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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23)

안동일 작

신앙 이란 무엇인가,  너무도 가난한 나라

동섬의 논지는 사대부 양반들에 의해 건립된 조선 왕조는 왕권, 국가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기에 온 백성을 공적 신민(臣民)으로 지배할 수 없었기에 인구의 절반을 양반 계층과 함께 사민(私民)으로 지배했다는 얘기다. 양반들은 사유재산의 핵심이었던 노비를 늘이는데 혈안이 됐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으며, 국가는 양반을 제압할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요컨대 조선 왕실, 정부, 양반 계층 사이에서 생겨난 절묘한 세력 균형이 기형적인 조선 노비제로 표출되었다는 것이 동섬의 진단 이었다.

이땅에 처음부터 이렇게 노비가 많았던 것은 아니란다. 동섬의 기억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인 690 경에 서원경(西原京· 청주) 4개 촌락을 조사한 문서를 보면 460명의 인구 중 28명이 노비로 기록되어 있단다. 그러니까 6푼 남짓 되는 것이다. 고려때도 다르지 않아 조선을 개국하기 직전인 1391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받아낸 식읍(食邑)에서도 비슷한 기록을 볼 수 있단다. 이곳에 사는 162명 중 노비는 7명으로 약 4푼에 불과했다. 그랬던 것이 100년 후엔 인구의 약 4할 정도가 노비로 바뀐 것이다. 노비 인구가 크게 팽창한 것은 고려의 유민이며 무수히 많았던 가병들을 양민 호적인 양안에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후 이땅 노비들의 비참함과 애환은 더 말할 여유가 없는 일이었다.

“우리 남인 실학자를 자처하는 선배들 중에 서도 이 문제를 깊이 따지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도 나를 슬프게 하는 일이지. 반계 선생도 성호 선생도 완화 만을 얘기했지 폐지를 주창하시지는 못했지 않소.”
“형님이 남인이기는 한 거유?”
금대가 한마디 했다.
“ 남들이 다 남인이라고 하니 그렇게 인정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그래, 이것도 큰 문제야, 아비가 남인이면 아들은 따질것 없이 남인이 돼야 하는 세상. 스승이 노론이면 따져볼 겨를도 없이 노론편에 서서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 이 모습이 이 조선땅 사대부들의 모습 아닌가. 이런 천하에 못된 것도 세습이 되는 이런 세상이란 말이오.”

동섬은 혀까지 끌끌 찼다.

“붕당의 작폐에 대해 성호 스승께서 유명한 말을 하시지 않았는가, 당파가 생긴 뒤로는 아무리 총명해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중립을 지켜 시비를 가리는 자를 용렬하다고 하고, 붕당을 위해 죽어도 굽히지 않는 자를 절개가 뛰어나다고 한다. 또, 영예와 치욕이 갑자기 뒤바뀌니, 사람들이 어찌 붕당을 만들어 싸우지 않겠는가 하셨지”
동섬의 조선 폄하론은 게속 이어졌다.
“조세 제도는 어떤가?  나라 살림의 근간이라는 조세 제도가 조선에는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수탈만이 있을 뿐, 따지고 보면 녹봉이 문제야, 녹봉을 제대로 주지 않으니 수탈을 할 수 밖에… 금대 자네는 현감 사또로 있을때 녹봉을 얼마나 받았는가? ”
금대의 표정이 당혹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군자는 눅봉을 따지지 않는다는, 이를 거론 하는 것은 소인배나 하는 일이라는 속다르고 겉 다른 허장성세가 만연했기 때문 이리라.
“잘 모릅니다. 외직은 그런것 더 더욱 안 따지는 터라, 제 경우에는 호방이 유능한 이라서 그에게 일임 했었습니다. 종6품 녹봉에 준해 갖다놓으라고 하기는 했죠.”
“종 육품 월 녹봉이 얼나나 되는지는 알고 있고?”
‘쌀 15두 콩 9두쯤 되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정확히 기억은 못하겠습니다.”
“이렇다니까, 아무튼 그 녹봉으로 생활이 되기나 하는가? 삼정승, 판서 같은 최고위 정1품 관료들의 녹봉이 월 쌀 33두. 콩 10두로 되어 있다네. 그것도 숙종조에 되서야 정해진 일인데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하지. 아무튼 조선땅에서 녹봉으로 생활하는 청백리는 사라진지 오래일세, 그러니 너도 나도 뒷구멍으로 챙길 수 빆에…금대 자네는 수증은 어떻게 했는가? “

녹봉은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녹(祿)과 특수한 경우 지급되는 봉(俸)을 합친 말이다. 조선 초기까지는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일 년에 두 차례 지급됐다는데 이후 세종대에 이를 3개월에 한 번씩, 즉 1년에 4차례 지급되는 것으로 개정했다가 숙종 년간 부터 매달 지급되는 것으로 했단다. 조선 전기의 경우 전체 녹봉에 소요되는 미곡이 약 10~15만 석 정도였으나, 임란 이후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면서 감록이라 하여 지급량이 점차 줄어들어 후기에는 4만 석 내외로 축소되었다. 관료들은 녹봉을 제대로 받는 달보다 제대로 받지 못하는 달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안 그래도 생활하기에 부족한 녹봉인데, 그나마도 감록되는 통에 조정 관료들은 진작에 월급으로는 생활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조정 관료들은 월급을 주 수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이들에게는 따로 수입원이 있었으니, 바로 수증(受贈)이다. 수증은 말 그대로 선물을 받는 것인데, 현물을 만지는 지방관들이 조정의 중앙관료에게 보내는 것을 딱히 꼬집어 수증이라 불렀다.

이는 명백한 뇌물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 수증은 관례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래서 관리의 지방관 임치는 배려이자 필수 이기도 했다. 더욱이 나랏일을 하는 지방관의 아전들, 이방 호방 등에게는 아예 녹봉이란게 없었다는 얘기는 진작에 널리 알려져 있다. 지방의 아전 뿐아니라 중앙관서인 내의원이나 광흥창 같은 곳도 실무자인 주부들에게는 땨로 월급이 없었다. 월급을 주지 못하니 알아서 해먹으라는 얘기였다.

“그 또한 호방에게 일임했었지요.”
‘수증을 하기는 했군”
“사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폐습이 언제 까지 이대로 계속되도 되는가 싶었지요.”
잠시 말이 없었다.
“제가 있던 비인고을이 작고 가난한 고을 이었는데도 이 녹봉 관례 때문에 목민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호방이나 이방도 딱히 신관이 편하고 살림이 윤택한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가난한 나라여서, 또 대개는 착한 백성이어서 그랬을게다. 어디서 부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지는 작은 고을 목민관으로서는 한계가 있었음이 자명했다.  답답한 노릇이다.

현감은 현령(종5품)이 관할하는 현보다 작은 고을의 원님이었다. 당시 지방의 말단 기관장인 역(驛)의 찰방(察訪, 종6품)과 동격인,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다.

잠시 또 침묵이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에서야 대놓고 물어 보네만 금대 자네는 왜 출사할 생각을 했는가?”
일신도 가환의 생각이 궁금했다.특히 출사해서 몇년을 지낸 그는 지금 뭘 바라고 뭘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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