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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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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37)

 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5연대장 레이먼드 머레이 중령(며칠 뒤 대령)은 유담리 캠프 에서 가진  예하  지휘관 들과의 마지막  작전 회의에서 스미스 사단장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후퇴가 아니다’는 의미를 더욱 분명히 했다.

“우리가 향할 바다쪽 뒷길에 더 많은 중공군이 우리의 진로를 막고 있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후퇴란 없다”.
‘다른 방향으로의 진격’이란 말은 미 해군의 장진호 후퇴 작전을 상징하는 한 마디가 됐다.

30일 부터 시작된 유담리 신흥리 후동리에 산재해 있던 해병 5연대를 비롯한 각 부대의 철수 작전은 12월 4일까지 치열하게 전개된다. 23 Km를 뚫고 내려 오는데 무려 총 닷새가 걸렸다는 얘기다.
해병대를 막으려는 적들의 공세는 그만큼 치열했다. 후퇴가 아닌 후방으로의 진격를 더 더디게 한 것은 전우의 시신과 몸을 가눌수 없을 정도로 다친 부상병들 때문이었다.
유담리에서 후퇴하던 2개 연대의 부상자 수는 어마어마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부상자 1천 명에 도보로 이동하는 부상자 8백 명이었다. 중간에 합류한 폭스힐에 주둔해있던 F중대의 부상자와 그곳 전투에서 발생한 부상자를 태울 자리가 없을 지경이 되자 지프 본넷 위에 3명씩 눕혀놓아야 했고 시신들은 트럭 흙받이(Fender), 심지어 대포의 포신에 묶어놓기 까지 했다.

역시 덕동고개는 죽음의 고개였다. 유담리에서 하갈우리로 진격하는 동안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덕동고개였다. F 중대가 고지를 사수하고 있었어도 전면의 개활지와 옆쪽 구릉에서 달려 내려오는 적들의 수는 어마 어마했다. 후퇴하던 부대는 도로 아래로 흩어져 엎드려 응사 해야 했는데 적들과 엉켜 있어 고지 위에서도 어떻게 박격포를 날리고 슈루탄을 던지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유담리에서 ‘죽음의 덕동고개’를 넘어올 때 5연대 전체에서 다수의 전사자와 수백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는데 자신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었던 전우들은 들것을 만들어 2인 1조로 완전 군장에 6백여명의 부상자들을 손으로 들어 옮기는 철수 행렬을 계속 했다. 전우의 시체를 실을 차량이 부족하면 자주포 포신에 매달기도 했던 곳이 이곳이었다.
”나는 괜찮아 이곳에 남아 한명의 적이라도 막을테니 너희들 먼저가”
움직일 수 없는 부상병들은 동료들을 생각해 남아 있기를 원했지만 해병의 전우애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카트라이트 소령은 가장 늦게 유담리에 도착한 5연대 3대대와 함께 행동했다. 3대대 병사들은 하도 후방으로 슈류탄을 던지느라 모두들 그 두터운 방한복 안 이었지만 손과 팔이 퉁퉁부어 있었다. 대대를 뒤쫒는 저들의 공세는 집요 했다. 카트라이트 신부는 그 사이에도 무수한 종부성사 기도를 해야 했고 주모경을 외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 자신이 종부성사의 대상이 될 뻔도 했다. 바로 옆에서 박격포탄이 터진 일도 있었다.
놀란 가슴의 주모경에 이어 신학교 시절부터 애송하던 시편의 구절이 절로 읇조려 졌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살갗을 찢어대는 혹독한 날씨에 극심한 피로로 행군이 정지할 때마다 다들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측방의 중공군도 상황이 좋지 않아 덕동고개 부근 말고는 제대로 공격해오는 부대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소규모 부대의 저격병 한두 명이 공격해왔는데, 그때마다 아군은 공습 요청으로 처리했다.

중간중간 자신들 방어호에 있던 중공군들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데, 숨 쉴 때마다 입김이 나오고 후레쉬를 비추면 눈이 불빛을 따라 돌아가서 그제야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도로 곳곳에 미군이 피워놓은 화톳불에 중공군들이 몰려와 해병들과 함께 불을 쬐다가 몸이 녹으면 다시 산비탈로 올라가는 일이 발생할 정도였다. 미군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군도 참 딱한 처지였다. 권력의 뜻에 따라 남의 나라 전쟁에 떠밀려 와서 아까운 청춘들이 제대로된 지원도 없이 속절없이 얼어 죽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23km 짧은 거리를 무려 이틀 반 동안이나 싸우다 엄폐하고 행군한 끝에, 12월 3일 오후 7시가 다 되어 선두부대가 하갈우리 방어선 북쪽 끝 검문소에 도달한 것을 시작으로 카트라이트가 있었던 후미 부대 3대대는 4일 오후에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해병대는 당연히 며칠 동안 세면과 면도도 못해 몰골이 엉망이고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곤에 절어 있었다. 오와 열에 신경쓸 겨를이 전혀 었이 흐트러져 있음은 당연했다. 4일 그날은 날이 맑았다. 마침내 오후 4시 무렵, 뉘엇 지는 겨울 해를 오른쪽으로 두고 멀리 하갈우리 본부의 초소탑이 보였다.

지휘관들은 후퇴 행렬 내내 조금만 더 참으면, 조금만 더 견디면 본부에 들어가 따뜻한 코코아와 치즈볼을 먹을 수 있다고 병사들을 격려 하곤 했다. 핫 초코렛과 노란 치즈에 버무린 마카로니, 치즈볼은 어린 병사들의 최애 메뉴였다. 그 아련했던 꿈이 현실로 다가 선 것이었다.

그때 저멀리 초소탑에서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다.
‘빰빠밤 빰빰 빰빠밤’
해병찬가였다.
선임하사 페리스가 돌아서며 고함쳤다.
“어탠션, 올드브리드 다이어몬즈, 어셈블 폴인! (차렷, 해병 1사단(별명) 집합!)”
병사들은 그의 구호에 힘을 얻어 순식간에 오와 열을 맞추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필드 마린, 포워드 마치, 투 마더 캠프 ! ( 해병 전원, 본부 고지를 향해 앞으로 갓!) ”
병사들은 발을 굴러가며 구호를 부쳐 행진 했고 이내 해병찬가를 불렀다.
“몬테주마의 궁정에서, 트리폴리의 해안까지. 우리는 조국의 전투에서 싸운다네. 하늘과 땅과 바다에서. 자유와 권리를 위해 최선봉에서 싸우며, 우리의 명예를 지킨다네. 미합중국 해병대”.

트력 본넷트 위에 너부러져 있어야 했던 부상병들도 내려서 행진하겠다고 헸다. 후일 한 병사는 그 기세가 얼마나 감동적이었고 대단했는지 시신들조차 벌떡 일어나서 행진에 참여 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고 회상 했다.
“당시 트럭에 실려있던 전사한 해병 전우들의 시신이 하사관님이 외치는 집합 구령을 듣고 다시 살아나서 트럭을 내려와 행진 대열에 합류할 것 같았습니다”

허기와 피로 그리고 공포에 쩔어있던 병사들은 페리스의 아일랜드식 억양의 구령에 맞추어 발을 구르며 행진했고, 머리를 높이 들고 해병의 노래를 부르며 검문소를 통과했다. 본부 부대에 있던 병사들이 우루루 몰려 나와 눈믈 콧물 범벅으로 전우들을 맞이했다. .

사지에서 돌아온 귀환병들을 맞이한 것은 전우의 눈믈 콧물만이 아니었다. 정말 병사들이 간절히 원했던 따듯한 막사와 난로 그리고 뜨거운 스푸와 잘 데워진 음식들이 저들을 맞이했던 것이다.
그때 하갈우리 본부에는 수백개의 대형 막사가 건립돼 있었다. 그 추운데서 돌아온 전우들을 맞이하는 본부 전우들의 밤낮 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이 막사 건설에 한국인 주민들의 노고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찌보면 황급히 후퇴한 북한군이 준 예기치 않은 선물(?)이기도 했다. (위 사진 철수 직전 하갈우리 텐트촌)

전방 유담리의 2개 해병 연대가 무사히 철수해서 하갈우리로 돌아오게 되면 혹독한 추위 속에 이들을 단 며칠이라도 따뜻하게 수용할 숙소가 필요했다. 그들은 전투와 추위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자면 엄청난 수의 텐트, 군용 막사를 건립해야 했다. 본부의 당연한 생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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