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동일 지음
배론의 파란눈 선비들
한번 가면 비단길이 열린다고 그랬던가, 다니면 길이 된다고 했던가. 필제와의 여행이 그랬다. 석실서원 여행으로 물고가 터졌는지 같이 다닐 일이 연이어 생겼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너 닷새는 걸려야 할 여행길이 두 사람 에게 다가섰던 것이다.
여행 자체는 즐거웠다. 망중한이었다고 할까. 세상이 이토록 어지럽고 어려운데,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그런 것 다 잊고 유쾌하게 달려 왔다. 이번에도 현응당이 장처사네 말 두필을 빌려 왔다. 무인인 필제와의 말 타기는 현응스님과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더욱이 금원은 이번에 남장을 하고 말위에 올랐다. 남장을 하니까 그것도 양반 복장을 했더니 사람들의 대우가 달랐다. 이래서 남자들의 세상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밸이 틀려 속은 조금 상했지만 사실 필제와의 여행은 늘 즐거웠다.
필제가 배론골에 꼭 가봐야 한다고 한 까닭은 나름대로 자신의 정혁에 동지를 규합하고 후원을 끌어 들이는 활동의 일환 이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바로 자신의 아버지 이종원 선비의 죽음 때문이다. 필제의 부친이 화양서원에 끌려간 표면적이유는 천주교인들과 어울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기해년의 천주교 탄압, 기해박해 때의 일이었다. 필제 부친은 명부에 올린 천주교인이 아니었다. 그저 허의원 이의원과 함께 호기심에 모임에 몇 번 참석 한 것이 전부였는데 밀고자에 의해 신자로 지목됐고 관가에 끌려가 치도곤을 당해야 했고 관에서 나와서는 서원에 끌려가 지독하게 더 당해야 했다. 그 밀고자가 바로 김순성 이라고 필제는 확신하고 있었다.
동 제천의 산골 배론 마을에는 천주교도들의 피신 마을이 꾸려져 있었다. 지난시기 그 혹독한 시련을 이겨낸 천주교도들이 산으로 산으로 피신해 이제는 그곳 골짜기에 들어가 그럴듯한 마을을 꾸려 정착하고 있는 것이었다. 보안재에서도 천주교에 대해 몇 차례 공학을 했었다. 좌장인 박규수대감을 비롯해 대부분 우호적이지 않았다. 금원은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개혁 사상이 마음에 들었다. 의외로 흥선군이 우호적이었다.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 금원은 천주교에 대한 소양을 꽤 열심히 넓혔다. 역관 최창현이 1784년 번역한 ‘성경직해광익’을 꽤 열심히 읽었다. 보안재 공부 때 오경석이 가져왔던 중국에서 넘어온 해설서 ‘천주실의’를 함께 읽었었는데 그 책에 따르면 천주교 에서는 4대 복음서라 해서 예수의 제자 4명이 각기 쓴 행적기를 최고의 성전으로 친다고 했다.
성경직해 광익이 바로 4대 복음서를 요약한 책이었다. 네 복음서에서 주요 성경 구절을 발췌하고 그 해석을 묶은 것이다. 아쉬운 것은 전체 복음서의 3분의 1의 분량 밖에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천주교의 주장이 무엇인지는 알게 하는 귀한 쪽 성경이었다.
그 내용이 참으로 놀라왔다.
“耶蘇(야소)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 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라”
무엇보다 가난한 백성, 힘없는 사람들에게 복 이있고 미래가 있으며 부와 권세를 지닌 사람들이 위로를 이미 받았기에 화 받을 일만 있다는 것에 공감을 느꼈다.
금강경의 무주상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했다.
이 사람들이 이 나라 안김 정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결정적인 순간이 도래하면 우리 편이 될 수 있으려나 여전히 궁금했다. 결사 내에서도 천주교도들과 연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소동이 한번 있었다.
안성의 작은 향교를 중심으로 하는 이쪽 소모임 에서 인근 미리내 천주교 촌의 사람들과 접촉을 했고 친분을 어느 정도 쌓은 다음 ‘당하지만 말고 함께 힘을 모아 여차하면 들고 일어나자’고 했더니 글쎄 관에 고변을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몇 사람의 호승심에서 일어난 불평 불만 표출 사건으로 끝났지만 하마터면 줄줄이 큰 옥사로 이어질 뻔 했던 일이었다.
금원은 가난한 백성의 편에 서자는 사람들이 왜 백성에 편에 서지니까 고변을 했는지 이해가 안됐다. 물론 그 내부에서도 의론이 분분했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금원과 필제는 말고삐를 봉양면의 산골 마을 쪽으로 당겼다. 계곡이 깊어 배 밑 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 한자이름 주론(舟論) 이라 불리는 곳이다. 치악산 동남 줄기 구학산과 백운산 연봉 사이로 십 여리를 들어간 곳, 그곳에 이 땅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 신앙도 아니고 이 땅을 이렇게 만든 유교 신앙도 아닌 새로운 서학, 천주교 신앙이 펼쳐져 있었다.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 가족 100여 가구가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신앙과 삶을 이어나가면서 부터다. 그때 졸지에 재산과 집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교인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계속)