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배론의 파란눈 선비들
기해년 초기의 박해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4월 중순 부터는 그 기세가 한결 더 누그러져 거의 평온을 되찾았다. 박해가 뜸해지자, 한양의 모처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앵베르주교도 4월 22일 수원으로 내려가 조심스레 성사를 재개했다.
5월 하순 들어 조정의 세도가 임금의 외삼촌 조병구에게 돌아가면서 다시 상황이 급변했다. 금위대장의 지위에 앉아 국사를 전횡했던 그는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인물이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교인들을 색출하기 위한 새로운 법령이 선포된다. 5월 25일에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새로운 칙령(勅令)이 반포되었는데, 내용은 교인 색출에 더욱 착념(着念)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밀고자 김순성의 배신행위가 교인 색출에 큰 성과를 거두게 한다. 김순성은, 교회내에서는 김여상으로 알려져 있던 인물인데, 가면을 쓰고 들어가 교회 상층부에 진입, 교회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아내 관에 제공했던 것이다.
그의 제보로 6월, 유진길, 정하상(丁夏祥), 조신철 등 조선 천주교 재건운동의 요인들이 잇달아 잡혔다.
수원의 한 동리에 숨어 있던 앵베르 주교 또한 김순성과 포졸들이 추적이 좁혀오자 주변 피해를 막기 위해 7월 초순 포청에 자수했고 주교의 쪽지를 받고 나머지 두 신부도 포청에 스스로 나왔다. 포청은 8월 초순 3명의 선교사를 신문했다. 이들은 천주교를 전하러 이 땅에 자원하여 왔으며, 교우들은 고발할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은 곧 의금부로 이송됐다.
8월 14일 새남터에서 선교사 신부 3인의 효수형이 거행됐고 이튿날 서소문 형장에서 유진길, 장하상이 참형을 받았으며, 4일 뒤에 같은 곳에서 조신철을 위시하여 9명이 처형됐다.
신부들과 간부들의 처형으로도 박해는 끝나지 않았고, 김순성은 교인을 고발 체포하는 데 더욱 열을 올렸다. 정부는 10월 18일(음)그간의 박해를 정당화 시키기위해 김 대왕대비의 이름으로 새 칙령을 반포했고 11월 12월 대대적으로 공개처형을 감행했다. 이를 ‘척사윤음’(斥邪綸音)이라 부른다.
기해년 한해와 그 이듬해 초 까지 동안 도합 백 여명의 교인이 희생됐다. 그런데 이 숫자에는 필제 아버지처럼 관과 서원의 혹독한 취조 고문에 병을 얻어 죽은 사람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당시 엥베르 주교는 43세였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 였다.
신부들이 신도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피신처와 도움 준 사람을 말할 수 없다고 했기에 오히려 피해가 더 커졌단다. 주위에 비슷한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가 족쳤기 때문인데 필제의 부친 종원 선비가 체포 된 것도 이 이 때문이다.
조선의 가롯 유다 김순성은 기해옥사 후반 내내 취조관의 보조역할을 자임했다는데 특히 충청도쪽의 신도 상황을 줄줄히 꿰고 있었단다.
그는 이 공로로 오위장(五偉將)의 관직을 얻었으나 몇 년 못 가 사기 행각을 벌이다가 전라남도 신지도(新智島)로 유배되었단다. 교회측은 김순성이 10여년 귀양살이를 하다 몇 해 전인 1853년에 특사로 풀려나 이곳저곳 서원을 전전하면서 가렴주구에 한몫 거들고 있다는 소식까지만 들었다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작자를 그냥 내버려 둡니까?”
필제가 격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주님 께서는 사사로이 원수를 피로써 갚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잘 모릅니다. 굳이 알려고 들지도 않았고.”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기 루씨아 자매님이야 말로 그 사람 때문에 가족을 모두 잃은 분입니다.” 루씨아는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다 주님의 깊은 뜻이 게시기에 저희에게 그런 고난과 시련을 주셨다고 생각 합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밖이 약간 소란스러웠다.
“이제 수업이 끝나 쉬는 시간인 모양입니다.”
“그랬군요, 학동은 몇 명이나 됩니까?”
“여섯명입니다.”
“그 학동들이 공부를 마치면 신부가 되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거룩한 일이지요.”
“그렇게 되면 조선사람들 로서는 최초의 신부가 되는 겁니까?”
장교사와 루씨아는 서로 쳐다보면서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벌써 조선인 신부는 두명이나 배출 됐습니다.”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그래요?”
“벌써 십여년 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배출돼 순교 하셨고, 지금은 최 양업 도마 신부님이 중국에서 돌아오셔서 전국을 다니시면서 성사하고 계십니다.”
“그랬군요.”
역시 한 사람은 순교란다. 신부 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텐데 싶다.
“도마 신부님은 이곳에도 자주오십니다. 신부님은 이곳이 당신의 본당이라고 하십니다.”
그때 파란눈의 신부가 초막으로 들어섰다.
장교사와 루씨아 자매를 따라 금원과 필제도 일어섰다.
“손님이 계셨군요.”
유창한 조선말이었다. 신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푸르티에 신부였다. 복장도 조선옷을 입고 있어 검은 보자기 같은 겉옷과 짧고 검은 동정이 없으면 신부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뭐 좀 꺼낼 것이 있어서…”
장교사가 금원과 필제를 그에게 소개했다. 엉뚱하게도 ‘건실한 불교 종단에서 오신분들’ 이라고 했다. 건실한 불교 종단 맞는 말이기는 했다.
신부는 궤짝에서 책 몇권을 꺼냈고 수업이 끝난 후 대화를 나누자며 환하게 웃었다.
함께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면서 베론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