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장진호 그리고 황초령
푸른 눈동자가 유난히 맑았던 로버트는 그의 품에 안겨 “빌어먹을 맥아더가 너무 밉다”고 했다. 자신을 쏜 중국군보다 아군 최고 사령관이 더 밉다는 원망이었다. 로버트의 부상은 상대적으로 덜 심한 편이었다. 맥아더 총사령관에 대한 원망은 지난 10월 거의 보름 동안 수송선 안에서 멀미에 시달리면서 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 탈환에 성공할 때 까지 적지 않은 피해가 있었지만 해병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서울을 탈환하고 맥아더는 동경에서 날아와 한국의 대통령과 함께 성대한 수도 탈환식 까지 올리고는 냉큼 돌아가 전 해병대는 인천항으로 다시 모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줄 알고 기뻐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다시 상륙정을 타고 반도를 돌아 동해의 다른 항구로 상륙을 하라는 상륙 작전 지시였다. 그때 5연대는 벌써 서울 동북쪽 양평을 지나 춘천 인근 가평까지 진출해 있었다. 문외한이 봐도 엉뚱하기 짝이 없는 작전 이었다. 그때 장병들은 인천에 올 때와 마찬 가지로 어느 항구로 가는 지는 몰랐다.
해병 1사단 사단장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이 상륙 작전에 큰 불만을 표시했다. 더욱이 참전 미군 편제가 바뀌어 해병 1사단이 새로 편성된 10군단 소속으로 편제됐는데 군단장이 같은 계급의 육군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었다. 육군에서의 알몬드의 평판은 몹시 나빠 맥아더의 최고 아첨꾼으로 소문나 있었다. 알몬드는 겨우 한 살 위 이면서 스미스에게 첫 만남 때 “반갑네 용감한 젊은이(영맨) 자네 얘기는 많이 들었네”해서 해병 사단장과 주변 참모들을 머쓱하게 했다. 지와 덕을 겸비한 스미스 장군의 별명은 교수님이었다.
스미스 소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또 다른 상륙작전의 부당함을 동경 사령부에 타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승선일인 10월 12일에는 부두에서 이번 전투에서 전사한 129명 해병대원들의 추모식을 한명 한명 이름을 불러가며 두 시간 여에 걸쳐 진행했다. 그 사이에 작전중지 명령이 나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날 추도식에서 카트라이트 신부의 가슴을 유난히도 아프게 했던 전사자는 윌리엄 쇼 중위 였다. 며칠 사귀지 못했지만 심장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그랬다.
“루터넨 윌리엄 쇼, 코리아 평양“ 인사 참모에 의해 그의 이름이 호명되고 출신지가 어색한 발음으로 낭독될 때 다른 장병들은 어리둥절 했지만 카트라이트의 가슴은 찢어졌다.
영화배우 뺨치게 잘생긴 그는 같은 G2 소속 이었다. 윌리엄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한국 일제 강점기의 저명한 개신교 선교사 얼 쇼목사의 아들인 그는 한국의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청년이었다. 당연히 한국어가 능숙 했다. 명석했던 그는 고교와 대학을 본국에서 나왔는데 그때 하버드 대학원에서 역사학 전공으로 박사 코스를 밟고 있었다. 그는 제2의 조국인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즉각 해군에 장교로 자원 입대해 해병 1사단에 배속 받았고 인천 상륙 작전에서 본국에서 합류한 1사단 본류의 일원이 되었다.
나고야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미시건 호에서 처음 만났는데 서로 통하는 구석이 많아 꽤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그 중에는 한국의 근대 역사와 미국 개신교의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윌리엄에 의하면 미개의 땅 조선을 제대로 개화시킨 주체가 미국 기독교였다. 일본 제국주의 침탈에 분연히 항거한 기미년 3.1 운동이 가능했던 것도 미국 개신교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염을 토했었다. 그는 또 이번 전쟁 한국전쟁의 발발에는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지론을 폈다. 포츠담에서 얄타에 이르는 2차대전 전후 처리의 수뇌회담의 비사와 문제점에 대해서도 윌리엄은 정연하게 꿰고 있었다.
같은 G2에 배속된 역시 유명한 개신교 한국 선교사 언더우드 집안의 장손 데이비드 언더우드 또한 그 논리에 열성적으로 동조했다. 그는 원일한이라는 근사한 한국 이름도 갖고 있었다. 한국의 명문 고려대학교에 다니다 입대했다는 한국군 통역 장교 존 리 중위도 옆에서 그들을 거들었었다.
존 리는 부산에서 합류했다. 데이비드와 존 리를 만난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할 만큼 좋은 인연이었다. 한국말이 능통한 인재 윌리엄의 전사에 놀란 참모부는 데이비드 언더우드를 후방인 서울에 남게 했고 존은 같이 배를 타고 와 지금 하갈우리 본대에 있었다.
윌리엄 쇼는 해병 1사단이 치룬 서울 수복 전투에서 가장 까다로운 난관이었던 연희고지 전투에서 그만 첫날 전사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전사였다. 5연대 산하 한 소대의 소대장이 부상을 입어 후송을 당했는데 윌리엄이 자원해서 임시로라도 그 소대를 맡겠다고 해서 썩 내키지 않았던 참모장은 미심쩍어 하면서도 허락을 했는데 부임 첫 전투에서 그만 그렇게 됐던 것이다. 매복해 있던 공산군의 기관총에 당했다고 했다. 그날 얼 도 그 전투 현장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남산 방송국 쪽으로 가는 부대와 함께 해 주었으면 하는 참모장의 의견에 따라 그쪽으로 갔는데 그예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28살의 젊은 나이였다.
쇼 중위와 나눴던 ‘이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그날, 10월 12일 편치 않은 마음으로 상륙 전함에 오른 카트라이트는 해병들과 함께 보름 이상을 그 배에서 꼼짝 못해야 했다. 제2 상륙작전의 기착지는 동해안 원산 항이었다. 그런데 이를 쉽게 간파한 북한군은 그 앞 바다에 온갖 소련제 기뢰를 깔아 놓았던 것이다. 그 기뢰 제거 작업에 열흘 이상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그 사이 원산 먼바다에 도착한 전함 속의 장병들은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큰 배가 달리지 않고 출렁이는 바다에 떠 있기만 한다면 그 어떤 강인한 수병도 멀미가 나기 마련이다. 전투도 하기전에 진이 빠진 형국이 아닐 수 없었다. 대신 존리에게 한국 근대사와 기독교에 대해 꽤 자세히 더 들을 수 있는 시간을 갖기는 했다.
원산에 상륙한 날짜는 10월 26일이었다. 이미 원산은 한국군에 의해 평정돼 있었기에 미 해병은 머쓱하게 행정 상륙이라는 해괴한 말을 동원하며 원산에 입성했다.
카트라이트 소령에게 그나마 다행한 일은 그리 늦게 상륙하는 바람에 서부 전선에 있다가 원산으로 달려온 후배 로날드 신부를 만난 것과 이튿날인 27일 일요일, 원산 성당에서 그곳 주민들과 신자 병사들과 함께 모처럼 제대로 된 미사를 올렸던 일이다. 물론 성유나 성체, 성 포도주를 제대로 갖출 수는 없었지만 부서져 거의 폐허가 돼 있기는 했어도 제대가 마련된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는 얘기다. 그래도 군인 청년들이 부르는 성가는 참으로 우렁찼기에 더 감동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참상이 자신 앞에 펼쳐 지리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날 자신을 다시 감동시켰던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신단 말일까? 카폰이 실종됐다는 이야기도 그때 로날드에게 들었다.
원산으로 상륙한 1해병사단은 함경도로 진출해 금야, 정평을 지나 함흥을 우회 해 황초령과 부전령에서 시작되는 개마고원 지대에 오른 뒤 장진호를 거쳐 북한군 지휘본부가 있는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로 진격할 참이었다. 그곳에서 평안도 쪽으로 진격한 8군을 만나 공산군을 반도 밖으로 쫒아 버린다는 것이 동경 사령부의 작전이었다.
원산에서 북상하면서 함흥 일원 까지 그들의 앞은 거칠 것이 없었다. 1사단의 선봉은 늘 5연대와 7연대의 몫이었지만 말한대로 장진호 진출은 사단 직할 연대인 1연대가 맡았다. 그 연대에는 공병대대가 속해 있어 장진읍 위쪽에 있는 하갈우리에 사단 본부를 설치하기로 했기에 그랬다.
하갈우리 까지 진출하는 동안에도 큰 전투는 없었다. 황초령을 넘으면서 교전이 있었지만 이내 소수병력인 적들을 격퇴 할 수 있었고 몇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랬는데 그 포로들이 좀 이상하다고 했다. 북한군이 아니라 중국군이었던 것이다. 저들은 총 몇 방 쏘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기 바빴다. 유인 전술이었던 것이다. 미군 정예 부대가 엉뚱하게 배안에서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적들은 곳곳에 매복을 마쳤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