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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40)

 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계속되는 존리, 이종연의 끔찍한 경험담이다.
포로 행렬 뒤로 7연대 병력이 도로 위를 뒤덮게 되자 적들의 공세는 더 심해졌다. 부대는 멈춰서서 도랑과 제방 아래쪽으로 산개 했지만 사방에서 총알과 박격포탄이 쏟아졌다. 응사하던 해병들은 급히 뛰어 내리느라 총알을 충분히 챙기지 못했었다. 총알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총알(amo), 총알”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탄약 수송트럭에 있던 병사들도 다수 큰 부상들을 당해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때 윌리엄 맥클런 상사가 트럭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용감하게 자신을 노출 시키면서 탄약을 해병대원들에게 여기 저기로 던져주었다. 그때 적의 박격포탄이 날아왔다. 이종연은 그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포탄에 맞은 맥클런 상사님의 시신이 바로 내 곁에 떨어졌습니다. 바로 내옆으로 쿵하고 굴러 떨어진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멕클런 상사님이었습니다. 머리가 절반이 날아가 절명한 상태였습니다. 그분은 내게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고, 자기 목숨보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더 챙긴 인정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신부님. 왜 그런 사람이 일찍 죽어야 하나요.”

그 말을 하면서도 종연은 다시 설움이 복받치는지 엉엉 울었다.
그때 아군 콜세어 전투기가 나타나 건너편 중공군들을 쓸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종연은 자신도 죽은 목숨이었다고 했다.  카트라이트는 종연의 손을 잡아주면서 인상좋은 동네 철물점 아저씨 같았던 멜클런 상사를 떠올리며 그가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위한 종부 기도를 간절히 올렸다. 기도를 올리는 두 사람의 손 위로 종연의 뜨거운 눈믈 방울이 계속 떨어 졌다.

다시 뭉친 해병 사단은 고토리에서 발이 묶여야 했다. 날씨도 7일 밤 부터 폭풍설이 몰아쳐 앞이 안 보일 정도의 최악의 악천후가 계속 되기도 했지만 고토리 바로 아래 황초령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수문교 다리를 그새 중공군이 폭파 해 놓았기 때문이다.  유담리 철수에 정신 없었던 4일 밤에 그렇게 한 모양 이었다.   고토리 남쪽 6㎞ 지점에 있는 수문교 전장 450m 구간 중 일부를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켜 끊어 놓았는데 끊어진 구간은 9미터 남짓이었다. 저들이 동원 할 수 있는 폭약의 성능이 그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 구간을 복구하지 못한다면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병력이야 목재나 로프로 부교를 설치해 건넌다 하더라도 다른 무엇보다 40여대의 전차와 1400대에 달하는 차량을 적진(敵陣)에 그대로 고스란히 남겨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올리버 사단장의 진작의 예상이 맞았던 것이다. 들어올 때는 활짝 열어 두었다가 나가지 못하게 그렇게 한 것이다. 사단장은 이에 대한 대비를 해두고 있었다. 그곳 수문교의 감제를 위해 진흥리 쪽 좌측 정상인 1109고지에 1연대 산하 중대 병력을 투입해 놓았고 공병대대장과 협의해 함흥 공병창에 만약을 대비한 교량 부품 제작을 의뢰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올리버 사단장의 또 하나의 신의 한수였다.
동경 총사령부의 기술진 까지 흥남에 급파돼 부품은 꽤 여유있게 제작돼 있었다. 문제는 이를 수송하는 방안이었다. 흥남에서 사고지점 까지 육상 수송은 시간상으로나 곳곳에 매복해 있는 적군 때문에 불가능 했고 타개할 유일한 방도는 조립교를 공군이 수송기로 날라 전달해주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기술적으로 상당한 노하우를 요구하는 작전이었다.

함경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향해 막중한 교량 자재를 투하하는 일이었다. 차칫 잘못하면 공중에서 투하한 자재와 설비가 지상에 닿는 순간 발생하는 충격으로 부서지기도 쉬웠다. 그리고 지형이 오밀 조밀한 산악지형이라서 정확한 투하지점을 잡아내는 일도 결코 쉽다고 할 수 없었다.
8일 하루 종일 수송기가 떠서 연습 투하도 시도해 보면서 수송 작전을 행하려 했지만 폭풍설 때문에 번번히 실패 해야 했고 수송기를 엄호하던 전투기 한대가 그만 추락해 희생되는 사고 까지 겪어야 했다.
문제는 이처럼 악천후 였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고토리의 별’이다.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일인데 여기에는 부풀어진 와전도 상당히 많다.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은 수문교 복구 작업 당시 너무도 악천후가 심하고 어두워 공중 낙하도 할 수 없었고 파괴된 다리 근처에도 갈 수 없었는데 천주교 종군 신부의 인도로 전 부대원이 간철한 기도를 올렸더니 하늘에서  성모 마리아의 형상으로 별이 나타나 보름달  보다 훨씬 밝은 빛을 보내주는 바람에 공중낙하도 성공 할 수 있었고 작업도 급히 마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고토리의 별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는 하다.
고토리의 별은 이날 밤 (8일,  어떤 전설에는 7일 밤으로도 나오는데 8일이 맞다) 9시 37분 무렵, 구름이 걷히고 고토리 남서쪽 산 위에 굉장히 밝은 별이 홀로 빛났다. 당시 고토리에 있던 여러 미군들에게 그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는지 여러 기록이나 증언에서 언급돼 있고, 장진호 전투의 상징으로 삼아 ‘고토리의 별(Star of Koto-ri)’이라고 부른다. 해병 전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돼 있는 사안이다.

2017년에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 소재  해병대 박물관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제막했는데, 석비 상단에도 고토리의 별을 표현한 상징물을 올려놓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날 고토리에 뜬 별이 뭘까 궁금해지는데, 텍사스 주립대학교 천체물리학 교수 도널드 올슨은 2018년 저서에서 바로 목성이었다고 밝혔다. 원래 목성은 달보다 80배나 밝다고 한다. 워날 멀리있어서 그렇지.

8일 하루 동안 해병사단 전원은 고토리에 머물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리를 복구시키는 데 총력전의 노력을 쏟을 수 밖에 없었고 이 사안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공병대와 항공 유도 통신병, 그리고 복구공사 감제에 필수인 1109 고지 탈환에 나섰던 1연대 E 중대원 말로는 딱히 할일이 없었다.
사단 참모장 피어슨 대령이 이제는 날씨가 맑아지라고 기도하는 수 밖에 없다고 지휘관 회의에서 말했고 이말은 전 부대로 퍼져나갔다.

전설로 등장하는 종군 신부는 카트라이트가 아니라 그의 후배 그리핀 중위 였다.
그리핀은 그날 저녁 7연대 본부막사로 쓰이는 큰 텐트 안에서 천주교 신자 병사들과 함께  미사를 올렸는데 그때 그가 기도에서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간절하게 요구 했던 것이 날이 맑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심전심으로 장병들도 간절하게 기도 했음은 불문가지다. 그런데 이들이 기도를 마치고 본부 텐트를 나와 각자의 참호로 돌아가려던 시간이 밤 9시 경이었다. 그때 남서쪽 하늘에 찬란한 별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니 병사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통했다고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주교 병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성모님이라고 소리쳤고 거의 전 부대원이 참호 밖으로 나와 별을 구경했다.
별이 뜬다는 것은 다음날 하늘이 맑다는 증좌 아닌가. 실제로 다음날 9일은 하루종일 맑았고 공수작전도 회수 작전도 또 복구 작업도 큰 차질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고토리에 뜬 별은 공사 현장에 뜬 별이 아니라 그 전날 뜬 별이었던 것이다.

그날 카트라이트도 거의 같은 시각 5연대 본부캠프에서 모처럼 평온한 미사를 올렸는데 카트라이트는 한국전쟁이 쓸데없는 전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의미 있는 전쟁으로 미군 유엔군의 희생 역시 쓸데 없는 일이 아니라는  강론을 했다. 기도도 한국에 평화를 내려 달라고 기도했다. 당시로서는  꽤 의미 심장한 내용이었지만 그리핀의 기도에 묻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또 감제 스팟 1109고지 탈환에 나섰던 E 중대는 의외의 상황에 직면해 곤란해 지기는 했지만 임무(미션)는 완수 (올 클리어) 할 수 있었다. 중대는 능선을 올라 어렵사리 고지로 접근 했는데 의외로 너무 조용했다. 며칠전 중공군 대병력이 기습적으로 나타나 양동작전을 벌이면서 수문교를 폭파했을 때 부대는 어차피 다리는 폭파 됐고 희생을 줄이라는 연대장의 명에 따라 일단 고지를 내줬고 이번에 되찾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며 올라갔는데 그랬던 것이다.

고지에 도착 해보니 중공군들은 대부분 얼어 죽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혹독한 추위속에서 저들은 사흘 넘게 아무런 보급품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부대가 본부 참호 무혈 입성에 성공하자 여러 곳에 산개해 있던 처참한 몰골의 중공군들이 손을 들고 몰려왔고 부대는 비무장 중공군에게 포위된 형국이 되었다. 이들을 모두 데리고 고지를 내려갈 일이 걱정이었다.

자꾸 육군을 비하하는 것 같아 안됐지만 육군 7사단 병사들 같으면 그냥 저들을 총으로 갈겼을 것이다. 하지만 해병은 그럴 수 없었다. 쉬쉬 하고는 있지만 실제 후동리에서 철수 할때 너무도 큰 피해에 악에 바쳤던 육군은 그때 까지 잡은 포로들을 총으로 갈기고 후퇴 했다.

9일 오전 해병 항공대는 C-119 수송기에 자재와 설비를 실은 뒤 800피트 상공에서 준비해 간 8세트의 조립교 자재와 설비를 투하했다. 조립교 세트 중 1개는 적진에 떨어졌고 1개는 땅에 닿는 순간의 충격으로 부서졌다. 8개 중 6개가 결국 해병사단의 수중에 들어왔다.

공병대대는 손빠르게 작업에 나서서 9일 오후 3시경 다리 복구를 끝낼 수 있었다. 철저한 대비와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해병 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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