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양근 마을의 빼어난 형제
그 무렵 의외로 한문으로 된 천주교 안내 서적이며 해설서는 그 종류가 꽤 다양했다. 널리 알려진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비롯해 칠극, 교요서론, 성서광익, 성년광익, 성서직해 등 무척 많다. 그리고 생각 보다 꽤 박학 박식했던 우리 초기 성조들은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대두 까지도 알고 있었다. 이 부분 역시 뒤에 다룬다.
이 가운데 주보성인과 관련 해서는 대뜸 ‘성년광익’이라는 책을 주목하게 되는데 이 책은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중국 선교사 마이야(De Mailla, 馮秉正) 신부가 한문으로 쓴 책으로 일년 365일 그날 그날 축일을 맞는 성인들의 귀감 되는 믿음과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전기책이다. 성인 · 성녀들의 전기를 약술 하고 날마다의 경언(警言), 주요 성경의 구절을 열 두 달로 나누어 엮고 있어 성경이 전해 지지 않았던 그 무렵 소이경전(중심경전)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일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천신만고 끝에 조선에 입국한 이후 이른바 정식 첨례 미사가 시작 됐을 때도 이 성경광익과 그 한글 해설본이라 할 수 있는 성서직해가 미사 대본 역할을 했다.
그런데 1개월을 한편으로 날짜순에 의해 365명의 성인·성녀의 전기를 13편에(6월이 두편)담고 있는 마이야 신부의 광익에는 하비에르 프란치스코가 나와 있지 않다. 또 하나의 필자 미상 성년 광익이 전해지는데 전자와 내용이 조금 다르며 훨씬 계몽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역시 하비에르 성인의 축일인 12월 4일에는 다른 성인이 수록돼 있다. 그렇다면 다른 책에서 하비에르에 대해 읽고 알았다는 이야기 인데 아무튼 당시 성조들의 서학 탐구열 독서열은 상상 이상이었다.
실제로 권일신 선생은 전도의 성인이라는 세례명을 입증이라도 하듯 조선 천주교의 기둥이 되는 사람들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지속적으로 전도했다. 충청도의 내포 (예산 서산 홍성 등 서쪽 지방의 총칭) 출신으로 형 녹암의 제자 이존창과 전주의 소문난 유학자이자 부호인 유항검, 역관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통했던 최창현과 그의 조카 최인길, 천안의 유학 천재 이총억, 북경을 여러차례 왕래해 밀사 역할을 했던 윤유일, 앙근의 숨은 유일(遺逸)이자 제반 학문의 거두 조동섬 등 조선 천주교사의 한 획을 긋는 걸출하고 소중한 인물들이 모두 그에게 전도된 이들이다.
권일신이 그들에게 천주학 정신, 천주교 신앙을 전함으로써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기 일원에 그 정신과 신앙의 중추가 마련될 수 있었고 그의 시후에는 이들이 적극 나서 교단을 재건하는데 주역이 된다. 다시 말하면 권일신 선생은 천주교단 전국 조직을 만들어 낸 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흔들리고 의심하던 정약종 선생을 굳건한 지도자가 되도록 한 이가 바로 직암이며 직암이 세상을 떠난 뒤 정식 사제 초빙, 본격 교회 성립의 숨은 공로자 조동섬 선생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다블리 주교와 달레 신부는 그 누구보다도 권일신 선생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는 후일의 일이고 1770년대 중반 부터 퇴촌에서 강학을 하면서 서학을 접하고 공부했던 권일신 선생 등 남인계열 도반들은 초반에는 경세유표 차원의 보유론적 입장에서 서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지만 광암 이벽의 정열적인 점화로 천주교 사상이 당시 조선의 열악하게 획일화된 정신세계와 붕괴된 사회 질서를 개혁할 수 있는 활로라고 굳게 믿게 된 뒤 좌고우면 하지 않고 죽는 날 까지 매진했다.
그 무렵 정조가 즉위하면서 남인들에게도 다시 출사의 길이 열렸던 것도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사회 개혁에 더욱 관심을 갖게 했던 큰 요인 이었음엔 틀림없다.
권선생이 초기에 가장 큰 역점을 두고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회 개혁 사상 으로서의 천주교 사상이었다. 특히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자유 사상이 그랬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믿음은 천진암 남인계열 도반 대부분에게 그의 해석과 주선을 통해 절실하게 다가섰던 것이다.
하지만 남인이라고 해서 모두 이들 같지는 않았다. 개중에는 천주교 서학을 요설이라 해서 공격하는 이들도 많았는데 이들을 공서파라 부르고 천주교 신앙을 지켜려는 측을 신서파라 부른다.
이벽과 권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신서파들의 천주교 공부의 그 기간이 꽤 길었다. 주어사 천진암 강학 이후에도 대략 4-5년 가량 그 공부의 기간이 이어졌는데 그 사이 이들은 구할 수 있는 책을 백방으로 수소문해 읽었고 들을 수 있는 천주교 신앙에 대한 정보와 소문을 모두 모았던 모양이다.
이때 북경을 왕래했던 김범우 최창익 최인길 등 중인 역관들의 가세는 너무도 큰 힘이었다.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조선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최고 최후의 보루라고 믿게된 초기 강학 도반들은 그 가르침 대로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동지들을 규합했던 것이다. 북경 성당을 직접 다녀올 수 있었던 역관 도반들의 경험담은 직암 광암 등 신서파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몽매의 동경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던 1783년 획기적인 기회가 찾아온다. 열성 도반의 한 사람인 만천 이승훈이 북경에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그의 부친 이동욱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발탁됐는데 마침 사신단 규모를 예년의 배로 늘이면서 그해에는 서장관까지도 자제 군관을 동반 할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자제군관 제도야 말로 고답적인 조선조가 택한 몇 안 되는 좋은 제도였다. 정사와 부사가 자제들이나 가까운 젊은 인척을 호위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사신단에 합류 시켜 청나라의 선진 문물과 학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제도가 바로 자제 군관 제도 였다. 연암 박지원도 자제군관으로 청을 다녀 왔고 추사 김정희도 자제군관으로 청을 다녀 올 수 있었다. 홍대용 박제가도 마찬가지다. 연암은 1780년에, 추사는 만천 이승훈 보다 늦은 1799년에 청에 다녀왔다.
만천 이승훈이 자제 군관으로 청에 가게 된 것이야 말로 조선 천주교 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때 권일신과 도반들은 쾌재를 불렀고 이벽이 적극 나서 꼭 천주교 성당을 다녀오라고 신신 당부했고 강학 도반들은 십시일반 노잣돈을 모아 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거기에 더해 가능하다면 영세를 받아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던 인물이 직암 권일신 이었다. 형식이 내용을 규제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던 직암은 이승훈의 영세를 강력히 권했던 것이다. 일단 영세자가 한명이라도 있어야 교회가 꾸려지고 신앙이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벽 권일신 등 성조들이 파악하고 있는 당시 북경의 천주교 사정이 매우 정교 했다는 점이다. 당시 북경에는 큰 천주교 교당이 두 곳 있는데 남당은 주교좌 성당으로 권위와 세가 북당에 비해 크지만 보수적이고 고답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니 세례까지 받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그 경우에는 보다 개방적인 북당을 찾아야 한다고 일러줄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만천은 먼저 남당을 찾았지만 그곳 사제들은 천주를 믿고 있다고 찾아온 이승훈을 기특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세례를 주지는 않았다. 이승훈은 며칠 뒤 (1784년 2월) 북당을 찾아 더 큰 환대와 며칠간의 시험 과정과 가르침을 받은 뒤 그라몽 신부로 부터 세례를 받는다. 조선 최초의 세례 신자가 된 것이다. 이승훈의 신앙 고백 가운데 그라몽 신부를 가장 추동했던 대목이 조선 땅에 교회를 꾸리겠다는 각오 였다.
그라몽 신부는 그곳 북당의 주임신부도 아니었고 소속 사제도 아닌 몬시뇰 급의 원로 식객 신부였다. 그라몽 신부는 후일 만천에게 세례를 주었다는 이유로 남당에 부임해 온 구베아 주교로 부터 마카오로의 추방 처분을 받게 된다.
그라몽 신부는 앞서 말한대로 관용적인 예수회 소속이었고 구베아 주교는 상대적으로 고지식한 프란시스코회 소속이었다. 그 무렵에 천주교 내 계파간 수도회간 알력과 경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치열했다. 그 무렵 예수회는 교황청과 무척이나 뒤틀려 있어 해산 명령에 준하는 2백년간 전교 금지 처분까지 받은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