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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85회

안 동일 지음

31. 상위복, 임금의 죽음

근정정 지붕에 흰 소복을 입은 내시가 올랐다.
“상 위 복”
임금의 용포를 흔들며 울부짖듯 외쳤다. 큰소리로 다시 외쳤다.
“상 위 복.” 상위복은 ‘임금이여 돌아오소서’라는 뜻이다. 임금의 영혼에게 육신으로 되돌아오라는 외침이다.
계해년 섣달 12월 12일 야심한 밤 시각에 마침내 임금이 숨을 거뒀다. 몇달 뒤 철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는 임금이 승하한 것이다. 임금의 나이는 겨우 34살 이었다.

금원은 밤새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내시감이 상위복을 외친 직후 금원은 대비전에 들어가 다음 일에 대한 지모의 주머니를 열었다. 지금까지 그토록 애를 쓰면서 대비 곁으로 다가갔고 대비의 신임을 받기위해 애썼던 것이 따지고 보면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야 되겠지. 내 자네 말대로 그렇게 하겠네,”
대비와 금원은 함께 대비전을 나섰다. 대비는 옥새를 챙기러 다시 대전으로 갔고 금원은 궁을 빠져나와 북촌으로 달렸다. 장옷을 두른 금원의 뒤에는 흥선군의 천하장안의 한사람인 안필주가 그림자처럼 따르며 호위하고 있었다.
금원은 먼저 안국동으로 가서 정원용 대감을 만났다. 금원의 손에는 대비의 언문 서찰이 들려 있었다. 정원용 대감과 잠시 의견을 나눈 뒤 내쳐 재동의 조두순 대감의 자택으로 가 그댁 정경부인을 만났다. 그리고는 구름재 흥선군의 집으로 가 내당에 한참 머물렀다. 조대감의 정경부인이나 운현궁의 마님은 모두 서국의 책을 배달하면서 교분을 쌓은 터였다. 운현궁 민씨부인은 야소교책을 은밀히 받아보곤 했기에 더 각별했다.

다음날인 13일 아침, 조대비는 중신들을 중희당(重熙堂)에 소집했다.
상좌에 발이 쳐졌고 조대비와 헌종비 그리고 이제 과부가 된 철종비 3대가 들어와 나란히 앉았다. 대비들과 중신들은 아직 상복을 입지 않고 있었고 중전만이 흰소복에 머리를 소녀처럼 길게 내리고 있었다.
조대비가 자리에 앉자 맨 앞에 있던 정원용 대감이 부복하며 한마디 했다.
“저희 신하들과 백성이 복이 없어 이런 망극한 변고를 당했으니 慈聖(자성)께 무엇이라고 아뢰어야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자성은 첨정을 하는 대비, 왕대비의 높인 말이다.
“내가 덕이 없고 복이 없는 탓이오, 누구를 원망하겠소.”
하지만 조대비의 음성은 카랑카랑하고 힘이 있었다.
“이번 국상의 院相 (원상)은 영중추부사 정원용 대감이 맡도록 하시오.”
원상은 국상이 났을 때 모든 일을 관장하는 조정의 상주에 해당하는 자리다. 상중에는 삼정승의 윗자리다.
”예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자성 마마.”
조대비가 전권을 장악하는 순간 이었다.
장김들의 표정이 떨떠름 했다. 조정의 원로가 맡는 게 상례였지만 영의정 김좌근이 맡아도 어색할 것은 없었는데 자신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정원용을 임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팔십 노구의 정원용은 예의상 사양하는 기색도 없이 넙죽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대비의 말이 거침없이 이어졌다.
“망극한 국상을 당하여 원통한 중이나, 속히 종사(宗事)의 대계(大計)를 결정해야 하지 않겠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그다음 입을 열지 못했다. 저들에게는 전혀 대비가 없었던 것이다. 영상 김좌근과 그의 아들 호판 김병기 등 장김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이 전국대보(傳國大寶)를 계승케 할 적임자를 경들은 생각해 둔 바 따로 없는 것이오?”
옆 탁자에 비단보자기에 싸여있는 옥새에 손을 얹으면서 대비가 말했다. 대비의 이 말투는 옥새는 내 손에 있고 자신은 이미 정한 바 있으니 별 이견 없으면 따르라는 어투였다. 어젯밤 대전내관을 통해 자신이 챙겨 두었던 옥새다. 이 옥새를 중전인 안동김씨가 챙겼더라면 문제는 복잡해 질 수도 있었다.

원상 정원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여러 중신들이 별로 아뢸 의견이 없는 것은 자성의 명지(明旨)를 기다리는가 하옵니다.”
“영부사 대감의 말씀이 옳습니다. 자성의 의중을 기다립니다.”
우상 조두순이 거들고 나섰다.
이제 일은 장김의 손을 완전히 떠나 있었다. 장김이 이를 거스르거나 막을 대책은 전혀 없었다.
12년 전, 그때도 똑같은 회의가 바로 이곳 중회당서 열렸었다. 조대비의 아들인 헌종이 돌연 세상을 떠났기에 열렸던 중신회의였다. 그때도 조대비는 왕대비였지만 자신 위에 대왕대비가 있었다. 회의를 소집했고 주재하는 안동 김씨 순원왕후였다.
그때 대왕대비 순원은 “유일 영묘(英廟)의 혈손(血孫) 전계군의 차자 원범으로 하여금 후사를 있게 하라”고 언명했다.
장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터였다. 원범을 임금으로 정한 쪽이 바로 장김이었다.
하지만 그때 조대비는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상감이 생전에 똘똘한 종친 하전을 후사로 정하고 그 이름까지 인손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자리에서는 입도 뻥끗 할 수 없었다. 아무도 후일 문제가 된 항렬을 따져보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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