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46 F
New York
September 20, 2024
hinykorea
연재소설 타운뉴스

<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34)

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사단은 장진호를 왼쪽에 두고 고토리- 하갈우리- 신흥리 – 유담리를 지나 강계 쪽으로 진격하는 루트를 상정하고 있었고 일단 그렇게 진행됐다. 1연대가 하길우리에 도착해 사단 본부를 건설하는 동안 5연대와 7연대가 도착했고 두 연대는 이내 선봉에 서서 신흥리 유담리로 진출했다. 11월 22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사이 중공군은 걸어 들어오는 먹잇감을 기다리듯 해병1사단의 이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 제 9병단 소속 7개 사단이었다. 병력은 10만에 달했다. 미 해병 한개 사단을 꺾기 위해 저들이 병단이라 부르는 최고 단위 병력을 동원한 중공군은 이미 황초령 일대에 완전 매복한 상태였다.
북변 유담리와 신흥리 주변은 물론 나중에 퇴로를 막아서기 위해 개마고원 지대의 남단인 황초령과 진흥리 일대의 1081 고지 등 능선과 골짜기 마다에도 진작 부터 몸을 숨기고 있었다.
사실 중공군의 출몰은 예견 못한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다. 평안도 쪽 서부전선에서는 벌써 큰일이 일어났고 계속되고 있었다. 10월 초순 부터 심심치 않게 중공군이 전선에서 발견되고 있었고 그 포로들이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도 동경 사령부는 조 중 관계 때문에 형식적으로 소수가 들어와 있는 것이며 포로들의 말은 중국 특유의 허장성세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거칠 것 없이 전진하던 서부 전선의 미 8군이 평안도 운산에서 대규모 기습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마식령 산맥 산골에 매복해 있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중공군 대규모 병단에 속절없이 당했던 것이다.

서부전선 8군은 이 전투 이후 진군을 멈추고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경계에 들어가 대치상태를 보여야 했다. 이런 소식은 동부전선에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은 해병 1사단을 예정대로 장진호 지역 깊숙이 전진하라고 명령했고 해병대는 11월 15일 본대가 하갈우리에 들어서 본부를 꾸린 것을 시작으로 20일경 일단 장진호 북방 유담리 까지 진출 하기는 했던 것이다.
장진군의 군청 소재지인 하갈우리는 개마고원 초입의 평지에 위치한 곳이어서 사령부의 베이스 캠프로 제격인 곳이었다. 이곳 사령부에는 육군 7사단의 사령부도 함께 꾸려 졌다. 카트라이트 소령은 하갈우리(里)에 있는 사단본부 본부 사령실에 배속됐다. 스미스 사단장이 가장 먼저 명령한 것은 야전 비행장 활주로 건설이었다. 후일 따져 보면 대단한 심모원려 였다. 이 건설에 공병대와 함께 마을 사람들이 동원됐다. 동원된 한국인 인부들에게는 부대 시설물들을 설치하는 한편, 유엔군 수송기가 너무 먼 곳에 떨어뜨린 보급품들을 회수해 오는 일을 맡겼다. 마을 주민들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일당이 지급 됐다. 이 한국인 인부들을 모집하고 관리 하는 일에 존리가 큰 역할을 해야 했다.
해병대 공병들과 한국인 인부들은 11월 19일 부터 유담리 마을의 남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평지에 작은 활주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하갈우리의 해발 고도는 4000피트(1220m)였다. 주력 수송기였던 C-47 수송기의 이착륙을 위해서는 활주로 길이가 최소한 7600피트(2316m)는 확보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언 땅 위에 활주로를 공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공병대와 한국인 인부들은 불철주야 이내 얼어붙었겠지만 땀방울을 쏟아 냈고 마침내 북북서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길이 2500피트(762m), 폭 50피트(15m)의 임시 활주로를 만들어 냈다. 11월 30일의 일이었다. 카트라이트와 5연대 7연대는 아직 유담리, 진흥리 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였다.
그날밤 활주로가 짦아 엔진을 역회전 시키는 고도의 기술을 동원하며 수송기가 첫 착륙을 마쳤을 때 미 해병들과 한국인들은 서로 부둥켜 안으며 만세를 불렀다. 스미스 소장도 그답지 않게 주변의 참모들의 손을 아플 정도로 꼭 쥐고 흔들어 줬다고 했다. 짚차의 기다란 무전 안테나가 관제탑 역할을 톡톡히 했단다.
다음날인 12월 1일에는 첫 이륙이 진행 됐다. 조종사 밴플리트 해병 항공단 대위는 24명의 사상자를 태운 뒤, C-47의 바퀴를 활주로에 끝에 맞추고 엔진 출력을 최대로 증가시켰다. 그러고 이륙을 위해 밟고 있던 브레이크를 놓자 C-47은 튕기듯 앞으로 나아갔다. 기체 후미의 바퀴가 지면 위로 떠오를 때 조종간을 최대로 당겼고 비행기는 활주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휘청 하면서 이륙했다. 이런 식으로 떠오른 장진 야전 비행장의 첫 이륙 수송기 c47 브라운 호는 남쪽의 함준한 봉우리를 아슬아슬하게 넘어 상승한 후에 20분 거리에 있는 함경남도 함주군 연포로 향했다. 아래에서 해병들과 한국인 인부들은 열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장진 야전 비행장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또 있다. 비행장이 사용할만 하다는 보고가 올라오지 며칠 뒤 군사령부의 알몬드 소장은 전황이 불리하니 장비나 전장의 병사들은 나중이고 사단장 이하 주요 인력 들만 우선 수송기를 타고 흥남로 오라고 했다. 그러자 스미스 소장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희 육군 녀석들은 그따위 빌어먹을 일을 할지 모르지만 해병은 다르다. 우리는 결코 전장에 전우를 두고 오지 않는다.” 고 상급자에게 쌍욕을 던졌다고 한다.
이렇듯 악전고투 끝에 야전 비행장이 꾸려 지는 동안 한국인 동원 입부들과 친해진 존은 저들의 지하교회 예배에도 참석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본부 막사에서 만난 존이 아침부터 찬송가를 흥얼 거리고 있었다. 카트라이트가 5연대를 따라 유담리로 진출하던 당일이었던 11월 22일 목요일 아침이었다.
그가 흥얼거리고 있는 성가는 개신교와 구교가 함께 사용하는 몇 안되는 성가중 하나인 ‘홧어 프렌드 위 헤브 인 지저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였다.
“왠일인가 존, 무슨 좋은일 있는가?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나도 그 노래 참 좋아 하는데…”
“신부님 어제 대단한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면서 존은 전날 수요예배 얘기를 들려 줬다. 개신교 신자였던 존리 중위는 전날 마을 사람들과 예배를 보았다고 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수요일날 꼭 예배를 본다고 했다. 미국이나 서방에는 없는 전통인데 1910년대 평양 대부흥 운동당시 가장 큰 성령 불 세례가 수요일 저녁 부흥 집회에서 일어난 이후 확립된 전통이라고 했다. 신자들이 일요일을 기다리기 너무 머니 중간에 하루를 정해 달라고 해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장진의 예배당은 공산 정권에 의해 파괴 되었지만 그때까지 꽤 많은 주민들이 기독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정권 아래서도 은밀하게 모여 수요예배 일요예배를 보았다고 했다.
“신도들의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자신들의 교회가 한반도에서는 가장 하늘에 가까이 있던 교회라고 했습니다.”

가톨릭이건 개신교건 고지대 교회에서는 그런 얘기를 꼭 한다.
이종연(존의 한국이름) 은 20명쯤 되는 사람이 어느 집에 모여서 예배를 보았다고 했다. 처음엔 경계 하는 것 같았지만 정연이 목에 걸고 다니는 십자가 목걸이를 보여 주자 마음을 조금 열었고 찬송가를 힘차게 막히지 않고 부르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활짝 열면서 나중에는 기도까지 시켜서 기도를 빙자한 말되 안되는 일장연설을 했단다. 목사는 없었단다. 첫번 한인 목사는 일제때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죽임을 당했고 그후 부임했던 목사는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어디론가 끌려가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목사들이 주고 갔다는 오래된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보물처럼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장진에 교회를 처음 세운 것은 1910년대 유명한 감리교 선교사였던 노블 목사 부부라고 했다.

미국인 개신교 선배, 믿는이 들의 조선에 대한 손길은 카트라이트 신부의 앞에 여러군데 선한 그리고 진한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계속)

Related posts

팰팍 유기농원 여름 세일 시작

안지영 기자

동포청, 2024년 재외동포 문학상’ 공모

안지영 기자

<장편 이민 현장소설> ‘영웅의 약속’ 연재 89회

안동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