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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68회

안 동일 지음

 

 풍양조씨 조대비

만동의 현 본원이 중화주의에 빠져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중화주의 뿐 아니라 정체불명의 도참비기설을 신봉하고 있단다. 중국 한족의 중화가 아니라 종국에는 백두산에서 발흥한 배달겨레의 중화를 도모한다는 꿈꾸는 자들의 얘기였다.
홍수전이라는 한족 건달 청년이 자신이 야소의 동생이라면서 시정잡배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 직후부터 만동과는 교감이 있었다고 했다.
한때 홍수전은 남경을 점령하고 대륙의 절반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욱일승천했으나 내분으로 인해 사양길을 걷고 있었다. 만동은 처음에는 2인자였다는 숯 굽던 사기꾼 양수창과 연계돼 있었으나 양수창이 숙청되는 바람에 한번 폭삭 망했고 지금은 홍수전의 젊은 책사라는 이수성 쪽과 연계돼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세 꺾인 태평천국의 몰락은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만동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직 그 정확한 내막은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만동은 알수록 흉악한 집단이었다. 이들이 세를 넓히고 준동 하면서 숙종 이후 왕들은 하나같이 독살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효명세자 뿐만이 아니었다.
숙종의 죽음도 석연치 않았고 짧은 보위의 경종은 사후에 오랫동안 독살 논란에 시달렸는데 그 중심에 노론 만동이 있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노론의 겁박 때문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고, 그 이후 정조가 그랬다. 헌종 또한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노론 양반네들의 전횡을 막으려 애를 쓰다가 젊디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필제의 부친과 함께 절명한 이명윤의원은 저들이 전주이씨 왕가의 체질적 특성을 꿰고 있다고 했다. 금원이 보기에도 억측이 아니었다.

만동을 알고부터 만동과 을해결사가 직접 부딪치게 되는 일이 더욱 많아졌다.
을해결사의 저변도 부쩍 신장 됐고 무력 확보, 무장이 어느정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통문 검계와 부딪는 일이 급증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고 피하기만은 않았다.
지난 가을 여주에서는 향촌계를 치려던 자경단을 매복 작전으로 통쾌하게 박살낸 일도 있었다. 결사 용호단의 활약이 컸다.

지난 가을과 올 봄에 걸쳐 을해 결사 전체가 바쁘게 움직이면서 청계라 부르는 노반회의를 필두로 소임회합, 분반 회합, 지역회합이 차례로 열렸다, 그 규모가 만만치 않았다. 그간 여러 맹원들의 노력의 산물이다. 현봉스님 말대로 그만큼 시절이 무르익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금원은 분반 회합을 빼고 모든 회의에 참석 했는데 소임회합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스무명이 조금 안 되는 인원이 모였는데 면면 모두가 듬직했다. 사나이의 첫정은 순간에 판가름 난다고 하더니 사내들은 처음부터 동질감 동지의식을 강하게 느끼는 모양이었다. 금원은 홍일점이었다, 각지의, 각계의 듬직한 재주꾼, 힘깨나 쓰는 장사 들은 다 모인 것 같아 든든했다. 모두들 각자가 심장에 남는 이가 된 모양이다. 아무래도 인정 많은 향촌계, 상두계 사람들이 많아서 더 그랬다.
“어메 다들 어디갔나 했더니만 모두들 여기 모여 있었구만이라우.”
“이렇게 모여 보니 이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패님들을 보니 안 먹어도 배 부르고, 안 마셔도 취합니다. 그려.”
확보된 무장력에 대한 점검이 먼저 있었다. 아직 갈길은 멀었지만 소기의 목표는 달성하고 있었다,
현봉은 구체적인 증좌를 들어 이 나라를 농단해 온 만동이 이제는 태평천국에 돈을 상납하고 있다고 공표했다. 모두들 어찌 그럴 수 있냐고 야단이었다. 저들의 어이없는 만행에 모두들 치를 떨었다. 자국 백성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는데 수만 백성이 수년을 먹고 살만한 거금을 외국의 반란군에게 수년에 걸쳐 바쳤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불성설이었다.
“저런 저런 처 죽일 놈들, 미친 것 아니여?”
“이대로 있다가는 나라의 그 잘난 재화가 태평천국인지 대평호구인지 때국놈들 입속에 다 들어가게 생겼습니다.”
구체체적인 행동과 그 시기에 대해서는 윗선인 노반회의 청계와 전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며칠 뒤 을해결사의 지혜 주머니라는 보영회 모임이 열렸다. 각 노사들을 보좌하는 재사들의 모임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구한다면 누구를 공략해야하는가 열띤 논의가 있었다.
“자 이제 각자의 투표를 열어 보입시다.”
모임을 이끌고 있는 현봉당이 자신의 투표 화선지를 탁자위로 뒤집어 보였다.
‘조대비’ 라고 적혀 있었다.
금원이 웃으며 자신의 화선지를 뒤집었다. 역시 ‘대왕대비 조씨’라고 적혀 있었다.
백결노사의 제자인 김동원 선비 역시 ‘대왕대비 조씨’ 라고 적은 화선지를 보였다. 정만인 지관의 전인이 한 현지관은 ‘홍선군 이하응’이라 적었고 백운학 노사 측에서 천거한 유봉은 ‘호판 김병기’라고 적었다.
결과는 압도적으로 조내비로 낙찰 됐다.
하지만 구중궁궐의 최고 어른 옆으로 다가서는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누가 어떻게 나설 것인지 논의가 이어졌다.
“제가 나서겠습니다.”금원은 흔쾌히 자신이 해보겠다고 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금원의 심중에 떠오른 인물, 믿는 구석이 조성하였다. 조성하야 말로 조대비의 골무였다. 남자라면 활 쏘는 골무였고 여인이라면 바느질 하는 골무였다. 그런 조성하가 금원을 각별히 따랐다. 지난번 전라도 향촌계 사람들 대궐 앞 석고 상소를 했을 때 서국으로 피해 왔던 키 크고 똘똘한 유생이 바로 조성하였다.
성하는 조대비의 작고한 오라버니 조병구의 외아들로 집안의 장손이었다. 실은 6촌 남동생의 아들이었는데 갓난아기 때 입양을 해왔다. 그리고는 조대비의 오빠가 세상을 떠났기에 유복자처럼 컸다. 자식이라고는 작고한 헌종임금 밖에 없었던 조대비의 조카 사랑는 남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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