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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84회

 안 동일 지음

만동의 화불단행

을해결사와 보영회 역시 계속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는 금원이 도모하고 있는 흥선군 집권의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운학선생과 만인공은 계속 천하를 주유하면서 기인 이사와 인재를 찾고 있었다. 인재를 발굴해 대원군이 집권하면 그에게 소개를 하고 또 대원군이 집권을 못한다 하더라도 인재는 인재이기에 손해 날 것 없다는 지론을 폈다.
필제는 많이 차분해져 문경에 내려가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바람직한 일이다. 현봉이 최근에 만나고 왔는데 바지를 걷고 추수에 나서고 있었단다.
“그 장사가 추수를 하니까 순식간에 빈 논이 되더군, 낫가리는 좀 높이 싸. 아주 잘해”
그래도 흥선군 일에는 가타부타 말을 안 하더란다. 년전 세검정 주막에서의 일도 그렇고 필제는 양반네를 믿지 않았다.

보안재 시사에서는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토론했다. 그가 어떻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고 그가 궁극으로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는 왜 실패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조망됐다. 흥선이 들었으면 좋을 내용이었는데 그는 이날 시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또 한사람 그의 복심이라는 어영대장 출신 신헌이 새로이 참석했다. 무관답지 않게 역사에 조예가 깊은이 였다. 헌종 말년인 1849년에 금영대장이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파직, 장김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지난해 간신히 풀려났다. 원래 이름은 관호(觀浩)였으나 옥고와 유배를 겪으며 개명했다. 운학선생 작품이다. 그 역시 추사 문하생이어서 금원과도 추사 생전에 몇 번 시문을 나눈 바 있었다.
향리에 있던 신대장이 상경하자 보안재와 운현궁이 함께 화색이 돌았다. 나이도 그렇고 지체도 그렇고 환재 대감만을 붙들고 이런저런 일을 부탁 하는 것이 면구스러웠는데 훨씬 젊은 신대장이야 말로 금원의 상대역으로 제격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대장을 무관으로만 여겨 중요 인물로 치지 않는 것도 한몫 했다. 특히 만동과 장김쪽 눈과 귀를 속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임금의 환후가 오늘 내일 한다고 하니 대전의 일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세월은 장김과 만동에게 이제 그만큼 했으면 내려가라고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만동의 본원 회정이 돌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만동의 會頂(회정)은 워낙 장막에 가려져 있었지만 회정에 오른지 몇 년 되지않은 상대적으로 젊은 인물이었다.
현봉의 지재에 따르면 60대 중반 이었으니 요절이랄 것 까지는 없지만 다른 본원들에 비하면 단명이었다. 그는 초기 노론의 영수였던 심환지의 후손으로 본향은 평안도 평산이었지만 경상도 밀양쪽에 집성촌과 문중서원이 있어 그곳 서원의 원로 평유사로 신분을 위장 했었단다. 그런 그가 중국의 태평천국과 긴밀히 연계돼 있었다는 얘기다.
그의 장례 때 김좌근 김병기를 비롯 장김의 실세는 물론 전국의 한다하는 노론 유자들이 총집합을 해서 말양이 떠들썩 했다고 한다.
장김과 사이가 좋지 않아 때마다 저들을 겁박하던 회정의 죽음이 장김에게 꼭 좋은 일 만은 아니라고 했다. 원래대로 였다면 차기 회정 이었던 김병기가 회정에 올랐어야 했지만 지난봄 열렸던 원상회의서 병기는 차기회정 직위를 일었다. 만동은 회정의 죽음에 장김의 농간이 개입돼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어 장김이 더 전전긍긍하고 있단다. 새 본원, 회정에 대해서는 현봉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무튼 만동 내에서 태평천국과, 반청복명의 바람은 씻은 듯 수그러들었다고 했다.

저들도 철종의 후사를 생각은 하고 있어 회의의 주제로 올랐다고 했다
저들은 철종의 후사로서 전계군의 아들 영평군(永平君)과 풍연군의 아들 완평군(完平君), 그리고 흥녕군 아들의 사형제 가운데서 한명을 생각은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내기를 통해 얻어낸 정보와도 대동소이 했다.
이들이야 말로 입적관계 없는 삼종의 혈맥이기는 했다. 삼종의 혈맥은 효종 현종 숙종 세 임금을 말하는 것으로 영인군 영조를 옹립할 때 김창집 등 이른바 노론 사충신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한 단어였다. 소론 쪽은 굳이 서자인 영인군 보다는 소현세자 쪽 후손이나 다른 인조의 후손을 후사로 삼으려 했는데 이에 대항해서 노론이 내세운 말이 삼종의 혈맥이었다. 숙종 이후 임금은 이 세 임금의 후손에서 골라야지 다른 쪽 방계로 나가면 안 된다는 논지였다.

그런데 저들이 가지고 있는 왕실족보와 선파록에는 흥선군이 삼종의 혈맥으로 등재 돼 있지 않았다. 이 부분이 신의 한수 였고 심모원려였다. 순조 중엽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이 사도세자 가계로 입적 됐지만 어찌된 셈인지 그 기록이 먼저의 족보에는 등재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은 최근에 와서 흥선군과 이호준이 종친부에 잠시 다시 복귀해서 바로 잡았는데 흥선군과 이호준은 새 족보를 왕실에만 보냈지 굳이 외부에 배포하지 않았다.
어쨌든 장김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왕손들도 하나같이 성에 차는 이는 없었다. 기준치가 올라간 탓도 있었다. 자신들의 전횡은 생각지 못하고 준비가 전혀 안된 강화도령을 데려다가 왕위에 앉혔더니 임술년의 그런 참담한 꼴을 당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만동 새 원상단에서도 장김이 나서는 것을 강력하게 제지하고 나선 것이 저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또 궁내의 망원망이 허물어 진 것도 타격 일 수밖에 없었다.

백결 노사가 모처럼 도성 안에 들어왔다. 금원의 신신당부대로 노사는 깁지 않은 옷과 도포를 입고 있었다. 조성하의 안내를 받아 안국동 정원용 대감 집으로 향했다. 노사는 그집 사랑에서 사흘을 묵었고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도성을 떠났다.
이번에는 정만인 지관이 좌상 조두순 대감의 사랑을 찾았다. 신헌 대장이 안내를 맡았다. 정지관은 조대감을 만나 선친 묘소의 이장을 얘기했고 며칠 뒤에는 함께 명당 묘자리를 다녀 왔고 두툼한 용채를 받아 호탕한 웃음을 남기면서 조대감 댁을 떠났다.
김선복은 김형근의 서자였다. 하지만 어떤 누구보다 영악한 얼자 였기에 자신의 분수와 처지를 잘 알아 처신했다. 그는 주역에 능통했기에 장김이 왕실 족보와 전주이씨 족보인 선헌록을 관장하는 종친부에 심어둔 인사였다.
그가 사직동 자기집 앞에서 말굽에 치어 즉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낮부터 기생집에서 술을 마시고 비틀 대다 군기시 군관의 말에 치었던 것이다. 일은 사고로 처리 됐다.
며칠 전 그는 새로 발간된 왕실족보를 들여다보고 ‘흥선군이 삼종 혈맥으로 새로이 등재 되었다’고 깜짝 놀라 했었다.
사고가 나던 날 술을 마셨던 기루의 기생 선홍은 사발계원 이었고 사고를 낸 군관은 희연과 필제의 무과 동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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