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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7)

 안동일 작

양근 마을의 빼어난 형제

가성직 제도는 거의 3년 동안 의외로 잘 굴러 갔다. 그런데 89년 전라도 전주지역 지부장 격인 가성 신부 유항검이 교독서를 읽다가 장가를 든, 가정을 꾸린 이는 사제가 될 수 없으며 사제가 아닌 이가 세례 이외에는 성사를 행할 수 없으며 이는 독성에 해당한다는 구절을 발견했고 이를 중앙 본부격인 한양에 알렸다. 주교 권일신은 가성 신부들과 논의 끝에 이를 문의하기 위해 자신의 유능한 제자 윤유일을 북경 교회에 밀사로 보냈다. 그랬더니 그곳 구베아 주교가 그런 가성직 제도는 천부당 만부당 하다고 당장 중지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주교로서의 그의 공생활은 끝나게 되고 그는 ‘방낙 어르신’으로 교단의 존경과 흠숭을 받으며 신도회장 급 지도부 신자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윤 밀사를 통해 전해온 주교의 명령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청천 벽력이 따로 없었다. 이에따라 권일신 등 지도부는 주교며 신부 자리를 내려 놓고 평신도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격론 끝에 제사를 지내지 말자고 전국에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이승훈 정약용 형제 등 일부 양반 신도들이 교회를 또 한 번 멀리하게 된다.
기제사 문제는 직암 으로서는 사실 얘기가 많은 사안이었다. 장형 철신 등 그 집안 권씨 형제들은 조선 양반가의 제사 의례 문제를 진작부터 신경 써 오면서 비판 하곤 했었다. 너무나 형식주의 의례에 빠져 폐해가 심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권씨 형제들은 집안 제사를 남들과는 다르게 지내고 있었다. 여자들도 참례했고 굳이 상복도 입지 않았다. 아무튼 결국 이 문제 때문에 진산사건이 일어나고 천주교단의 수괴로 지목된 직암이 사전 당사자인 윤지충 권상연에 이어 그예 희생되고 말았다. 1791년 가을의 일이다.
79년 천진암 강학의 본격적인 천주교 공부를 시작한 해에서 따져보면 12년째 되는 해였다. 그 12년, 치열했던 그의 행적은 어떤 계기와 각성을 통해 그렇게 전개됐던 것 일까.

천주교 개신교를 막론하고 믿음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으로 성령이 찾아와야 굳건해진다고 얘기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까지 사용된다.
1917년 정사년, 파티마에서 작은 아이들 앞에 성모가 나타났듯이 1950년 기축년 동해 함흥 앞바다 에서 라루 선장의 뇌리에 예수가 나타 났듯이 권일신 선생은 1779년 기미년에 성모를 만났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조선의 성모였다. 조선의 가여운 백성들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성모였다. 파티마 보다 꼭 140년 전에 조선 땅 퇴촌의 퇴락한 불교 암자 천진암에서 조선의 성모 마리아를 만났던 것이다. 과연 어떤 모습 이었을까, 본격적 시작은 천진암의 그날이었다.

  4. 천진암 강학 그날

문이 벌컥 열리며 광암 이벽이 들어설 때 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의 도포는 눈에 젖어 있었지만 형형한 그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덕조, 못 온다고 하더니 왠일인가?”
“스승님, 도반님네들 제가 오늘 진정한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가 외치듯 전한 말이었다. 강학이 열리고 있는 천진암 한 켠 요사채였다. 꽤 밤이 으슥한 때였다.
1779년 눈이 펑펑 내리던 한 겨울의 경기도 광주 퇴촌의 쇠락한 고찰에서 일어난 일이다. 언급한대로 당초에 일동에게 천진암을 소개한 이는 덕조 였다. 덕조는 이벽의 자다. 천진암 뿐만이 아니라 앵자봉 고개 넘어 주어사도 광암 덕조가 스승과 동학 들에게 안내한 곳 이었다. 광암은 10대 초반 부터 녹암의 서당에서 나와 있을 때면 외가가 있어 친숙했던 이곳들을 찾아 유학 경전을 공부하곤 했다. 그곳 스님들도 영민하고 헌출한 유학 소년 덕조에게 기꺼이 방사를 제공했단다.
그날의 강학 때는 집안에 일이 있어 아예 참석을 못한다고 알려 왔었는데 집에 있던 그가 신묘한 경험을 하고는 만사를 제치고 달려왔던 것이었다. 당초 그날 강학은 앵자봉 넘어 주어사에서 열리기로 됐었는데 그곳에서 부녀자들을 위한 큰 법회가 열리는 바람에 천진암으로 장소를 옮겨야 했고 그래서 광암은 주어사로 먼저 갔다가 다시 밤길에 눈보라를 헤치고 천진암으로 달려 와야 했다.

광암은 그날 새벽 천주를 직접 만났다고 했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깜빡 졸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흔들고 다시 책에 집중 하려는데 홀연 방 저쪽에서 무슨 기척이 있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천주님이 나타나셨던 겁니다. 모습은 명확하지 않았는데 제 방 저쪽에 공중에 떠 계시듯 계시면서 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덕조야 덕조야 왜 너는 하늘의 벼슬을 할 생각을 않고 땅의 벼슬을 하려 하느냐’고 역정 섞인 호통을 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쪽을 응시하면서 “아닙니다. 저는 땅의 벼슬을 탐하지 않습니다. 과거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도 그분은 노여움을 멈추지 않는 기색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답답해서 제 손으로 여러 번 제 가슴을 쳤습니다. 그러면서 그 순간에 정말 내가 세상의 부귀 공명에 초연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순간에 천주께서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읽던 책을 마저 읽고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자꾸나. 하늘의 벼슬을 하게 되면 네가 걱정하는 조선의 일도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느니라” 하시고는 홀연히 사라 지셨습니다”
모두들 놀라 광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놀란 정신에 멍해재서 무심코 펴 있던 책의 쪽을 내려다 보려니 또렷이 그분의 형상이 보여 지면서 책 속의 하늘 천자(字)가 튀어나와 제 가슴에 와 박히는 것이 아닙니까? 옷 위에 새겨지는 게 아니라 옷에 스며들어 맨 가슴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을 살펴보니 이렇게 글씨가 새져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덕조는 자신의 웃 저고리를 풀어 헤쳤다. 정말로 그의 왼쪽 가슴에는 하늘 천자가 새겨져 있었다. 약간 삐뚤고 군데 군데 희미한 곳이 있기는 했지만 주먹 만한 하늘 천자였다.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덕조의 곁으로 우루루 둘러섰다. 그 젊잖은 녹암 형님도 자리에서 일어나 덕조 곁으로 다가섰다. 그때 방안에는 녹암 형님을 비롯해 직암과 만천 이승훈,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형제 그리고 한성 김원성, 또 젊은 측으로 이억총과 직암의 아들 상문과 조카 상택이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군. 그것 참”
거의 동시에 서너 사람이 그 말을 내뱉었다. 그때 김원성이 “덕조 자네가 가슴을 칠 때 실핏줄이 터진 게지” 그랬다. 그는 매사를 따지기 좋아하는 이였다.
“아닙니다. 가슴을 칠때 생겼다면 전체적으로 멍이 들어야지 어떻게 이렇게 글이 새겨집니까?”
덕조가 힐끗 그를 보며 한마디 하고는 옷을 추스리고 다시 자신의 말을 이었다.
“그때 읽고 있었던 책이 바로 이 책 입니다.”
덕조가 들어 보인 책은 바로 ‘교요서론’이었다. 전에 강학때 한번 같이 훑어본 책이었다.
교요서론은 몇년 뒤인 1781년 청의 백과전서인 사고 전서에도 포함될 정도로 매우 유명한 책이다.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사도신조입니다. “
직암은 그때 책을 들어 그 부분을 가리키는 덕조의 모습에 찬란한 금빛 후광이 영롱하게 비추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만천도 정약전도 보았다고 했다. 약종은 모르겠다고 했다. 덕조가 그때 큰 호롱불 두개를 함께 올려둔 방안 횃대를 등지고 앞에 서있기는 했다.
“그래 진정하고, 차근히 자세한 얘기 좀 해보시게, 다들 좌정 하고…”
녹암의 이 말에 다들 자리에 앉았고 광암은 그대로 서서 얘기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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