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흥남, 크리스 마스의 기적
라루 선장은 이내 부두로 진입해 플랫폼에 배를 대라는 지시를 내렸다. 외항에서 내항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기뢰가 무수히 깔려 있다는 데도 그랬다. 선원 중 어느 누구도 선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어느 선원도 여전히 선적돼 있는 제트 연료 때문에 위험 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시하지 않았다.
“우리들 각자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촌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마도로스의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캡틴이 배를 몰고 들어가라고 지시하자,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부두에 들어가 그 힘든 작업을 할때도 한 사람도 투덜거리거나 작업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
배가 소해정의 안내로 천천히 부두에 닿자 라루 선장은 또 다른 일등 기관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밸러스트 워터를 최대한 빼낸 뒤 화물칸도 최대로 비우고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해 그곳에 피란민들을 승선시키십시오. 그리고 승선한 피란민들이 만명에 달하면 나에게 보고 하세요.”
“만명이요? 캡틴”
“그렇소”
빼야 할 벨러스트 워터의 양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대략이나마 계산을 해야 했다. 최소한의 소지품을 합쳐 일인당 70 킬로 그램이라 치고 만명 이면 70만 킬로, 7백톤이다. 그리 무거운 중량은 아니었다. 밸러스트 워터, 평형수는 무게중심을 아래로 쏠리게 해 선박이 적당한 수면에서 복원력과 추진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화물을 싣지 않았을 때는 밸러스트 탱크에 바닷물을 채운 채로, 화물을 실었을 경우에는 밸러스트 탱크를 비운 채로 항해를 하게 된다. 빅토리호는 부산에서 화물을 내렸기에 평형수를 채우고 흥남에 온 참이었다.
러니를 비롯해 두 스미스 등 선원들은 는 그 때의 일을 평생을 잊지 못한다.
뉴욕의 스미스, 멜의 회고다.
“일단 벨러스트 워터를 대략 빼낸 뒤 너무 아까운 제트유는 빼고 나머지 실려있던 잡다한 군수품을 하역해야 했습니다. 꽤 시간이 걸렸죠. 우리 빅토리 에는 3층으로 나눌 수 있는 총 5칸의 화물칸이 있었습니다. 1칸의 화물칸은 옆으로는 철판으로 2칸, 혹은 3칸으로 또 나눌 수 있도록 설계돼 있었죠. 선원들은 사람들을 더 효율적으로 많이 태우기 위해 화물칸을 넓게 나누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철판 간막이들을 최대로 밀어 내자, 3층 합쳐서 13칸 정도의 공간이 마련됐습니다.”
화물칸 외에는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에도 없었다. 일부 기록에 탱크며 장갑차 등을 바다에 버렸다고 나와 있기도 한데 이는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과장이다. 비행장 건설에 쓰이는 한국서는 ‘앙고르’ 라 부르는 구명뚫린 철판이 꽤 있었다고 한다. 라루선장 이하 전 선원이 이 작업에 매달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다음 사람들의 승선이 문제였다. 플로리다 스미스, 벌리의 회상이다.
“화물선이기에 짐을 싣는 그물 크레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사람이 탈 수는 없었죠. 우리는 임시로 나무판자로 아래 바닥을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사람이 타면 크레인으로 들어올렸죠. 한 그물에 15명 정도가 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화물칸에 치례로 내려놓았죠. 갑판이 아니라 해치를 활짝 열고 직접 화물칸 까지 내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갑판에 내려 놓으면 다시 좁은 철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또 꽤 많은 피난민들이 갑판에서 내려진 그물 사다리를 타고 배로 직접 올라왔습니다. “
22일 오후 5시, 피난민 싣는 작업이 시작돼 작업은 밤새 이어졌다. 피난민들은 갑판으로부터 가장 밑 쪽 3층 아래인 다섯 번째 화물창 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항해일지에는 승선 작업이 12월 22일 밤 9시 30분에 시작돼 다음 날인 23일 아침 11시 10분까지도 끝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급조된 크레인 승선장치를 통해 제5화물창 1층 부터 승선을 시작해 5화물창 2층 3층이 이내 가득 찼고 밤 10시경 제4화물창 승선이 시작됐고 이어 밤을 새워 1,2,3 화물창, 그리고 주 갑판에 까지 사람들로 가득찰 때 까지 승선이 계속 됐다. 서너군데 갑판 위에서 대략의 인원이 파악되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도저히 파악을 할 수 없었단다. 9천명 정도 됐을 때 선원들은 인원 파악을 중단했다. 만 사천 이라는 숫자는 하선 이후 신원조사를 하면서 집계된 숫자다. 대신 선원들은 아래로부터 갑판을 오가며 질서유지를 위한 독려를 계속 했다. 처음에는 남녀를 구분해 칸을 나누려고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소용이 없었단다. 그래도 선원들은 피난민들이 그토록 협조적이며 순종적이서 놀랐다고 이구동성으로 회고한다.
당시 배에 탔던 피난민들도 같은 증언을 했다. 당시 8살이었던 부산의 양승권씨는 부모님과 함께 배에 올랐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2일 날 자정 정도였던 거 같아요. 이제 배에 타라고 해서 화물선에 막 타기 시작했는데 그때 배에 승선할 때 물자를 싣는 화물선이니까 사람을 올릴만한 엘리베이터나 그런 게 없죠 . 로프로 짠 큰 광주리 같은 게 있어요. 거기에 사람이 모두 들어가서 앉는 거예요. 그래서 배 바닥에 쭉 내려놓았는데 제일 밑에는 남자들이 타고 그 다음 2층과 3층 에는 여자들, 아이들이 타는 그런 구조로 돼 있었어요.”
다음날 오전 11시가 되자 배 안의 모든 화물칸, 갑판 위까지 피난민들로 가득 찼다. 더 이상 피난민을 태울 공간은 없었다. 사실 말한대로 배에는 아직 제트유가 상당량 실려 있었다. 지프차 몇대, 앙고르며 군용천막 등 다른 군수품은 부두에 내려 놓았는데 제트유는 부두 쪽에서 내려놓지 말라고도 해서 그랬다고 한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배에는 피난민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여러 선원들이 안타깝게 회상 했듯이 난방시설은 고사하고 화장실 조차 없어 몇 개의 드럼통을 피난민 사이에 두었다. 선원들은 무엇보다 식량이 문제였다고 이구동성으로 미안해 했다.
멜 스미스는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너무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실은 우리 에게도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급히 오다보니 선원 48명의 먹을 거리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식량을 피난민들에게 나눠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몇 명에게 식량을 나눠주면, 나머지 만 명의 사람들이 어떻겠습니까. 오히려 큰 소동이 벌어지겠죠.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머니에 캔디바라도 있었더라면 겁에 질려 칭얼대는 아이들 에게라도 나눠줬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실은 캔디바 같은 게 있기는 했었다. 피난민 승선에 대한 러니의 증언은 이렇다.
“피란민들은 마치 화물처럼 실렸습니다. 그들은 배의 모든 화물창고와 갑판 사이의 공간에 실렸죠. 우리는 그들에게 제공할 음식도 물도 없었어요. 의사도 없었고 통역도 없었습니다. 기온은 영하였으며 화물 창고에는 난방도 없고 전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도 없었습니다. ‘빨리’ 빨리를 외치며 사람들을 차곡차곡 실었습니다. 그런데 꽤 많은 이들이 억척스레 소지품을 갖고 승선했죠. 큰 것은 버리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소지한 채 탄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먹을거리도 있었던 것으로 짐작은 합니다.”
벌리 스미스의 증언이다.
“아이들이 아이들을 업고 있었고, 어머니들은 젖먹이를 안은 채 다른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고, 노인들은 아껴 둔 음식 보따리를 꼭 끌어 안고 왔습니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공포와 함께 진정 어린 감사함이 서려 있다는 것을 봤어요. 우리가 그들에게 “빨리 빨리”라고 외쳤을 때 그들은 순순히 따랐습니다. 영어의 “Hurry! Hurry!”에 해당하는 한국어죠.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말 중 하나였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