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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28)

 안동일 작

신앙이란 무엇인가,   천주실의

  “그 시절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 그리고 염원 같은 게 담겨있는 백성들의 이야기라고 생각 합니다. “

동섬의 질문에 상문이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때 직암의 셋째 아들인 상문은 열 다섯 이었고 동섬의 장남인 상덕은 열 아홉이었다. 두 청년은 아버지들처럼 절친했다. 상문은 제 친형인 상학보다 상덕을 더 따랐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걸 알았다면 상문이 자네는 신화를 제대로 이해 한 걸세, 역시  권씨 집안의 학동 답군 그래,  단군신화를 이땅에 새삼 일깨우신 자네 할아버지들 께서  섭섭하시지 않겠네 그려.”

 그랬다. 동섬의 말이 괜한말은 아니었다. 실은 동섬의  거론으로 새삼 다시 떠올리게 되기는 했지만  직암의 선조들, 그러니까 상문의 할아버지들은 빼어난 유자들 이었음에도 대개들 황당무계하다고 백안시 했던 단군신화를 다시 정리해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직암에게는 11대 조인 조선의 개국공신 양촌 권근 선생과 9대조인 권람 선생이 그들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인 두분은 표전문 사건으로 나오게 된 ‘응제시’ (應製詩)  라는 몇편의 시를 매개로 건국 초기 조선 지식인 사회에 울림을 던졌다.   

 건국 초기 조선과 상국인 명나라 두 나라 사이엔 매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게 제대로 터진 것이 바로 우명한 표전문 사건이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낸 표문의 언사가 매우 불손하다며 트집을 잡아 명나라 황제인 홍무제(주원장)가 매우 분노했다면서  글을 지은 정도전을 당장 명으로 오라고 소환한 사건이다. 

 당연히 직접 갔다가는 정도전의 목이 날아갈 판이라 정도전 대신 책임지고 명나라로 향한 사람이 당시 문장제일 성균 대사성 권근이었다. 명나라에 도착한 권근은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홍무제를 알현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도중 즉흥적으로 홍무제가 내어준 시제(詩題)를 받고 그 운에 따라 24수의 시를 짓는다. 이것이 바로 ‘응제시’다.  권근의 응제시 24수를 본 후 크게 감탄하고 마음을 푼 홍무제는 기념으로 자신도 직접 시를 지어 권근에게 내린다.  

  홍무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온  권근은 크게 환영받게 되고 영광을 기리는 의미에서 국가에 의해 응제시 24수와 어제시 3수가  그냥 ‘응제시’라는 제목으로 묶여 시집으로 간행된다. 이후 손자인 권람이 이 27수의 시에 주석을 붙여 1462년(세조 8년)에 편찬한 것이 바로 이 응제시주(應製詩註)다. 

 권근이 지은 응제시는 전체적으로 오히려 꿋꿋하게 조선 역사의 유구함과 독자성,  땅의 아름다움과 신비함, 풍요로움 등을 묘사하는 한편 애써 명태조의 덕을 칭송하고 중국과 조선의 유구한 우호를 표현했다. 

 그러다 보니 단군조선의 내용이 나오는데 권근의 시 에는 요(堯)임금 원년 무진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자 사람들이 단군이라 불렀다는 다분히 중국을 의식한 간단한 시구가 있는데 권람이 단 주석에는 이를 완벽히 보충해 상제(上帝)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웅(雄)이 천부인 3개를 받고 삼천인과 함께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 환웅 천왕(桓雄天王)이 되었으며, 바람, 비, 구름의 신을 거느리고 인간사 360여 가지 일을 주관했다고 적었고  이후 웅녀에 대한 이야기 까지 나온다.  

“그래 우리 권가 조카님은  단군신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람자(字) 할아버님이 쓰신 응제시주에 나와 있는 부분들은 어려서 부터 외우고 있습니다. “

 그랬다. 권씨가의 학동들은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뗀 다음에는 할어버지들의 시를 외우는것이 집안 관례였다, 직암도 지금까지 근자 할아버지가 쓰셨다는 ‘성남 봄’ 이란 시를 줄줄 외운다. 아디가서 무슨 싯구라도 읊으라하면 이내 그 싯구가 튀어 나오곤 했다.   

“그래서 그 내용이 제대로 파악이 되던가?”

“ 숙사께서 말씀 하시는 은유와 상징까지는 다 파악하고 이해 하지 못했지만 우리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상문은 동섬을 숙사라고 불렀다. 지금같으면 당연히 숙부라고 부르라 했겠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 어떤 대목이 특히 그랬을꼬?”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생각 하게 했습니다. 호랑이는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 나갔지만 곰은 끝까지 인내로서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아직 자네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것 같은데…”

동섬이 직암과 금대를 쳐다보면서 짐짓 눈을 크게 뜨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것 뿐인가?

 여기서 직암도 금대도 깜짝 놀랄 대답이 상문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실은 천주이신 천제 환인께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아들인 환웅님을 세상에 내려 보내 사람을 하늘같이 여겨 세상을 널리 이롭게 했다는 대목이 가장 가슴에 다가 섰습니다..”

 동섬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 물었다.

“천주라 했는가?”

“예.”

“자네 할아버님의 응제시주에는 그런 말이 없을텐데…”

“실은 천주실의에서 읽었습니다. “

“네가 천주실의를 읽었단 말이냐?”

꽤 놀랐는지 평소의 하대가 튀어 나왔다.

“네 큰 형님 서탁에 있었던 책을 가져다 저 혼자서는 다 이해 할 수 없어서 상덕이 형님과 함께 보았습니다.” 

“상덕이 너도?”

“네.  함께 읽었습니다.”

동섬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직암은 상황이 짐작 갔다. 직암의 천주학 공부는 집안내 에서 비밀이 아니었다. 맏이 상학은 천진암 강학에도 참여 하고 있었고 상문은 자기도 가고 싶다고 조르고 있는 터였다.  금대가  이 상황에 조금은 놀란 눈치다. 

“이해가 쉽게들 되더냐?”

동섬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두 청년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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