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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21)

 안동일 작

 5,  신앙 이란 무엇인가,  천렵놀이에서

‘유붕이 자원 방래하니 불역 낙호아’는 아무리 유학에 냉소적이 됐다지만 직암에게도 참으로 맞는 말이었고 백마디 설명이 필요없지만 따져 볼수록 심오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은 좋은 벗을 만나 함께 뜻을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절친한 붕우,  소문난 수재 이가환이 양근에 찾아 와서 인근의 선배 조동섬과 세사람이 함께 송학천 변으로 천렵을 나간 때는 강학이 간헐적으로 계속 되던 1781년 여름 이었다. 아들 상문과 동섬의 아들 상덕이 불은 자신들이 피우겠다며 따라 나선 흥겨운 소풍이었다.

스승 성호선생의 종손자 이기도 한 금대 이가환은 직암과는 동갑으로 어려서 부터 죽이 맞는 동문 동학의 벗이었다. 금대는 진작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있었는데 비인 현감직을 끝내고 몇달 쉬다가 그  위명도 쟁쟁한 이조 정랑을 제수 받고 출사를 앞두고 있던 때였다.  말하자면 그날 천렵이 승차 기념 연회나 놀이인 셈인데,  저 노론 벌열들 같으면 미호나루에 유람배를 띄워 기생연회 뱃놀이를 벌였을 터였지만 남인들의 전통은 그러 하지 않았고 특히 직암에게는 그런 일은 천부당 만부당 이었다.
이나마의 소풍도 한창 바쁜시기 들에서 김을 매는 농부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 조심스럽고 면구스러운 터였다.

금대는 유난히도 동섬을 따랐다. 호칭도 그는 동섬을 시정 상인들 처럼 형님이라고 불렀다. 한 동네에 같이 살아 가깝기로 말하면 직암이 훨씬 가까왔는데도 말이다.  조동섬은 자를 이름과 같은 동섬으로 썼다.
감호 집에서 송학천 연변 까지는 시오리 쯤 됐기에 한식경을 걸어야 했다. 아직 오전 인데도 햇살이 따가왔지만 모처럼의 여유에 발걸음은 경쾌 했다.  주로 동무들의 안부며 근황 이었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언주골 어귀를 지나칠 때 기어코 아는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참외 농막에서 일을하다 땀을 식히고 있던 한서방을 만난것이다.
“작은 어르신, 천렵 가시는구먼요?”     뒤에 상덕이 들고 있는 접이어망과 통발을 보고 하는 소리였다.
“어 그러네, 모처럼 한양서 동무가 와가지고…”
“안녕하십니까? 마님“
한서방은 동섬에게도 반가히 아는 체 목례를 했지만 외지 손님인 금대에게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래 참외 농사는 잘 되었는가?”

“올해 장마가 길어가지고 소출이 영 시원찮습니다.”
“그런가 걱정이 많겠구만, 그래도 낙심말고 수고하시게”
덕담을 건네고 다시 한마장쯤 걸었을 때 한서방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행에게 달려왔다. 그의 손에는 참외 여나문개가 들어있는 망태기가 들려 있었다.
“영 단맛은 시원치 않지만 이따가 맛이나 보시라고…”

“하 이사람아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소출도 없다면서… 아무튼 잘먹겠으이…”
한서방은 참외 망태기를 상문이 지고 있는 솟단지 지게에 올려 놓았다..
“제가 지고 가서 모셔야 하는데,  보시다 시피 일손이 없어서… 우리 양근의 자랑 두 도련님들 기특도 하시지 집에 아랫사람들 많을텐데… 이렇게 손수 지게를 지시고…”

“무슨 소리 하시는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놔두고 놀러가는게 영 미안스러운데…”
이렇게 시작된 그날 송학천 천렵은 직암의 내면에서 천주학과 유학의 관계를 확실히 정립하게 한 뜻깊은 계기가 됐다. 조선 그리고 이땅의 역사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 백성의 내일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시간이었다.
그날 동섬과 금대 두 사람에게 특별히 천주학 얘기는 하지 않았다. 두 사람도 그즈음 직암이 천주학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겠지만 그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직암은 천진암 강학이 간헐적으로 계속되던 그 무렵. 시간이 나면 묵상, 명상에 들어 나름대로 천주학을 내면에서 정리하곤 했다. 천주의 천지 창조의 정신, 인간 창조의 뜻을 생각하고 마리아와 야소의 생애를 그려보고 하면서 믿음, 신앙 이라는 것과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 시간은 자신과 일행 도반들이 천착해 왔던 유학에 대해서도 다시금 정리하는 그런 시간이기도 했다. 묵도라 불리우고 조과 만과라 해서 아침저녁으로 올려야 하는 천주교식 기도는 이때 까지는 시행하지 않았다.
천주교의 가르침은 간단하지만 들여다 보면 심오했다. 세상은 천주가 창조했고 인간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평등하게 만들면서 감사하고 감탄 하면서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탐욕이 그런 감사와 감탄 그리고 사랑을 잃어 버리면서 죄악을 일삼게 됐고 세상은 난세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천주는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사랑의 가르침을 다시 강조 하면서 인간들을 죄악을 씻어내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매달았고 자신이 구원자 메시아임을 증명하기 위해 부활을 선 보였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천주 께서는 이땅의 헐벗고 굶주린 약한 사람들을 위해 예수를 보내셨다는 가르침이 가슴에 찌르르 다가 왔다.  일단 이를 믿고 사랑을 실천 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든다는 것이다. 직암은 이때 까지만 해도 천국이 죽어서 가는 낙원이 아니라 살아 생전에 이승에서 이룩하는 완벽한 세상을 천국이라 이해하는 축에 속했다.

믿음이란 무었인가. 또 신앙이란 무었인가. 또 깨달음이란… 그런 것들이 우리네 인생에 던지는 의미란…직암 내면의 의문은 꼬리를 물고 계속 되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과연 천주학이 유학을 대신해 조선의 정치 이념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때까지 직암이 아는 천주교의 가르침 중에 세상의 일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없었다. 그런점에서 유학의 가르침은 사뭇 구체적이었다. 그런데 절친한 문우 조동섬은 이 나라 조선의 역사와 유학을 보는 눈이 사뭇 달랐다. 사실 일신의 유학관은 양근땅 일유(逸有) 동섬에게 영향 받은 바 컸다.
결단코 과거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동섬은 조선의 역사를 훈구와 사림의 대립, 그리고 사색 당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대부, 양반들의 양민에 대한 수탈의 역사로 보고 있었다. 조선이 유학을 숭상하면서 정치과잉의 나라가 됐다고 진단하고 있었다. 동섬의 역사 지식은 남달랐다. 그도 그럴것이 스승 안정복을 도와 대단한 역사책 동사강목을 편찬해낸 주역이기 때문이다. 동섬은 조선이 유학을 국기로 삼으면서 부터 이런 폐단은 예정돼 있었다고 했다.

“유학이라는 학문이 워낙에 정치적인 학문이기 때문이지. 유학의 근본이 무언가. 효 아닌가? 이는 충을 강요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강령 아닌가. 유가에서 이상적 인간으로 친다는 군자란 무엇인가. 이리저리 같다 붙이지만 따져보면 군주의 아들, 다스리는 이를 말하는게 아닌가?”
동섬에 의하면 조선은 이땅의 역사속에서 있었던 국가 중에서 가장 취약하고 쇠락한 나라가 됐다는 것이다. 나라의 최소 근간인 군사력으로도 최악이라고 진단 했다. 조선은 천년전 삼국 중에 가장 약한 백제와 전쟁을 해도 대패 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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