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일 작
흥남, 크리스 마스의 기적
김인식 프란치스코 신부님과도 연결이 됐다면 같은 얘기를 했을 것이었다. “안 작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당신도 얘기 했잖아 예술가들의 포에틱 라이센스.”
몬시뇰에게는 목조각상의 사진을 찍어 카톡을 통해 보냈고 간단히 내 생각을 적어 보냈지만 그때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신부님은 전화기를 꺼놓고 어딘가를 만행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종종 그랬다.
내 상상의 나래는 일단 그날의 라루 선장과 메리더스 빅토리호의 기적으로 꽂혔다. 전에도 프란시스 몬시뇰(신부님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성화 이시지만 습관적으로 그렇게 된다) 과는 메리더스호의 기적에 대해 몇 차례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결론으로 몬시뇰은 라루 선장이 말한대로 그때 빅토리아 호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셨다고 했다. 실제 라루 선장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실 레너드 라루 선장의 신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한국과 미국에서 영웅으로 칭송되고 그에 관한 책도 나와 있고 최근에는 한국 뮤지컬로 빅토리호의 크리스마스 기적이 공연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 1914년 1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고, 바다에서 22년을 보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서양에서 상선을 타고 작전에 참가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고 크리스 마스 기적이후 1952년 까지 2년 더 배를 타면서 주로 군수품 수송 작전에 참여 했으며 1954년, 바다를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 ‘마리누스'(Marinus)라는 이름의 수사로 2001년 10월 14일, 87세로 숨 질 때까지 평생을 봉헌했다는 매우 간단한 윤곽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고 결혼은 했었는지, 천주교 신앙은 언제 어떻게 갖게 됐는지 거의 모든 것이 베일에 쌓여 있다. 한국, 미국 인명 사전 모두 공히 그랬다.
끈질긴 웹 서핑 끝에 뉴저지 권위지의 하나인 스타 레저 (Star-Ledger) 2001년 10월 16일자 부고 란에서 그의 부고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다른 자세한 이야기는 없고 짧게 ‘엔도버 타운쉽의 성바오로 수도원의 수사 레너드 마리누스 ’형제‘가 14일, 고향 필라델피아 교구에서 온 선후배 사제 들과 조카 손자, 조카 손녀 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영면 했다’고 적혀 있었고 장례미사와 하관 예배가 언제 어디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고향 교구라는 말과 조카라는 단어에 방점이 찍히게 되는데 이렇게 보면 직계 가족은 없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흥남 철수 당시 레너드 선장은 36세 였는데 벌써 22년째 바다에서 생활했다는 애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10대 중반에 소년 선원이었다는 얘기인데… 이 부분과 관련해서 최근 업데이트 된 미국의 인명록에서 그가 필라델피아의 한 해양 수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동창생들의 증언이 있었다’는 말을 병기하고 있었다.
참, 그의 세례명 마리누스는 “바다(marine)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에서 따왔다”고 한다. 메리너스라고 표기 하기도 하는데 바오로 수도원에서는 마리누스로 부르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비참한 광경을 봤다. 피난민들은 이거나 지거나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항구로 몰려들었고, 그들 옆에는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이 있었다”
라루 선장이 남겼다고 해서 여기저기 널리 소개돼 있는 말이다.
라루 선장은 기독교, 천주교가 가난한 사람들, 핍박받는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곳 흥남 부두에 이고 지고 병아리 손을 잡은 가난하고 핍박 받는 피난민 가운데 예수가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가 주보성인으로 삼았다는 앗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나병환자의 일화처럼…
그러면서 몇 년이 지난 뒤 또 다른 회고를 하고 있다. 언급했는데 의미심장한 회고다.
“때때로 그 항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
그때 라루 선장은 누구처럼 이 사람들을 살려만 주신다면, 이 무모한 항해가 성공한다면, 자신을 온전히 천주님께 바치겠다고 덜컥 약속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덜컥 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무례할 지도 모른다, 알려진 것보다 라루 선장의 신앙심은 깊었고 수도자의 길은 마도로스가 되기전 부터 그의 일생의 지표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그러지 않고는 아무리 가톨릭이 모태 신앙이었다고는 해도 그 나이에 불쑥 수사가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부분 후에 ‘포에틱 라이센스’를 사용하기로 한다.
아무튼 그때의 항해는 정말 위험하고 무모한 항해였다. 흥남 앞바다에 가득히 깔려 있었다는 기뢰도 기뢰였지만 적군과 아군이 교대로 쏘아대는 포탄 공격이 그랬고 아직 배에 실려 있는 다량의 제트유가 그렜다. 천신만고 끝에 배 밑바닥까지 5개의 화물 창고에 가득 찬, 만 사천명의 피난민을 실었지만 그들에게 나눠 줄 물도 마땅한 먹을거리도 없었다. 뒤에 다시 따져 보겠지만 선원들은 그 열악한 사정에서 여러사람이 죽어 나갈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지 않는가. 그래서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선원 중 누구도 선뜻 화물칸 헤치를 열지 못했다고 한다. 용기를 내 헤치를 열었던 3등 항해사 벌리 스미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가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는 피난민들 사이에서 어떠한 문제도, 시끄러운 소리도 없고 조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주 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 뿐이었기 때문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화물칸 안에서 죽었어도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화물칸 헤치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그들의 염려는 기우라는 것이 밝혀졌다.
” 화물칸을 열 때 밑을 내려다보면서 반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일제히 위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그 중에 반짝이던 어린 아이들의 눈동자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도 모르게 울컥 하면서 눈물이 주루룩 흘렀단다.
“화물칸 한 칸을 비우고, 다음 판자를 치우고 다시 밑의 화물칸을 열었습니다. 더 아래칸 사람들 중에는 죽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죽어가고 있지 않을까, 염려하며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일제히 위를 쳐다보는 피난민들의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온전히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마실 물 하나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빅토리호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우리 선원들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배에서 내렸어요.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고마워하는 마음이 그 자세에서 느껴졌어요.”
그때 멀리 거제 섬의 교회에서 울리는 성탄 정오의 종소리가 빅토리 호까지 들렸다.
레너즈 라루 선장의 빅토리호가 흥남 항 외항에 다시 도착한 시각은 그해 1950년, 12월 20일 저녁이었다. 부산으로 갔다가 급히 다시 돌아온 항해였다. 가을 내내 인천, 부산, 일본을 왕복했던 빅토리 호는 12월 초순에는 52갤런짜리 드럼통에 담긴 10만톤의 제트 연료를 요코하마 에서 흥남 부근에 급조된 연포비행장의 해병 항공단까지 운반하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러나 라루 선장과 승무원들은 그때 흥남 부두에 도착했을 때 적의 엄청난 공세 때문에 연료를 하역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미 해병대는 벌써 후퇴 작전 중이었다.
그들 메러디스호 선원들은 다시 부산으로 가서 그 연료들을 내려 놓으라는 지시를 받고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부산에서 연료의 하역을 다 마치기도 전에 즉시 흥남으로 돌아오라는 긴급 명령을 받았기에 절반 가까이의 연료를 그대로 실은 채 흥남으로 다시 돌아온 길이었다. 그때 한반도 주변 해역의 동원할 수 있는 배들은 모두 흥남으로 모이라는 명령을 받은 터 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