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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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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4)

  안동일 작

  3.  양근 대감마을의 빼어난 형제

직암(稷庵) 권일신(權日身)은 1742년 영조 18년에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태어났다. 양근은 양평의 옛 지명으로 후일 양근과 지평이 합쳐져 양평이 되었다. 그의 집안은 조선 개국공신 권근, 세조의 정란공신 권람의 직계 후손으로 일대에서는 대우받는 명문가의 하나였다. 세조는 양근 강상면 일대를 권씨 집안에 하사했다는데 사람들은 남한강변 마을을 대감마을 이라 불렀다. 지금은 양평읍으로 편입돼 있지만 읍내와는 남한강을 사이에 하고 있어 당시에는 매우 독립적인 마을이었다.
집안은 대대로 기호 남인(畿湖南人)에 속했다. 그의 선조들은 현종 때 궁중의 제사 의례가 빌미가 된 기축옥사며 장희빈의 페서인이 이뤄진 숙종 때의 갑술환국 등 당쟁이 있을 때마다 서인, 노론의 공격을 받아 관직을 잃고 낙향해야 했는데 학식이 뛰어났던 부친 권암(權巖)은 영조의 탕평책으로 복권돼 한때 관찰사를 지내기도 했었다. 권암은 슬하에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일신 이외에 철신 (哲身), 제신(濟身), 득신(得身), 익신(翼身)이 그들이다. 딸은 셋을 두었다. 부친은 일신이 30대 였던 1776년에 세상을 떠났다.
철신 일신 등 형제들은 부친에게서 기초 학문을 익혔고 남인 계열의 거유 성호 이익(李瀷)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워낙에도 영민한 철신은 이내 성호학파의 대들보로 인정받았다. 그런 맏이 철신과 더불어 셋째 일신 또한 학문과 덕성이 소문나게 뛰어나 몇 년 후 부터는 이들 형제에게 학문을 배우러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양근 대감마을로 모여들었다. 광암 이벽도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벽이 양근으로 녹암 권 철신을 찾아와 그 문하에 든 것은 그의 나이 14세 때인 1768년. 주어사와 천진암의 강학은 그 10년 뒤인 1778년 부터의 일이다.

한편 소년 일신은 성호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성호의 학풍을 이었다는 소문난 역시 남인계열 실학자 순암 안정복의 문하에 들었고 스승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된다. 후일 공서파(功西派)가 된 장인이자 스승인 순암의 천주학에 대한 완고함은 후일 직암 큰 인생 갈등의 하나가 된다. 일신은 부인 순흥 안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게 된다. 장남 상문은 부친 못지않게 천주교 신앙에 독실해 순교했고 부친들(백부 철신에 양자로 입적)과는 달리 교황청의 인가로 시성(諡聖) 됐다. 일신의 부인 안씨도 부친 보다는 남편을 좆아 독실한 천주교 신앙인으로 살았다.

언급한 대로 일신은 이벽의 안내로 알게 된 퇴촌의 주어사와 천진암에서 강학을 여는 주역이 된다. 강학은 그 무렵 녹암 수하로 몰려든 제자들 가운데 영재들을 엄선해서 그 성원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실은 철신과 일신은 서학을 알기 전 부터 경세유표의 실학 공동체, 경세의 조직을 꾸리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외가인 내포 지역이며 영남 지방을 그 근거지로 삼으려 야산과 전답을 마련 하기도 했고 이병휴 홍낙안 등 실학 동문들과 연통을 주고받고 있었다. 강학도 그 일환으로 여겨 진다.

철신은 어땠는지 몰라도 그무렵 일신에게 조선의 유학은 본래의 꿰에서 벗어나 매우 잘못 호도된 길로 접어들고 있는 병폐중의 병폐 였다. 그의 생각에 본래도 유학은 정치의 학문이었고 위정의 학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가에 집중된 학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이런 위정의 학문이 공리공담격인 성리학적 예학과 만나면서 차별을 조장하고 갈등과 착취를 정당 하는 몹쓸 이데올로기로 변했다는 것이 그즈음 그의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계급과 신분 차별을 혐오했던 일신에게는 유학의 기득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강과 질서 이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배경이 약자의 편에서 만민 평등을 주창하는 천주학에 더 빨려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철신 일신 형제들은 학문은 물론이고 먹고사는 일에도 남달랐다. 형제들이 한 마을에 살면서 어린 조카들이 자신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 하며 번잡을 떨어도 눈쌀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집안에 가득한 아들과 조카들, 노복의 자식들도 마치 친형제처럼 지냈고, 집안에서 기르는 짐승들도 길이 잘 들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신 정약용은 그 집에 들어가 열흘 쯤 지내야 누가 누구의 자식인 줄 알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형제간에는 노비나 전답, 창고의 곡식까지 내 것 네 것 구별 없이 함께 사용했다. 이런 화기애애한 집안 분위기는 누구라도 그 집안에 들어서면 온화한 기운이 충만해서 마치 훈훈한 향기가 온몸에 스며드는 듯 하다고 했다.

광암 이벽이 1784년 음력 9월, 수표교 자신의 집에서 북경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만천 이승훈으로 부터 자신의 세례명을 세례자 요한으로 정해 만천에게 세례를 받은 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양근 고을의 권씨 집안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이벽의 기대에 가장 먼저 부응해 처음 입교한 이가 일신이었다고 사서들은 애기하고 있지만 저간의 사정으로 볼 때 권일신 선생은 이미 천주교에 마음을 활짝 열고 있었다. 광암이 그때 양근을 찾은 것은 그를 새삼스레 전교 한다기 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기 위해서 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무튼 권일신 선생은 이전의 각오와 학습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이때 전교의 성인 하비에르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으로 이승훈으로 부터 세례(대세)를 받은 이후 열성으로 전교에 적극 나섰다. 부인과 아들 등 자신 집의 식구들을 먼저 전교했고 주변 친구와 친지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자 그들 대부분도 곧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의 학문과 행실의 권위가 신뢰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직암을 따라나선 조동섬 이존창 유항검 윤유일 등 초기 주요 인물들은 믿으면 천당 간다는 천주사상에 단박에 감화를 받았다기 보다는 직암이 권하는 세상을 제대로 사는 그런 세상으로 바꾸려 하는 조직과 공동체에 가입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가 선교의 거봉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주보성인으로 택해 세례명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방지거 제(사)물락’ 으로 했다는 것도 우연치 않다. 프란치스코는 인도와 일본에 천주교를 전한 전교의 성인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라틴어 표기와 스페인어 표기를 혼용한 방식이며 권일신 성조 시대를 포함해 이전에는 중국어 팡지거(方濟各) 에서 음차해 프란치스코를 ‘방지거’ 라고 했고 하비에르를 ‘사물락’ 이라고 표기했고 그렇게 불렀다. 우리말로 방지거 사물락 이었다는 얘기다.
당시 이벽, 이승훈, 권일신 선생들의 천주교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생각하는 것 보다 넓고 깊었던 모양이다. 세례자 요한이나 성 베드로 같은 이름이야 워낙 중요하고 유명한 이름이었기에 알 수 있었겠지만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까지 알고 있었고 흠숭 했다는 것이 그렇다. 요한이나 베드로가 예수와 동시대의 인물이라면 하비에르 프란시스코는 14세기의 인물이다.

언급했듯이 하비에르는 지명이다. 나사렛 예수가 그렇듯이 하비에르의 프란치스코 라는 말이다. 그는 일본과 인도 등 아시아에 천주교를 본격적으로 전한 예수회의 동량 선교사제였다. 그렇다면 이벽 선생과 권일신 선생 등은 하비에르 프란치스코 성인을 어떻게 알았을까. 역시 책이다. 기록에 따르면 초기 성조들이 금과옥조로 삼았던 것이 ‘성경광익’ ‘성서직해’ 그리고 ‘성년광익’이라는 책이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인데 그 무렵인 16세기 후반 까지도 중국에서는 가톨릭 성서, 성경의 출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조선에는 더더욱 성경 원본이 전해지지 않았다.

근래에 들어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3X9=27이라고 외운단다)을 기본으로 한다고 얘기되는데 이는 개신교 쪽의 입장이고 천주교에서는 구약에 5권을 추가해 공식 권수로 삼고 있다. 서기 378년 로마 공의회와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성경 목록을 구약 44권, 신약 27권의 총 71권이라고 결정했고 그후 구약에 2권을 추가해 46권을 공식 구약 권수로 하고 있다. 신약은 공히 27권이다.

아무튼 성경이 없었던 초기의 성조와 신자들은 성경광익 성서직해 등 이른바 천주교 서책이라 알려진 서적들에 수록돼 있는 조각 조각, 구절 구절들의 말씀을 성경으로 여겨 귀히 여기고 암송했다.
성경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을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저간의 사정이 있다.  중세 시대 이후 성경은 성직자 들만이 볼 수 있는 귀한 보물이었고 라틴어 희랍어 혹은 히브리어로 돼 있어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었다. 이 성경을 일반 대중들도 볼 수 있게 일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해 출간한 이가 바로 마틴 루터다. 종교개혁은 성경의 보급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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