 병력으로 따지면 한국군 1군단 병력에 이은 두번째 였다. 알몬드 장군과 포니 대령의 최전방에서 고생한 예하 부대에 대한 배려였다.
철수작전이 시작되면서 알몬드 장군은 덕장으로 변해 있었다. 고생한 예하부대에 대한 배려도 그렇고 카트라이트가 만난 현봉학의 얘기를 들어보면 민간 피난민 문제에 있어서도 한껏 너그러움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1월말 10군단에 배속돼 있는 한국군 1군단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느라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벌써 두만강 변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때 한국군의 전선은 두만강변 국경도시 회령 남쪽 45km 백암, 부령, 부거동 선이었다. 보급만 뒤따르면 단숨에 두만강에 도달할 기세였다.
하지만 12월 4일, “해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생각지도 않던 철수 명령이었다. 오히려 후퇴길이 고생길이었다. 곳곳에서 매복한 중공군과 조우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공군 주력은 장진호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성진까지 내려 왔고 1군단 소속 제3사단은 벌써 11일 성진에서 철수선에 승선했고, 군단 주력은 미군들의 엄호 아래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었다.
한국군들의 표현에 따르면 ‘진정한 우방인지, 어떤지는 비상시가 아니면 알 수 없다’ 였는데 흥남 해상철수에 즈음해 미 제10군단장 알몬드는 덕장의 풍모를 보였다. 국군 제1군단 장교들이 후일에도 알몬드 장군에게 높은 평가를 서슴지 않는 것은 이 비상시기에 동맹군인 국군 제1군단의 철수를 먼저 배려한 그의 결정 때문이었다. 반면, 서부전선의 제8군은 전투에 지친 한국군을 후위로 지정해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해병 1사단 주력 부대는 올 때와 마찬 가지로 상륙선 LST를 주요 케리어로 삼았다. 올리버 사령관은 이번에는 자신과 함께 행동 하자고 카트라이트를 잡았다. 카트라이트에 대한 배려 였다. 올리버 사단장과 참모들은 직할 부대인 1대대와 함께 순양함에 오르기로 돼 있었다. 카트라이트는 이번에는 사단장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군종실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도 했다.
흥남 부두에는 소형 선박부터 미주리 전함, 세인트 폴 순양함 그리고 50여척의 LST등 총 109척의 선박이 동원돼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193회의 수송작전을 펼쳐 10만 5천명의 미군과 한국군, 1만 7천500대의 차량, 35만t에 달하는 보급품과 장비가 운반됐다. 이들 선박 가운데 단연 상륙 운반선인 LST의 활약이 돋보였다.
LST는 ‘전차 상륙함(Landing Ship, Tank)’의 준말이다. 선체가 넓적하고 평평한 구조여서 해안 깊숙이 진입이 가능하고, 뱃고물에는 출입구가 있어 사람 및 물자를 나르기 편했다. 단순히 전차 등의 차량과 병력, 화물을 나르기만 하는 것 뿐 아니라, 직접 항만 시설이 없는 해안에 직접 접안해 이들을 자력으로 내릴 수 있도록 설계된 함종이다. 당시 동원된 LST 가운데 가장 큰 668호는 병력만을 싣는다고 하면 1만명 까지도 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평저선이므로 원양 항해 성능이 나쁘고, 상륙용 램프가 고속을 내는 것을 방해해 속도가 15노트 전후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느렸다. 기동성이나 내파성도 좋지 않아 해상이나 수중, 공중에서의 공격시 회피가 힘들었다. 화력은 달고 있는 소구경 대공화기에만 의지해야 했다. 이 때문에, LST의 승조원들은 자기들의 배를 ‘크고 느린 과녁’ (Large Slow Target)이라는 자조 섞인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평저선으로 승선감이 좋지 않았다. 파도에 출렁일 때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다. 원산으로 들어올 때 그 고생을 했던 배가 LST 였다.
13일 오전 이었다. 동경과의 통화를 기다리느라 본부 군종실에 있을 때 포니 대령이 젊은 한국군과 함께 군종실로 들어 왔다.
“신부님, 만나자 마자 이별입니다.”
포니는 카트라이트를 10년 지기 처럼 대했다.
“네 먼저 부산에 가 있겠습니다. 부산으로 가는것 맞지요?”
부산은 8군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다. 카트라이트가 탈 순양함은 내일 오전 출항하기로 돼 있었다. 각 부대의 행선지는 아직까지 부대원 들에게는 기밀이었다. 카트라이트는 스미스 소장이 말끝에 부산으로 함께 가자고 해서 알게 된 일이었다. 각 부대는 강릉 묵호 삼척 포항 등 동해안의 아직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각 주요 항구에 차례로 내려 놓게 될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해병대는 이번에 너무 고생을 했다고 군단장님이 배려 하셨습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정신 없이 바쁘실텐데 아침부터 여긴 어떻게…”
포니는 함께 온 한국인 청년을 소개 했다. 군복은 입고 있었지만 계급장이 달려 있지 않았다. 10군단 민사처 고문직을 맡고 있는 문관이라고 했다. 그가 바로 현봉학 이었다. 당당하게 미국 의사 면허를 지니고 있는 청년이었기에 다들 닥터 현, 혹은 닥터 라고 불렀다.
“어제 그 감동적인 기도 얘기를 해 줬더니 꼭 뵙고 싶다고 해서…닥터 현이야 말로 이곳 고향 사람들의 피난 문제에 열성을 다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
“신부님 말씀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곳 시골 소녀의 동생이 무겁지 않다는 얘기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눈물겨운 광경이 그려졌습니다.”
카트라이트는 힘차게 손을 내밀어 닥터 현의 손을 잡았다.
현 봉학은 미국 이름은 없었지만 존리보다 영어를 훨씬 잘했다. 존리는 사실 소녀의 이야기를 통역 하면서 어법에 맞지 않은 에인트 (ain’t) 라고 쓰지는 않았다. 카트라이트가 시골 소녀의 표현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현은 그런 뉘앙스까지 알고 있었다. 포니는 자신이 그를 어렵사리 스카웃 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스레 울리더니 군종병이 동경 토비 주교님 연결이 됐다고 했다.
카트라이트는 잠깐 실례의 제스쳐를 두 사람에게 보내고 저쪽 책상에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동경 전화라고 하니 포니가 더 반가와하는 눈치였다.
“주교님, 스테파노 입니다.”
원주와 부산의 교환수를 거쳐 연결되는 통화 치고는 상태가 매우 좋았다.
토비 주교는 첫마디가 ‘스테파노야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였다.
“죽으려고 기를 썼더니 성모님께서 이렇게 살려 주시는 군요.”
“농담을 하는 것보니 쌩쌩 하구먼. 그래 그런 각오로 살아야 해. 우리 군종들은 하루만 살아야 한다,오늘만 산다는 각오가 있어야 되는 법이지 ”
주교는 다짜고짜 어디서 들었는지 자신이 처리를 해줄 테니 이번에 부산으로 가지 말로 동경으로 돌아 오는것은 어떠냐고 물어왔다. 말씀은 고맙지만 할일이 더 있는 것 같다면서 한국인 피난민 얘기를 꺼냈다.
“그래 내 클리어리 신부가 전하는 얘기 듣기는 했는데 그게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닌듯 싶으이”
“그러니 주교 예하님의 적극적이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 내가 뭘 어떻게 도우면 되겠는가?”
“맥아더 원수를 설득해 주십시요.”
“맥아더 원수를?”
“이곳은 알몬드 장군이며 참모장 포니 대령님이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맥아더 원수만 오케이하면 일이 잘 진행될 것 같습니다.”
“응 그래? 알았네 힘 닿는 대로 힘써 봄세.”
“주교님, 포니 대령님 잘 아시죠? 우리 해병대 상륙 작전 일인자. 지금 이방에 와 계십니다. 지금도 그 얘기 하느라 여기 오셨습니다.”
그때 포니가 전화를 바꿔 달라는 제스쳐를 보내왔다. 몇 마디 용건을 더 나눈 뒤 포니대령이 바꿔 달라고 한다니까 주교도 반가와 했다.
두 사람의 통화는 떠들레한 의례적인 안부가 끝나고도 꽤 길게 이어졌다. 따져 보면 역사적인 통화였다. 옆에서 듣자니 맥아더 원수를 설득할 묘수를 포니가 주교에게 전하는 것 같았다. 포니는 멕아더에게 이 일이 하늘의 명령이라고 강력히 권고 해야 된다면서 이일을 성사 시키면 그는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너스 군대 사건과 같은 맥아더의 흑역사와 오명을 일거에 뒤집는 일이라는 얘기 까지 하는 것 같았다.
실제 이 통화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흥남 철수 때 10만의 ‘적국 양민’이 아군을 따라 후퇴했던 세계 전쟁사의 전무후무한 일이 성사되면서 트루먼 대통령 까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극찬했고 전 세계에 미국의 인간애, 인류애가 한껏 자랑스레 뽐내졌으며 총지휘자 맥아더의 성가도 한층 올라갔던 것은 사실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