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23. 서국의 청춘
인사동 서국에 나가보려 무악재를 넘어 도성으로 들어 왔다. 이번에 청국에서 새로 들어온 책의 목록도 작성하고 장부도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촌과 안국방을 지나 인사동 입구쯤에 오니 위쪽 돈화문 쪽이 무척 시끌 벅적했다.
“무슨 일일까?”
옆의 경실에게 금원이 물었다. 경실은 최근 난데없이 맞은 제자였다. 책방 구경을 하고 싶다해서 함께 나온 길이다.
“유생들이 또 연좌 하는가 보지요.”
경실은 근래에 보안재 시회에 가입한 이호준 대감의 여식이었다. 대원군의 사돈이자 측근인 이호준 대감 말이다. 몇 번 녹번정을 와 본 이호준은 대뜸 금원에게 자신의 천방지축 말괄량이 과년한 딸을 교육 시켜 달라고 막무가내로 맡겼다. 추사의 부친이 서얼인 박제가에게 자신의 아들을 맡긴 것과 같았다. 경실은 인물은 곱상했는데 남자로 태어 났으면 좋았을 성격과 성정을 지닌 처자였다. 권세있고 번창한 집안은 아니어도 양반집 규수였지만 깍듯하면서도 부친 이대감이 모르는 살뜰한 구석도 있었다.
경실의 말대로 정궁으로 쓰이고 있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앞에서 연좌 시위가 벌어진 모양이다.
“스승님 우리도 올라가 봐요.”
경실은 스승의 대답도 듣기 전에 먼저 위쪽으로 날쌔게 움직였다.
금원도 시위광경을 보고 싶었기에 제지하지 않고 따라 올라갔다.
워낙에도 그곳은 연좌시위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웅성대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재방을 지나 구름재에 다다르자 고함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합창하듯 내지르는 고함의 내용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를 벌주라는 고함이었다. 하지만 그 가락과 일치도가 달랐다. 성균관 유생이며 한양 인근 유자 선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모여서 임금과 조정에 대고 그런 호소를 하곤 했는데 그들에게는 해본 가락들이 완연히 베어 있었다.
선왕인 헌종 대와 지금의 상 시대에 와서는 한결같이 안동 김문의 비위를 건드린 인사들을 처벌하라는 연좌 시위였다. 안동 김가들에게 밉보였거나 저들을 탄핵하고 비난하는 상소라도 올리면 즉각 삼사와 유생들이 나서 군신을 이간하고 무고를 일삼는 패악 무리를 벌하라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서곤 했던 것이다. 안동 김문에 줄을 대려는 모리배 유생들의 작태였다. 그들은 안김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기곤 했다. 추사 부자도 저들의 생 때에 처벌받은 실레다. 안김은 그걸 백성과 유림의 한결같은 여론이라고 왜곡해 가져다 댔다.
그런데 이날은 연좌하고 있는 사람들은 행색도 표정도 전과 같지 않았다. 앞줄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맨 상투, 맨 저고리의 농투산이 차림이다.
또 다른 때와는 달리 연좌하는 사람의 수보다 많은 군사들이 대문 앞이며 저들 주변을 에워 싸고 있었다.
‘탐관 전라 관찰사 이명신의 탐학을 벌 주소서.’
‘상감마마 께서 내려주신 삼남지방 수해 구호물은 모두 탐관오리들이 착복 했습니다.’
“삼남의 백성들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부디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상감마마.”
몇몇이들은 돌바닥에 머리를 짓쪘는지 이마에 피가 낭자하다.
내용을 짐작 할 만했다.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모양이다.
“벼룩이 간을 내먹지 그 구호물을 관찰사씩 되는 작자가 떼어먹어. 참.”
“나쁜 관리가 한둘인가 모두 다 강도들인걸…”
“오죽하면 여기 까지 올라 와서 저 고생을 하고 있을까 쯧쯧.”
“아무리 그래도 곧 경을 칠 것 같은데 저 살벌한 군사들 좀 봐.”
“죽기 아니면 까물어치기지 뭐.”
“어디서들 저렇게 몰려 왔답니까?”
“전라도 일대 거의 모든 고을에서 향촌계 하고 두레 대표들이 올라 왔데요.”
금원이 알기에 이런 일은 드물었다. 아래쪽 동십자각에 신문고가 있다지만 장김이 집권하기 훨씬 전 부터 북채는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기에 무용지물이었다.
옆 사람 말대로 곧 경을 칠 것 같았다.
모르긴 해도 전라감사라는 작자도 분명 장김에 줄을 대고 있는 벼슬아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대궐문 옆 쪽문이 열리더니 금위장쯤 되는 군관이 나왔다.
그는 시위대 앞에 섰다.
“너희들의 뜻은 조정의 어른들께 전달했다. 지엄한 궁궐 앞을 어지럽히지 말고 이제 물러가라.”
“우리는 상감마마에게 사정을 고하러 왔지 하나같은 관리들에게 고하러 오지는 않았소이다.”
“허허 이런 막무가내 들을 보았나. 아무튼 본관은 당신들한테 물러가라고 경고를 했다.”
“그냥 이대로는 물러갈 수 없소, 그러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소.”
“옳소”
시위대가 함께 함성을 질렀다.
“탐관오리 이명신을 벌 주십시오 주상전하.”
앞줄의 선창에 따라 군관의 경고를 무시하는 함성이 올랐다.
“만 백성이 주리고 있습니다. 상감마마.”
선창하는 목소리가 울부짖자 따라하는 목소리도 절절해 졌다. 선창하는 이도 그랬지만 앞줄에서 따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리가락을 배웠는지 참 우렁차면서 구성졌기에 더 가슴을 파고든다.
구경꾼 사이에서도 따라서 석고 호소를 따라하는 이가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거의 모든 구경꾼이 함성을 질렀다.
“만 백성이 주리고 있나이다. 탐관오리들을 벌 하소서.”
놀라운 광경이었다. 경실도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지르려다 금원과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손을 내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