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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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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實錄)소설> 순명(順命) 그때 거기 지금 여기 (연재 13)

 안동일 작

 뉴튼, 그리고 파티마의 기적

표지가 떨어져 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다불뤼 주교의 비망록이었다.
마사 여사의 말에 따르면 그 무렵 수도원에는 입당하는 수사가 크게 줄어 인력난을 해결 할 겸 봉사자들을 일하게 했다고 한다. 당초 베네딕토 수도원은 남성 수사만의 수도원이었는데 입당하는 수사가 줄면서 운영의 어려움을 겪자 일손을 도움 받기 위해서 였다. 그때가 80년대 후반 이었다. 그날 마리누스 수사는 도서실의 봉사자 아그네스 여사로 부터 전에 부탁했던 다블리 주교의 비망록 낡은 필사본을 건네 받았던 것이다.

그날부터 노 수사 삭막한 방의 램프는 늦게 까지 켜 있어야 했다. 수사는 책에 빠져 들었다. 몇번이고 성호를 긋고 두 손을 모아야 했다.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은 그 무렵 천주교계 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한국천주교회사’라는 책의 근간이 되는 초록이다.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해 1866년 3월  충청도 수영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순교 할때까지 20년 넘게 조선 땅에서 사역하면서 김신부가 처형된 병오 박해등 안타까운 광경을 여러차례  목도 하면서 조선 천주교의 수난사를 써야 겠다는 결심을 했고  자료들을 백방으로 수집해 정리했고 이를 기회 있을 때마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알브랑 신부 에게 보냈다. 알브랑신부는 이 절절하고도 장엄한 사연들을 제자들에게 필사 하도록 시켰다.

‘한국 천주교회사’ 는 이 전교회의 끌로드 달레 신부가  필사본을 바탕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성립기원 및 순교사를 수록해 10년 쯤 뒤인   1874년에 간행한 한국 천주교 역사서다.  달레는 조선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다블뤼 주교가 보내온 자료를 정리해 상·하 2권, 1,167 쪽의 방대한 양의 책을 출판했다. 대단한 작업이다. 특히 그 서설은 한국과 한국 문화를 15개항으로 나누어 기술한 최초의 한국학 개론으로 꼽히기도 한다. 한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서구 문헌으로 평가를 받아 영국,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백방으로 찾아 봤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베네딕토 수도원 부설 분도 출판사에서 불역 한글본으로 번역돼 간행돼 있다. ) 본론은 1권 중간 부터 2권 끝까지 이어지는데 한국천주교회의 기원에서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의 한국천주교회사로 성립 기원과 인물 순교사를 중심으로 기술했다.

아무튼 마리누스 수사가  정식으로 출판된 천주교회사를 읽었건 그 근간이 되는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필사본을 읽었건 이 책들을 통해 알게 됐다고 단정하는 필자는 다블뤼 주교의 비망록에  손을 들어 주고 싶다.  권선생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그의 마지막을 묘사한 것은 다블뤼 주교 였고 달레의 책에는  그보다 작은 분량으로 상대적으로 건조한 서술에 그치고 있다. (비망록도 최근에 불역돼 역시 분도출판사에서 책으로 간행됐다.)

비망록 인물편 앞부분에 나오는 권일신 성조의 이야기는 단박에 시선을 끄는 대목이 많다. 초기에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라루 선장, 마리누스 수사의 경우에도 그랬을 것이다. 무엇보다 불혹의 나이가 넘어 신앙을 접한 권일신 선생, 거친 바다를 돌다 나이 들어 수사가 된 라루 선장,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서 무엇보다 그런 권선생이 배교 했다는 대목에 대해 마리누스 수사는 남다른 관심을 지니고 상념에 상념을 거듭 했을 것이다.

“글쎄 이 정도면 순교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도대체 순교란 무엇인가?”
“성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네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 순간 프란치스코( 권 성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 까?”

다블뤼 주교는 비망록에서 주교는 이례적으로 권선생의 배교 논란에 대해 전레없이 개인적인 안타까움을 매우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다블뤼 주교는 그가 배교 했다고 결론지었고 달레는 이를 검토없이 따르고 있다. 아무리 곱씹어도 아쉬운 대목이다.
권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아끼던 정조 임금의 간곡한 권유로 일종의 반성문인 회오문을 쓴 것으로 돼 있어서 순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블리 주교와 달레 신부는 공히 권 선생 뿐만 아니라 이벽 선생, 이승훈 선생의 죽음도 순교가 아니라고 결론 짓고 있다. 공히 죽음 전에 배교를 했기 때문 이란다. 이 부분은 한국 천주교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

다블뤼 주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그때 형리들은 80세의 노모가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바다 저편으로 유배가면 어머니와 헤어져 그 임종도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그러면서 배교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 않고 그를 유독 아끼는 임금에 대한 극히 ‘작은 굴복’만을 권고했다. 권일신은 이 생각에 절실히 감도 되어 그 자신이 또는 어떤 사람들이 단언하는 것처럼 같이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를 대신하여 어떤 굴복의 표시를 했다. 그 굴복의 표시가 ‘천주의 가르침은 공맹의 도리와 달라 허망하고 괴이하다’ 라는 표현이었다.”
다블리 주교는 이 대목 바로 아래 이례적으로 “우리는 진실이 우리에게 쓰지 않을 수 없게 한 이 페이지를 우리 역사에서 찢어버리고 싶다.”라고 까지 자신의 감정을 적었다. 그러면서도 “부모에 대한 너무나도 당연한 마음에 서 일어난 일이었음을 고려해야 하며, 조선교회의 발전을 위해 애쓴 그간의 행적이 하느님 앞에 서 은총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다블리 주교는 다른 사람 특히 이승훈의 배교 행각에 대해서는 혹독한 비난과 비판을 내리고 있다.
한편 다블뤼 주교는 비망록에서 권일신 선생이 가성직 제도에서 주교를 맡았다고 쓰면서 이를 높이 평가 하고 있는데 이런 가성직 제도의 결정이 나오기 전의 권 선생의 피정 사실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천진암 주어사의 천주교 강학 못지 않은 조선 천주교사의 일대 사변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천착하고 탐구해보고 싶은 사건이 바로 권선생의 당시의 피정이다.

다불뤼는 이때 일을 이렇게 썼다.
“그는 규칙적인 피정(避靜)을 할 결심을 하고, 자기의 계획을 더 쉽게 실천하기 위하여 용문산에 있는 어떤 적막한 절로 들어갔다. 친구 중에서는 오직 한 사람, 조동섬 만이 그를 따라갔다. 절에 도착한 그들은 피정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주님과 그 성인들을 본받고자 하는 바람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신심 수업, 즉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면서 절에서 8일을 지냈다.”
마리누스 이 대목에서 특별히 권선생에 대해 남다른 동병상련의 관심과 애착을 가지게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굳이 동병이라는 아픔의 성어를 떠올린 것은 수사의 길, 헌신의 길은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를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의 명을 따른다, 운명을 따른다는 뜻에서 순명이라 한다.
사제 서품식이나 수사 입당식에서 집전 주교가 본명을 부르면 큰 소리로 “네, 누구누구 지금 여기 있습니다.”하고 손을 번쩍 들고 나가 온 몸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데 그 광경은 눈물을 펑펑 흘리게 된다는 본인이나 쳐다보는 이 모두에게 감격 그 자체다. 신심이 매우 일천한 나도 이 광경을 담은 기록물을 보고 울컥 하는 마음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성스러운 부름, 성소에 따라 일생을 헌신하는 순명 아닌가. 이 감격이 남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자 출발이다.

마리누스 수사의 순명의 과정은 어땠을까. 그도 분명히 피정의 과정을 겪었을 것이며 손을 번쩍 들고 “하나님의 종 마리누스 지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나가 땅에 엎드렸을 것이다.
물론 그런 오체투지의 예식은 몰랐었겠지만 일단 라루 선장보다 170년 쯤 먼저 순명한 직암 권일신 선생의 사연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글이 권일신 선생의 전기 소설은 아니기에 그의 생애를 편년체로 탐구할 이유와 여유가 없기에 일단 그의 생애를 개괄적으로 둘러보면서 어떤 부분을 집약해서 탐구하고 어떻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인지 알아보기로 하는 것이 순서 일 듯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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