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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39)

 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그날 군단장 아몬드 소장도 왔는데, 언제나처럼 무한 낙관론만 설파하다가 돌아갔다.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B-17과 B-29 폭격기와 콜세어기가 함흥까지 완벽하게 엄호를 제공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사단장과 두 연대장, 그리고 수송 대대장에게 무공 십자훈장을 수여했고, 돌아가는 길에 고토리까지 방문해 육군 31연대 2대대장 윌리엄 레이디 중령에게도 같은 훈장을 수여했다.

그 사이에도 부상병들은 긴급 치료를 받고 비상 비행장을 왕래하는 수송기를 타고 함흥으로 더러는 일본으로 까지 후송됐다. 사상자 항공기 후송작전은 유담리의 사상자 대부분이 하갈우리로 들어온 다음날인 5일에 절정을 이뤘다. 카트라이트 부대가 본부에 도착했던  4일 오후만 해도 8대의 수송기가 어두워지기 전까지 추가로 하갈우리에 들어왔다. 4대는 미 공군 소속이었고, 다른 4대는 제1해병비행단 소속 R4D 수송기들이었다.

부상자 후송 작전이 시작된 첫날  143명의 사상자를 후송한 이래 공수의 속도는 날이 지나면서 더욱 빨라졌다. 3일과 4일 사이 하갈우리에 집결한 부상자는 2천명 가량으로 늘었다. 이들 중 3분의 1은 심한 동상에 걸려 있었다.  12월의 첫 나흘간 2천5백명의 부상자를  후송했고 전체적으로는 무려 5 천명을 날랐다.  스미스 소장이 무리를 해가며 닦은 활주로는 적진에 두고 오지 않은 해병의 생명선 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희생자의 시신을 날라야 했던 하늘의 영구차이기도 했다.

그때 흥남 연포와 하갈우리를 몇 차례 왕복 비행했던 해병 항공대 조종사 폴 프리츠 대위는 며칠 뒤 함흥에서 만난 카트라이트에게 자신이 ‘하늘의 영구차’를 몰고 연옥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고백성사 때 한 말이지만 고백의 내용은 아니었기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존리에게도 나중에 만난 라루에게도 이 얘기를 들려줬다.

“중앙의 좁은 통로 양쪽으로 차곡차곡 누워 있었고, 뒤틀린 손발이 갈지자로 나와 있었습니다. 일상의 복장이 됐던 더럽고 피에 젖은 전투복을 입고 있는 이들의 뒤틀린 얼굴과 딱딱하게 얼어 있는 몸은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의 팔과 다리를 최대한 가지런히 접어 실었고, 한 방향으로 민 후, 비행 중 움직이지 않도록 밧줄로 고정해야 했습니다. 나의 비행만이 목숨을 바친 이들이 고향에서 적절한 장지(葬地)를 찾아 명예로운 장례식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로서는 엄숙한 마음으로 이 임무를 수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층 더 조심스럽게 하늘의 영구차를 조종했는데 마치 연옥의 한 골짜기를 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일반 신자들도 많이들 그렇지만 특히 군인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죽으면 천당으로는 곧바로 못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천주교에서 공식적으로는 연옥이 장소나 공간이 아니라 한 과정의 개념 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 연옥 이야기는 카트라이트 로서는 할 말이 많은 부분이었다. 어릴 때 필라델피아 성당의 신부님도 그랬지만 대신학교의 가장 학문적 성가가 뛰어난 교수 한분도 자신은 이 연옥이 있다는 교리 때문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까지 했었다.

해병 부상자들은 서로 자신은 경미한 부상이어서 수송기에 안 타겠다고 했고 육군 부상병들은 서로 타겠다고 해서 대조를 이뤘다.
아무튼 6일 오전 부터 본격적으로 부대의 육상 철수가 시작됐다.
철수를 시작하기 전, 하갈우리의 전 해병대원들은 지휘관들의 후방으로의 진격 명령을 받았고 다시 해병대가를 힘차게 불렀다. “몬테주마의 홀에서 트리폴리 해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조국의 권리를 위해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싸운다네!” 그들은 철수를 하는 병사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기충천해 있었다.
스미스 사단장은 이번에도 7연대와 1연대를 선두에 두었고 5연대에는 후위를 경계 하면서 마지막 정리를 하는 임무를 맡겼다. .

하갈우리를 출발해 고토리를 거쳐 황초령을 넘어 진흥리 수동리 올리를 거쳐 흥남으로 이르는 꽤 먼 거리의  장정이 시작 된 것이다. 장진호와 흥남을 잇는 126km 길이의 도로,  특히 하갈우리에서 수동리에 이르는 도로는 해발 1,000m가 넘는 외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완전히 노출된 상태에서 곳곳에 매복한 중국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적지않은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여정 이었다.

일단 고토리까지 18키로 구간은 중공군의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큰 피해 없이 후퇴 아닌 후방으로의 진격이 이루어져  고토리에 스미스 사령관의 본부 캠프와 통신대 캠프가  먼저 들어 섰다. 6일 늦은 오후였다.  다음날인 12월 7일 오후에 마지막 병력인 카트라이트가 있는 5연대 3대대가 고토리에 도착했다.
병력 1만여 명과 차량 1천 대 이상이 18km를 이동하는데 총 40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이다.

고토리로 진격하는 부대는 큰 전투가 없었다지만 카트라이트가 있던 후위의 5연대 특히 3대대는 진땀을 흘려야 했다. 뒤늦게 중공군 대군이 아군 다수가 떠난 하갈우리 캠프로 들이 닥쳤던 것이다. 6일 밤에 일어난 이 습격은 장진호 전투에서 휴먼 웨이브 어택(택틱),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용어가 확실하게 등장했던 대규모 습격이었다.  유담리와 신흥리에는 그리 넒은 벌판 개활지가 없었지만 하갈 우리에는 캠프 북서쪽으로 넒은 개활지가 있었다.

그 개활지로 3시간에 걸쳐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대병력이었다. 요즘 영화 같은데 보여지는 조명탄이 쏘아 올려지자 벌판의 사람 파도가 끝없이 펼쳐져 입을 딱 벌리게 하는 그 인해의 광경이 연출 됐던 것이다.
하지만 끝도 없이 몰려드는 중공군을 5연대는 전차, 야포,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등 모든 화기의 막강한 화력으로 방어했다.  고토리 쪽에서 날아오는 아군 포병대의 정확한 포격도 큰 힘이 됐다. 야간이어서 공중 폭격 지원은 받지 못했다. 조명탄이 쉴새 없이 터져 전장은 대낮 처럼 환했다. 해병은 그것들은 아낄 이유가 없었다.

B중대 오빌 맥멀린 중사는 M1 소총 8발로 중공군 8명을 사살하는 신기를 보여주었고, F중대장 우엘 피터스 대위는 백린탄을 다리에 맞아 살이 불타고 있고, 뼛속까지 태우고 있는데도 군의관에게 “군의관, 빨리 좀 할 수 없어요? 중대로 복귀해야 한다니까.”라고 외칠 정도로 군인 정신이 충만했다. 이는 해병 전사에도 수록된 내용이다.

3시간에 걸친 엄청난 포격과 응사에 적들은 절반 쯤 병력을 잃은 뒤 후퇴를 했다. 캠프는 어느쪽 방향에서도 뚫리지 않았다.  실은 선발 부대가 상당량을 싣고 갔기에 5연대의 총탄과 포탄도 거의 떨어져 가던 무렵이었다.  물론 연락을 받은 보급대가 다시 하갈우리로 급히 돌아오고는 있었지만 적들의 공세가 계속 됐더라면 어찌 됐을 지 모를 일이었다.

제5연대장 머레이 대령은 후일 “해병들이 유담리 탈출이며 하갈우리 철수를 성공한 것은, 중공군이 유리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는 대신, 굳이 포위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했기 때문”이라고 갈파 했다.  미군은 후퇴할 때 국민당군처럼 흩어져 산 넘어 도망가지 않고 당당하게 차량을 타고 사주 경계하며 도로를 따라 이동했기 때문에, 포위를 목적으로 산악 지역까지 가늘게 병력을 배치할 필요는 없었다는 얘기다. 미군을 그동안 상대했던 국민당군처럼 생각한 중공군의 오판이었던 것이다. .

고토리에서 다시 조우해 얘기를 들어보니 그곳으로 오는 동안  존리는 엄청난 일을 겪었다. 존리, 이종연은 앞서 떠난 7연대 행렬의 맨 앞쪽에서 150명가량의 중공군 포로들을 인솔하고 남하했다. 그때  본부 캠프에는 5백명 가량의 포로가 있었는데 원활한 통솔을 위해 3 그룹으로 나뉘어 후퇴에 동행 했는데 존리가 몇몇 해병과 함께 그 중 한 그룹을 맡았던 것이다. 존리는 진작부터 중공군 포로들을 관리하는 일에도 관계를 하고 있었다. 미군들은 존리가 자신들보다는 중국군과 의사소통이 수월 하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존리의 회상이다.
고토리 쪽으로 20리 정도 진군했을 때였다. 약 200m 정도 떨어진 옆쪽 철로 제방 위로 머리가 쑥쑥 올라오더니 일단의 중공군이 출몰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총을 쏘지 않았다. 도로 위의 행렬을 중공군인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중공군 포로들을 앞세운 미군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중공군 포로들을 향해 중국어로 “도망가라”고 소리쳤다. 이어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오기 시작했다.
종연은 몇몇 포로들과 함께 도로 옆 도랑으로 몸을 날렸다. “피융, 피융 하면서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상태였다. 바로 눈앞에 팍, 팍, 팍 하면서 총알이 박힐 때는 정말이지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도랑 속에서 존리는 ‘하나님, 꼭 살아 돌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게 해주세요. 살아 돌아가면 반드시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간절히 빌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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