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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장편소설> ‘조선여인 금원’ 연재 58회

 안 동일 지음

배론의 파란눈 선비들

초막 뒤쪽에 토굴이 있었다. 옹기를 굽던 가마로 쓰였던 토굴이다.
그곳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이란다.
“황사영 형제는 우리 천주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교자이자, 매우 논쟁적인 인물입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에 과거에 합격해 전도가 유망한 유생이었으나 다산 정약용의 맏형의 딸과 혼인하면서 천주교에 입문해 인간 평등에 눈을 뜨지요. 그후 대과 과거시험에 백지를 내면서 ​벼슬길을 마다하고 교리 연구와 교회 일에 열중합니다.”
1801년 신유년 정순왕후는 혹독한 천주교 탄압에 나선다. 스물일곱 살 황사영에게도 체포령이 떨어졌단다. 그가 박해를 피해 수염을 자르고 상복을 입고 숨어든 곳이 바로 이곳 배론이었단다.​
“옹기 굽던 토굴에 여덟 달을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통해 전국의 박해 상황 정보를 상세하게 수집합니다. ​그러던 8월,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참수됐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합니다. 그때 토굴에 앉아 길이 두자, 너비 한자 반의 비단(帛)에 깨알 같은 붓글씨로 122줄 1만3천3백여자를 쓴 것이 세상을 뒤집어놓은 황사영 백서(帛書)입니다.​”

백서는 박해 상황을 자세히 적은 뒤 해결책으로 크게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조선 교회에 대한 재정적 도움을 청하고 조선 교회와 북경 교회가 서로 쉽게 연락할 수 있도록 가게를 세우고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조선이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고 청나라 황제가 조선을 복속시키고 조선 왕을 사위로 삼아 조선을 감독하고 서양의 군함과 군사, 무기를 얻어와 조선을 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서는 보내지도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됐고 황사영은 토굴에서 백서와 함께 체포돼 ​그 해 11월 능지처사를 당합니다. 백서 내용을 본 조정은 천주쟁이들이 나라까지 팔아먹으려 한다며 더욱 가혹한 탄압을 하게 되지요.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소중하고 박해가 모질다 해도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그 두 가지 내용 때문에 황사영을 사대주의자, 매국노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박규수 대감 이며 보안재 성원들이 황사영을 천하의 몹쓸 인간으로 보는 것도 그 이유였다. 하지만 금원은 황사영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이까짓 나라 뭐 해준 게 있다고 애국을 강요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금원과 필제는 베론 골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고 장교사 뿐만 아니라 불란서에서 온 파란눈의 신부와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궁금했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을 모두 질문했다.
가장 논쟁적인 것이 제사 문제였다. 파티에르 신부는 중국과 조선에 처음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초기에 제사를 인정 했던 것은 고유 전통문화를 존중한다는 입장에서 였으나 교황청이 고심 끝에 내린 불가 방침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제사를 인정하면 그다음 것, 나아가 모든 미신을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전교 초기 제사를 인정했기에 큰 무리 없이 세를 넓힐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제사는 미신이다 하며 제방과 제기를 부수는 통에 그 엄청난 희생을 가져 왔던 것인데 금원으로서는 그런 완고함이 너무 안타까왔다.
착하고 바르게 살았던 사람이며 전교가 되지 않았던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냐는 질문에 파티에르 신부는 절묘한 대답을 해왔다.

천당과 지옥 사이에 연옥 이라는 것이 있어 일단 비신자중에 착한사람들은 그리로 가서 다시 기회를 받아 천당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였다.
작금 조선의 정치가 잘못돼 있고 조정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에는 십분 동의 했다. 또 조선의 신분제도 노비제도는 타파 돼야 한다는데 동의 했다. 하지만 자신들 천주교인들은 교회 이외의 결사에 가입하거니 더욱이 소요 민요 정혁 같은 데는 참여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결사에 드는 순간 사탄과 손잡은 꼴이 된다나. 그것이 주님의 뜻이란다.
이 세상 천지만물이 다 천주님이 창조하시고 예견 하신 일인데 임금도 천주님이 내셨다는 것이었다. 모든 권위는 천주님이 주신 것이기에 세속인의 눈으로 보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란다.

금원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논리였다. 안성 미리내 고변 사건에 대해 을 들은 파란눈 신부가 그들을 역성들기 위해 조금은 과장 했다고 믿어진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 모른다.
금원은 그래도 이들 천주교인들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그토록 강조하는 저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적의 편을 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거참, 사람들…할 말 없습니다.”
배론 마을을 나오면서 필제가 무슨 뜻에서 인지 마을 쪽을 돌아보며 금원에게 한마디 했다.
금원은 그때 온순하고 온화한 저들의 그 참혹한 희생들이 쓸데없고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50년 뒤 백년 뒤를 생각하니 더 그랬다. 천주교 마을을 떠나면서 문득 불가의 수승한 가르침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배론의 아침햇살이 금원과 필제의 등을 밀듯 비쳐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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